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욕망의 경제학’은 지금 여기에서도…
2009-03-12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중산층 욕망의 사형선고,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시대 구분 없이 공감 얻는 이유

파티에서 만난 두 남녀의 눈빛이 마주친다. 미래의 휠러 부부,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럿)이다. 홀의 한구석, 둘이 대화를 나눈다. 에이프릴은 ‘연기 수업’을 받는 중이라 말하고, 프랭크는 먹고살기 위해 이런저런 일(항만 노동자, 식당 계산대 야간 점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진짜 ‘관심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그 얘기를 하면 ‘지루해서 30분 안에 죽을 것’이라고 재치있게 대답하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컷. 춤을 추는 남녀의 눈빛이 뜨겁다. 또 한번의 컷. 뜨거운 눈빛은 7년 뒤 프랭크의 지루하고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이어진다. 이 두번의 컷(생략)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어떤 영화인지를 잘 말해준다. 첫 번째 컷(생략)으로 우리는 프랭크가 진짜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듣지 못한다. 사실 그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회피하고 말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중에 프랑스 이민 이야기가 나왔을 때, 프랭크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주저한다. 에이프릴은 그렇다면 이민을 가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며 설득한다. 여기에는 어떤 비대칭 또는 불균형이 있다. 그것은 둘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삶에 대한 태도(또는 욕망)의 차이다.

일종의 ‘오인’에서 시작된 비극

두 번째 컷(생략)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부의 7년간의 결혼 생활, 즉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각각 지쳐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찬란하게 시작되었으나 각박한 현실 때문에 서서히 빛이 바래가는(또는 바래갈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찬란한 빛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종의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 사랑은 ‘우리가 꿈꾸던 사랑’이 아니라 에이프릴이 꿈꾸던 사랑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면 그 비극은 바로 그 ‘오인’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휠러 부부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에이프릴에 대한 영화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사랑’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솟아올라 ‘생활의 논리’를 교란시키는 ‘삶의 욕망’에 대한 영화다. 그 ‘삶의 욕망’은 온전히 에이프릴의 것이다.

모든 것은 무대 위의 에이프릴이 객석에 앉은 프랭크의 곤혹스러워하는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시작된다. 이 냉정한 컷은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실금을 내는 ‘일격’(cut)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프랭크의 ‘위로’는 오히려 그 실금을 메울 수 없는 깊은 균열로 만든다. 복도를 걸어나오는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이해받지 못한 ‘삶의 욕망’은 끝내 분노로 폭발한다. 그것이 분노인 것은 에이프릴 자신에게조차 그 ‘삶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나중에 온다. 다시 시작된 평온한(?) 아침,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거리에 나와 있던 그녀에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허리를 펴고 텅 빈 거리를 바라보던 그녀에게 떠오르는 기억(첫 번째 플래시백)은 부부가 집을 사기 위해 그 거리로 오게 된 첫날이다.

부동산 중개업자 헬렌 기빙스(캐시 베이츠)는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교양있는 중산층’을 위한(따라서 휠러 부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주거지역임을 강조한다. 에이프릴은 자신이 ‘언덕 위의 하얀 집’과 자신의 ‘삶’을 교환한 것임을 깨닫는다. 또는 ‘우월한 척 위선 떨며’ 사는 동안 정작 ‘삶’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서랍 속에서 프랭크의 옛날 사진을 꺼내보던 그녀에게 떠오르는 기억(두 번째 플래시백)은, ‘인생을 만끽하며 살고 싶다’던 프랭크의 활기 넘치는 모습이다. 그 순간 사진 속의 ‘파리’(Paris)는 그녀에게 ‘다른 삶’이 된다. 이 두번의 기억(플래시백)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이다. 그녀에게 파리는 위선 속에 병들어가는 삶에 문득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었고, 꿈꾸어 볼 만한 ‘다른 삶’이었다. 주변의 ‘교양있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 그리고 프랭크조차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에게 파리는 ‘더 나은 생활’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이었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아마도 니체라면 그것을 ‘예술의지’라고 불렀을 것이다.

감독 샘 멘데스는 시나리오를 읽고 프랭크와 에이프릴 커플의 본질을 ‘연기’(演技)로 파악했다고 한다(김용언, <씨네21> 691호). 사실 이 부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화 속의 많은 인물들은 ‘연기’를 한다. 50년대 미국 대도시 교외 지역에 거주하는 그들은, ‘교양있는 중산층’을 ‘연기’한다. 그들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그들만의 ‘사교 공동체’가 되기를 꿈꾼다(놀랍게도, 영화에는 단 한명의 흑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 ‘중산층 이미지’를 만들고 판매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부동산 중개업자 헬렌 기빙스가 판매하는 것은 정확히 그러한 욕망이다).

