중세의 고딕 건물을 그대로 간직한 동화 속 나라 벨기에의 브리주에 킬러들이 왔다. 런던도 파리도 베를린도 뉴욕도 아닌 브리주라니! 브리주가 어디냐고? 전문 킬러라면 절대, 실수로라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곳이 이곳이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부터 약 한 시간 거리의 작은 소도시 브리주, 이곳에 도착한 두명의 킬러. 딱히 지시를 받은 것도 없는데다, 킬러의 필수품인 권총 하나 챙겨오지 않았다. 등에는 배낭을, 한손엔 가이드북을, 그리고 여행자 숙소인 B&B에 가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꽉 차버린 방이 언제쯤 비는지 진지하게 묻고 박물관 앞에선 10센트만 깎아달라고 통사정한다. 전망 좋은 종탑과 고풍스러운 성당, 운치있게 흐르는 운하가 내내 그들의 배경이 되어준다. 이건 말이다, 은퇴를 앞둔 킬러가 마지막 작업을 지시받고 아르헨티나 가서 탱고를 배운다는 로버트 듀발의 <어쌔신 탱고> 이상으로 사뭇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주목할 만한 신예 마틴 맥도나 감독
<킬러들의 도시>는 대주교를 암살하고 영국에서 도망친 킬러 레이(콜린 파렐)와 켄(브렌단 글리슨)이 보스 해리(레이프 파인즈)의 지시로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리주로 오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차분하고 낙천적인 켄은 중세 유럽을 고스란히 간직한 브리주 관광이 즐겁지만, 여자와 술을 좋아하는 혈기왕성한 레이에게 이곳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따분한 도시일 뿐이다. 물론 길거리 영화촬영장에서 매력적인 여인 클로이(클레멘스 포시)를 만나면서 여행 중의 로맨틱한 교제에 들뜨기 전까진. 그러나 레이와 켄의 티격태격 입씨름과 함께 즐거운 킬러들의 여행담은 여기까지.
중반 이후, 해리가 레이 몰래, 켄에게 대주교 암살 때 실수를 한 초보 킬러 레이를 ‘킬러들의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영화는 이전까지 보여준 블랙코믹물의 방향을 180도 선회, 갱스터영화의 진한 폭력의 색채를 드러낸다. 그리고 전화로만 지시를 내리던 해리가 영국에서 브리주로 오는 순간, 숨겨왔던 긴장은 폭발하고 반질반질하게 닦인 아름다운 중세의 돌길은 낭자한 피로 물든다.
“족히 100번은 더 봤을 기존 갱스터물에서 탈피하고 싶었다”는 신예 감독 마틴 맥도나는 블랙코미디와 누아르, 갱스터물을 한데 섞어놓은 듯한 잡탕영화를 탄생시킨다. 마치 컬트누아르로 불린 오슨 웰스의 <악마의 손길>을 연상시킨다. 다양한 캐릭터가 펼치는 부조리한 상황, 코믹이라는 당의 속에 스며든 죄의식과 속죄라는 인간 도덕성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킬러들의 속내를 솜씨 좋게 헤집은 <킬러들의 도시>는 “가이 리치가 만들려고 했지만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라는 찬사를 얻었다. 물샐 틈 없이 촘촘히 짜인 각본은 지난해 영국독립영화제의 각본상 수상으로,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콜린 파렐의 연기는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수상으로 보란 듯 확인됐다.
맥도나 감독은 8일 만에 쓴 첫 희곡 <리나인의 뷰티퀸>의 초연 이후, 셰익스피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 네개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동시 상영되고 대표작 <필로우맨>의 성공으로 ‘연극계의 타란티노’로 불리며 천재 작가로 인정받아왔다. 단편영화 <Six Shooter>로 2006년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해 영화 연출의 가능성을 알리더니 결국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자신이 가진 출중함을 보란 듯 뽐냈다.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로 꼽는 데는 분명 무리가 따르겠지만, 그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정치적 편견으로 구설수에 올라
물론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칭찬 일색은 아니었다. 영화의 핵심 역할을 하는 레이의 거친 입담이 문제였다. 쉴새없이 나오는 욕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차마 눈감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정치적 편견으로 가득 찬 대사는 지난해 선댄스의 첫 시사 뒤 곧장 도마에 올랐다. ‘헤픈 창녀 둘과 인종차별하는 난쟁이라니!’ 편견으로 가득 찬 레이의 발언에 언론은 분개했고, 기자회견에서 침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거대한 체중의 관광객에게 뚱뚱해서 종탑에 못 올라갈 거라고 비아냥거리거나, 미국인은 담배 연기도 못 참는다는 인종차별적 묘사, 암스테르담에 가면 창녀들이 널렸다는 성차별적 발언까지 심기를 건드리는 언사들은 영화에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맥도나 감독은 이 대사들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판단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맞다. 그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이며 난쟁이를 비하하도록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렇지만 그는 킬러다. 레이는 자신이 이런 말을 내뱉을 때 그게 바른지 그른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떤 면에서 순진한 킬러일 뿐이고, 이 대사들이야말로 레이의 캐릭터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일축한다.
