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외신기자클럽] 폭력적인 영화의 구원
2009-04-08
글 :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김기덕 감독의 초기작보다 더 강도가 센 <똥파리>가 말하는 한국

상상해보시라. 인적없는 해변가. 파란 바닷물에 발을 적시며 당신은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갑자기 ‘퍽!’ 하고 정체불명의 돌멩이 하나가 당신의 머리를 정통으로 후려친다. 그게 바로 대략 영화 <똥파리>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다. 부산에서 만난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되기 전 이미 유럽 여러 영화제에서 선을 보였다.

도입부. 웬 애송이 녀석 하나가 한 소녀의 뺨을 연거푸 갈긴다. 그러자 어디선가 두 어깨가 시야로 튀어들어온다. 그 어깨의 주인공은 앞의 애송이를 반쯤 죽여놓는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소녀의 얼굴에 침을 탁 뱉는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 사내는 우연히 한 여고생과 마주친다. 한눈에 반했음이 분명하다. 왜냐고? 사내가 여고생의 얼굴에 침을 뱉고 한대 갈기니까. 그녀도 그런 사내에게 반한다. 관객이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영화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를 계속 보려면 관객은 어찌됐든 무조건 그 사내를 쫓아다녀야 한다.

양익준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과 연기를 한 영화 <똥파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창출하고 있다. 이 작품에 사용된 언어는 한마디로 욕지거리의 일제사격이라 할 수 있다.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아니라 주먹으로 한다. 초반 15분이 지나면 관객은 비로소 이 희한한 의사소통법을 해독하기에 이른다. 장면 하나 하나, 따귀 한대 한대가 계속되면서 영화는 서서히 인물의 겉껍질을 벗긴다. 마치 강도가 금고를 드릴로 뚫듯이. 영화 시작하고 두 시간이 경과한 뒤 영화는 마치 공중곡예를 한 듯 180도 회전해 있다. 처음 관객에게 보여진 인물들의 정체가 그와는 정반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사실은 진짜 피해자였고, 겉보기에 강했던 인물들은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한 인물들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영화 <똥파리>는 또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양익준 감독은 폭력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20세기 후반부 한국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이 영화에는 전기파가 움직인다. 전쟁터를 지나 데모진압 현장으로, 가정폭력으로, 그리고 청소년의 비행으로… 이렇게 폭력과 공격성은 유산으로 물려 전해진다.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던 김기덕 감독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폭력성보다 더 거친 영화 <똥파리>, 이 작품에 나타나는 폭력성은 끔찍한 의문 하나를 관객의 눈 속에 던져놓는다. 만일 폭력과 식민, 전쟁과 분단을 벗어난 한국을 아는 한국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폭력성이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혹은 본성을 이룬다는 말인가? 다행히 <똥파리>는 결말 부분에 구원의 길을 열어놓긴 하지만 말이다.

양익준 감독의 처녀작인 이 영화는 현재 영화제작의 전반적 추세와 완전히 결별한다지만, 동시에 한국영화의 전통선상 위에 그대로 놓인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이 영화에서는 계속 반복되는 처절한 운명, 가정의 분열,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장녀 등 기존의 전통적 구조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재창조된다. 이미 잘 알려진 그러한 구조들 모두가 이 작품에 그대로 나타나는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는 다르게 표현된다. 나운규 감독에서 장선우, 김기덕을 거쳐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폭력성 자체가 한국영화의 역사를 그 기원에서부터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성은 대개 여자들을 강간한다거나 그녀들의 매춘, 심지어는 근친상간 형태로 표현된다.

이와는 반대로 <똥파리>에서 성(性)문제는 더이상 없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 발탁된 배우 김꽃비, 그녀가 맡은 역은 여고생이다. 이미 여자가 되어버린 소녀, 창녀라기보다 어머니랄 수 있는 이 인물은, 다른 영화에 흔히 나오는 롤리타와 비교해볼 때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한 욕망의 대상이다. 한국의 수놈이란 늘 가슴팍을 떡 벌리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눈썹을 잔뜩 찡그린다. 하지만 그런 한국 사내가 갈망하는 건 오로지 하나다. 그건 오목한 치마폭에서 느끼게 되는 여자의 허벅지가 주는 따뜻한 온기다. 그것도 사내다움을 한껏 표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강변에 앉아 엉엉 울고 싶은 마음에서.

번역=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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