<아메리칸 뷰티>와 무엇이 같고 다른가

그들의 ‘사교 모임’은 동시에 서로에 대한 곁눈질과 탐색이 이루어지는 경쟁의 무대이기도 하다. 휠러 부부의 프랑스 이민 계획에 대한 ‘유치한 발상’이라는 우려 섞인 논평은, 부러움과 질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계획을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기회로 해석한다(이것은 어느 정도 프랭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에이프릴이 견딜 수 없는 것(또는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생생한 ‘삶의 욕망’이 그 경쟁적인 욕망의 공동체 안에서는 결국 퇴색해버리거나 질식해버리고 말 것임을 예감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공허’할 뿐 아니라 ‘희망없는’ 삶인 것이다. 아마도 그 불길한 예감이 프랭크의 승진으로 약속된 좀더 윤택하고 안락한 생활에 그녀가 끝까지 저항하는 이유일 것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의 ‘연기’는, <아메리칸 뷰티>(1999)의 버냄(케빈 스페이시)이 말했던 ‘쇼’의 다른 말(“우리 결혼은 일종의 쇼예요. 속은 맹탕인데 아닌 척 포장한 광고처럼”)이다. 어쩌면 버냄은 10년 뒤의 에이프릴(혹은 프랭크)일 것이고, <아메리칸 뷰티>의 삶은 40여년 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그 삶일 것이다. 결국 멘데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메리칸 뷰티> 2탄’을 찍은 셈이다. 두 작품은 국외자 샘 멘데스가 그려낸 ‘미국 중산층의 초상 2부작’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아메리칸 뷰티>에서 나타나는 미국 중산층 내면의 자본주의적 욕망의 경제학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그것보다 한층 더 뿌리깊고 강하다. 가장의 경제적 무능력은 성적 무능력(impotence)이 되는 반면, 어린 소녀는 ‘평범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욕망의 대상이기 위해, 즉 상품가치를 갖기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과 욕망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아메리칸 뷰티>는 <레볼루셔너리 로드>보다 한층 더 따듯한(어떤 의미에서는 ‘희망적’이기까지 한) 영화다. 무능력한 가장은 성욕을 되찾으면서 ‘다른 삶’을 선언하고, 어린 소녀는 자신의 ‘공허한 쇼’를 고백하고 위로받으며, 동성애를 혐오하던 해병대 출신 중년 가장은 자신의 내밀한 동성애적 욕망을 표현해볼 기회를 갖는다. 무엇보다 바람에 날리는 봉투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연대하는 젊은 커플이 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49537; 캠벨은 꿈꾸던 이웃집 여자와의 정사에는 성공하지만,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아메리칸 뷰티>의 버냄은 딸의 친구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지만 대신 ‘삶의 욕망’을 회복한다. 결국 버냄은 죽지만,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적어도, 후회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현대적인 삶’의 태동기를 바라보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시선은 <아메리칸 뷰티>의 그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비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에이프릴의 ‘감정의 떨림’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 전후 번영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안락한 삶 이면에 있는 ‘삶의 공허’를 밀도있게 그려낸다. 물론 많은 부분 리처드 예이츠의 원작 소설에 빚지고 있을 것이다(나는 아직 원작 소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감독의 간결하고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가 없었다면 그러한 밀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통근열차를 타고 움직이는 ‘모자부대’의 행렬은 전성기 포디즘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캐리커처다. 영화에는 인물들의 실제 감정과 외면적인 행동 사이에서 시시각각 발생되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배우들은 공허하게 ‘어색한 연기’를 하는 인물들을 정말 유감없이 잘 ‘연기’해낸다. 그 ‘공허한 연기’에 맞서기 위해 펼치는 에이프릴의 마지막 저항은 깊은 울림을 낳는다(결국 그녀의 마지막 저항은 ‘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에이프릴과 존의 광기는 결국 같은 것

에이프릴은 왜 끝내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공허한 말 때문이다. 그녀는 여러 번 ‘그만 얘기하라’고 외친다(공연 뒤 차 안에서 공허한 위로를 해대는 남편 프랭크에게, 그리고 역시 차 안에서 충동적인 정사를 나눈 뒤 사랑 고백을 하는 이웃집 남자 &#49537; 캠벨에게). 어느 날 문득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그녀를 뒤흔들었던 ‘삶의 욕망’은 결국 이해받지 못한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소통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비루한 삶’인지에 대한 그들의 기준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녀의 죽음과 자본주의(또는 중산층) 욕망의 전도사인 헬렌 기빙스의 아들 존(마이클 셰넌)의 광기는 결국 같은 것이다. 그 죽음과 광기에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끝내 보청기를 꺼버리는 헬렌의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뷰티>의 어린 커플은 연대하고 가출(탈주)하지만, 에이프릴-존은 커플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어찌 50년 전 ‘미국적 삶’의 초상이기만 할 것인가? ‘삶의 윤리’를 지배하는 ‘생활(생존)의 논리’, ‘삶의 욕망’을 질식시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경제학은, 지금-여기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시대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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