맥도나 감독의 말을 변명으로 치부해버린다면 <킬러들의 도시>의 재미를 만끽하는 데 심각한 장애를 불러올지 모른다. 바로 그의 대답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장점이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사는 단순히 영화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수단이 아닌 인물의 기쁨, 놀람, 슬픔, 분노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레이가 브리주를 ‘시궁창 같은 곳’이라며 넌더리를 내거나, 성당에 간 켄에게 ‘빌어먹을! 난 맥주가 마시고 싶다고!’라고 소리치거나, 켄이 주문한 맥주를 ‘게이맥주’라고 놀리는 건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레이 캐릭터 자체다. 그리고 그런 레이의 투덜거림에 대해 ‘문화적인 소양’을 운운하며 ‘좀 둘러보라’는 권고를 하는 켄의 대사만큼 켄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장치는 없다. 콜린 파렐과 브렌단 글리슨 모두 아일랜드 출신임을 감안해 감독은 아일랜드 배우의 억양과 말투를 적극반영해 맞춤 대본을 써내려갔다. 마틴 스코시즈를 또 쿠엔틴 타란티노를 연상시키는 인물간의 속사포 같은 대사로 영화는 생활에 가까운 살아 있는 대화로 가득 찬다. 기존의 진지함을 선뜻 내던지고 코믹하고 신경질적인 연기를 소화하는 콜린 파렐, 파렐의 연기를 돋보이게 한 훌륭한 버팀목 브렌단 글리슨, 기존 악역의 틀을 깬 보스 해리 역의 레이프 파인즈까지. 세 배우는 그들의 전작 어디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스타일로 대화의 폭을 넓힌다.
사실 생생한 대화의 묘미를 그의 전유물로 보긴 어렵다. 스스로 극작가 데이비드 마멧이나 해럴드 핀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지만, <킬러들의 도시>는 핀터의 극작 <벙어리 웨이터>와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버밍엄의 지하실 방, 침대 시트의 깨끗함과 주전자와 성냥갑에 대한 시답지 않은 대화를 전개하다 정체 모를 곳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상반된 성격의 ‘구스’와 ‘벤’은 영화 속 레이와 켄과 똑 닮아 있다. 또 일상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실존을 끊임없이 다루는 핀터의 방식은 영화 속 전개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맥도나는 “극작가 시절, 연극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할 수 있는 극본을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항상 영화처럼 쓰려” 했고, 그러다보니 “언젠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며 영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드러내지만 결국, 16살 때 부모가 고향 아일랜드로 떠나고 형과 영국에 남겨진 뒤 꾸준히 연마해온 극작가의 피가 그의 영화를 살찌운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킬러들의 속죄
코믹한 기조를 유지하지만, 영화의 절반은 킬러의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실수로 어린아이를 죽인 레이의 속죄가 차지하고 있다. 레이와 켄이 미술관에서 15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히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최후의 심판>을 보며 나누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이 보이는 곳, 차례로 심판 받기를 기다리며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잡아먹히는 초현실적이면서도 끔찍한 그림 앞, ‘죄 많은 인간들이 신의 심판을 받는 최후의 날’, ‘천당과 지옥 갈 사람을 골라내는’ 연옥의 그림 앞에서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결국 킬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자의식이다. 극작 시절부터 맥도나는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조차 인간 본성에 남아 있는 선한 부분을 찾고자 했고 영화의 마지막을 킬러들의 윤리적인 선택으로 남겨두기에 이른다. “할리우드영화에서처럼 선과 악을 결론짓고 싶지는 않다. 열린 결말을 주고 싶었다.”
<킬러들의 도시>는 어쩌면 ‘총을 든 자들의 최후의 심판’일지 모른다. 비록 직업적인 킬러지만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맥도나 감독은 ‘킬러들의 도시’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슬픔의 정서까지 심어놓는다. 맥도나의 성취는 바로 이 지점이다.
네 번째 주연배우, 도시 브리주
“브리주는 세 배우에 이은 4번째 배우였다.”
<킬러들의 도시>의 원제는 ‘In Bruges’다. 맥도나 감독에게 브리주의 모든 것, 운하, 미술관, 성당, 종탑, 심지어 바닥의 돌 하나까지도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도구였다. 심지어 몇몇 세트를 빼고 브리주의 곳곳을 촬영장소로 삼은 까닭에 주연을 맡은 콜린 파럴이 브리주를 두고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큰 세트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중세, 상업도시로 번창했던 브리주는 암스테르담과 거의 비슷한 풍광에도 그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한 작은 관광도시다. 시나리오 집필 전 브리주에 잠깐 기거했던 감독은 처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거의 영화를 찍지 않은 것에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초반 관광객으로 흥분했던 마음은 점점 지루함으로 변모했고, 그의 뇌는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마치 이곳에서 문화적 섭취를 원하는 켄과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레이처럼. 캐릭터가 이곳에서 탄생한 만큼 배경 역시 브리주여야 했다.
놀랍게도 브리주 도시 모두가 영화의 촬영에 협조적이었다. 할리우드영화에 자신들의 도시가 나온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장점이 있다고 여겼고,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촬영 협조를 약속했다. 미술관에서 보스의 그림을 직접 촬영할 허가가 주어졌으며 성당이나 종탑, 거리까지 통제가 가능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시장을 비롯해 시민들이 엑스트라로 기꺼이 응해주었다. 시나리오에 나온 50곳 중 49곳을 실제 브리주에서 촬영했다. 영화 속 레이와 켄의 관점이 다르듯, 브리주의 이미지 역시 두 가지로 나뉜다. 운하와 고딕 건물이 있는 아름다운 브리주 한편으로는 안개로 싸인 겨울밤, 난쟁이가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배경 또한 드러난다. 마치 억눌린 듯한 공기는 디킨스의 작품이나 ‘잭 더 리퍼’의 어두운 공간과도 다르지 않았다. 상반된 이미지 속에 결국 브리주는 어느 영화에도 담기지 않았던 가장 독특한 공기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