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빈민가의 풍경이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재현되었다거나 결국은 빈민가 소년의 백만장자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일 따름이라는 비판을 전적으로 틀린 평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를 말할 때, 길게 언급할 만한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정작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점은 영화 속 현재가 과거를 호출하는 방식, 다시 말해, 퀴즈쇼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자말은 어떻게 모든 질문의 답을 아는가?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어떻게 자말의 과거 경험담과 일치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의아함은 사실, 이 영화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뻔하거나 영화상에서 금기시되어야만 하는 물음이다. 물론 영화 내에서 그걸 의문시하는 인물들은 있다. 퀴즈쇼 진행자와 경찰인데, 자말은 그들에게 ‘우리(하층민)가 삶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터득할 수밖에 없는 답들을 모르는 당신들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반박한다. 위의 물음을 하층민의 삶과 괴리된 상류계급 지식인, 혹은 관료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가장 큰 결함을 상류계급의 윤리 혹은 의식에 대한 비판적 제스처로 방어하는 셈이다. 그걸 뒤집어 말하자면, 자말에게 답을 제공해준 과거의 기억은 인도 하층계급의 역사를 대변한다.
살림을 왜 자말의 세계와 대척점에 놓는가
하지만 정말 그럴까? 퀴즈쇼 진행자가 질문을 던진 뒤 자말이 답을 말하기 직전의 시간적 틈에 영화는 자말의 과거 에피소드를 지속적으로 삽입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반복 교차된다는 건데, 문제는 이러한 편집이 질문-정답이라는 필연적인 관계에서 지탱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퀴즈쇼를 완성시켜주는(질문만으로 퀴즈쇼는 완성될 수 없다) 답이 자말의 과거 속에 존재한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줄 때, 다시 말해, 그의 파편적인 기억이 궁극에는 정답의 단어로 귀환할 때, 여기에는 통합의 과정이 있다. 자말의 과거와 현재는 충돌하며 공존하는 게 아니라, 퀴즈쇼 안에서 서로를 봉합한다. 이 과정의 귀결점이 바로 퀴즈쇼, 즉 자본이라는 환상이며, 하층계급 소년의 역사가 내재한 사회적 모순이 그 과정에서 제거되거나 긍정적인 모양새로 탈바꿈함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자말을 하층계급을 대변하는 자처럼 그리지만, 실은 그를 계급의식을 지운 가난한 개별인간으로 만든다.
여기서 영화가 강조하는 건 이 개별인간의 가난을 순수, 선량, 청렴 등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변치 않는 사랑에 호소하고, 그가 일확천금의 수혜자가 될 자격을 갖춘다는 내적 논리를 증명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퀴즈쇼 우승이 단지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적절한 대가임을 암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몇 가지 난관을 통해 그의 도덕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자살과 다름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말의 형, 살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하층계급의 고아 소년이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가장 음습한 길을 선택하는 인물인데, 영화는 그의 세계를 자말의 세계와 대척지점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폭력과 살인의 악순환에 빠져든 그는 자말로 대변되는 순결한 가난의 얼굴에 돌아오는, 혹은 그 얼굴이 딛고 선 실재며, 사회구조를 환기시키는 하층계급의 얼룩이다. 한마디로 자말이라는 ‘정직한’ 가난이 정당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살림은 영화적으로 처벌되어야 하며, 퀴즈쇼라는 환상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그는 결국 스스로 퇴거해야만 한다.
그러니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거짓이 있다면, 그건 일부 인도인들의 반응처럼 인도 하층계급의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재현이 아니라, 하층계급의 이미지를 취하되, 애초 하층계급의 삶을 다룬 적 없는 영화의 화법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