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았었다. 심지어 영화 예고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몇주 전 사다놓은 원작 소설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 영화에 관련된 내 지식은 이 영화와 관련된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기본 설정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연히 이 영화를 옹호해야 할 입장이 되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잠시 머리를 굴리자 답이 나온다. 아, 출신성분.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작품을 보지 않고 출신성분을 읊는 것으로 비평 절반이 끝날 수도 있는 영화다. 생각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뭄바이의 빈민가 출신 소년이다. 종교분쟁으로 고아가 되었고 뭄바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험악한 일들을 다 겪는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엘리트 가문 출신인 부유한 인도 외교관 비카스 스와루프의 영어 소설이 원작이고 인도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국 감독 대니 보일과 영국 작가 사이먼 뷰포이가 각색한 영국영화다. 심지어 인도인 주인공을 연기하는 데브 파텔도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 배우다. 여기에 영화가 제목에서부터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물질적인 해피엔딩까지 치면 당연히 보는 사람들은 미심쩍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제3세계의 빈곤을 이야깃거리로 착취하는 선진국의 오락물로 봐도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다국적 식당 체인점의 번지르르한 코스 요리와 같은 맛을 풍긴다.
‘영국 감독 작품’이라는 출신성분의 문제
여기에 대해 변호할 필요는 없다. 다 공공연하게 표면에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로 나온 작품이 유해한가? 그렇다면 얼마나 유해한가?
가장 기초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현대 인도를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나라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책이나 신문이 제공하는 간접정보를 흡수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최소한 그곳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몇년 이상 살아봐야 한다. 인도처럼 복잡한 나라라면 사실 그것도 모자란다.
그러나 비교대상은 있다. 오리지널 발리우드영화들과 미라 네어나 디파 메타와 같은 감독들이 만든 정통적인 아트하우스영화들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출신성분이 의심되는 것은 영국영화여서이기도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 영화가 이들 중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다. 빈민가의 밑바닥 세계에서부터 호사스러운 인도 텔레비전 세트까지 커버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세계는 일반적인 현실세계가 가지는 복잡성과 입체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모방한다. 이 묘사가 서구인의 관점이냐를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인도에서 나오는 아트하우스영화에서 ‘서구적 관점’을 제거하면 뭐가 남는가?
이야기 자체는 어떤가? 이 영화가 제공하는 완벽한 해피엔딩과 정갈한 로맨스, 술술 흘러가는 드라마는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 자말 왈리크의 이야기는 미라 네어의 <살람 봄베이>(1988)의 길거리 소년들처럼 당시 사회의 정확한 반영은 아니다. 하지만 자말과 <살람 봄베이>의 소년들은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을 통해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관객은 모두 자말과 그의 이야기가 어떤 목표를 위해 디자인되었는지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묘사되는 세계가 복잡한 것만큼이나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자말의 이야기는 가장 안전한 부류의 오락이다. 관객에게 박진감 넘치는 즐거움과 대리 만족을 제공해주지만 정작 그것을 통해 거짓된 희망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모든 영화’가 아니다. 그냥 제한된 목표를 가진 하나의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의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들은 인도를 다룬 수많은 다른 영화들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많은 관객에게 그 영화들로 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