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성난 얼굴로 상처를 돌아보다
2009-04-3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과잉의 드라마로 보이는 <똥파리>의 죽음을 신중하게 읽어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똥파리>의 뜨겁고 정직한 에너지가 상투적일 수 있을 이야기마저 진짜 삶의 일부로 끌어안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똥파리>를 다시 보며 나는 처음 봤을 때에는 단순히 지나쳤던 문제들에 주목하게 되면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의 상투성을 상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똥파리>의 상투성에는 삶 혹은 진정성이 있다’는 모호한, 그러나 우리가 너무 쉽게 취하는 수사로 설명하는 방식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폭력만 남는, 폐쇄된 회로 같은…

폭력의 사실적인 재현이나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성찰 등과 같은 영화의 큰 그림은 사실, 이 영화에서 정작 사소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양익준이 그 상투적인 그림에 자신의 인장을 새기기 위해 연민의 감정 대신 가차없이 단단한 무언가를 붙들고 있음을 보는 게 중요하다. 이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그건 (흔히 생각하듯) 영화가 정서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정서적 과잉의 끝에 내려치는, 때로 지나치게 공평무사하다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의 냉정함 때문인 것 같다. 양익준은 생각보다 독한 감독이고 <똥파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폐쇄된 회로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 속 악행이 쌓일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오로지 폭력에 복수하는 폭력만 남는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건 영화 속 인물들이 아니라 영화 밖 관객이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인물들은 이런 구조나 타자의 본질에 대해 무지한 편이며, 그 무지에 의해 짐승 같은 인물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유대가 가능해진다. 연희(김꽃비)는 상훈(양익준)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 건달이 엄마의 포장마차를 때려부순 그런 깡패라는 건 모르고, 상훈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영재가 연희의 동생인 걸 모른다. 상훈의 누나는 상훈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르고, 만식의 고깃집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은 결과물이라는 걸 모른다. 무엇보다 연희와 상훈은 연애 비슷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도 각자의 가족사나 상처를 숨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물들의 이런 무지함이 영화적 비극을 배가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영화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못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는 인물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전자의 방식이 냉소주의로 흐를 위험만큼 후자의 방식이 시스템의 구조를 외면하는 환상으로 비판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양익준은 같은 현상 앞에서 ‘결국은 모두가 공모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에게 기회는 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연희와 상훈이 구질거리는 가족사를 끝내 서로에게만은 표출하지 않을 때, 그건 거짓말이기보다 밑바닥 인생이 지키고픈 마지막 자존감, 괜찮은 인간으로 보이고 싶다는 서투른 욕망이다. 그리고 영화가 그런 기회를 말할 때, 순진한 휴머니즘으로부터 매몰차게 스스로를 분리시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런 맥락에서 좀더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부서진 가족사는 어떻게 복원되는가

폭력을 전면화하는 영화들의 관습적인 선택처럼 <똥파리>의 결말도 주인공의 죽음이지만, 이 죽음은 왠지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이 죽음이 단호한 결단처럼 보이며, 그것의 수수께끼를 푸는 게 영화를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길처럼 보일 정도다. 영화가 명확히 제시한 대로 상훈이 죽는 날은 그가 그간의 과거로부터 단절하기로 결심한 날이다. 말하자면 앞서 언급했던 인생의 기회가 그에게도 주어질 찰나 그는 어이없게도 동료에게 살해된다. 우선 이 죽음의 순간을 중심으로 앞뒤의 두 장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상훈 아버지의 자살기도다. 죽기 하루나 이틀 전, 상훈은 자살을 기도하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간다. 그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상훈의 죽음 뒤, 연희와 누나, 조카, 만식이 고깃집에서 가족처럼 모였을 때, 상훈이 차지하고 있었을 자리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는 점이다. 만약 상훈이 살아 있었다면 그 자리에 아버지는 없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상훈은 그 자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내(엄마)와 딸(동생)에게 폭력을 가한 자(아버지)와 그걸 방관하고 폭력으로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자(아들)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을 영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뿐더러 화해로 포장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걸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훈의 얼굴 위로 과거의 기억인지, 환영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엄마와 여동생이 평화롭게 뛰어노는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죽어가는 짐승이 오랫동안 꿈꿔온 가족의 형상이 삽입되는 순간인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아버지는 물론, 상훈의 모습이 없다. 나는 영화 속에서 가장 평온한 이 장면이 무척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쇄가 아예 부재할 때만 복원될 온전한 가족의 이미지.

그러니 부서진 가족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죄의식의 단순한 공유나 용서가 아니라,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필요하며, 그런 단절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정지될 때만 가능하다는 영화의 암묵적인 믿음을 이해할 만하다. 이때 영화가 그런 단절을 위해 끝까지 견디다 선택하는 최후의 길이 죽음이다. 나는 이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다. 나약한 아버지는 자살을 시도했지만 영화는 그를 기어이 살아 돌아오게 만들었다. 죄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악행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영화는 너무 쉬운 선택이라고 보는 것 같다. 평온한 죽음을 원했던 아버지는 살아남아서 죗값을 치러야 하고 제대로 된 삶을 원했던 아들은 죽음으로서 죗값을 치르는데, 이때 죄는 끝내 사해질 수 없고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영화가 결국 아버지와 만식에게는 기회를 주고 정작 영화의 분신이라고 할 상훈에게만은 그런 기회를 박탈한 이유를 더 알고 싶다. 상훈이 죽은 뒤, 나머지 인물들이 단란한 가족의 모습으로 재등장할 때, 그저 개죽음 같았던 상훈의 죽음에 의미가 생기는 건 사실이다. 타자를 구원하는 희생적인 죽음인가?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15년 전에 죽었어야 할 아버지의 끈질긴 죄를 자신이 모두 끌어안고 비로소 끊어냄으로써 조카 형인이 그 피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죽음인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쪽의 죽음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이상하게도 상훈의 죽음을 숭고하다고 말하기 망설여진다. 대신 영화가 그의 죽음을 완전한 고립 속에 두고 그의 자리를 그 어디에도 마련하지 않았다는(그가 죽어가며 떠올리는 엄마와 여동생의 행복한 장면에 그의 자리는 없으며, 이후 고깃집 장면에서도 그의 빈자리가 느껴지기보다는 누군가- 아버지 혹은 만식- 에 의해, 아무 일 없던 듯 채워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에 마음이 쓰인다. 다시 말해 그의 죽음은 영화 안에서 누군가를 위한 죽음이기 이전에, 짐승처럼 살았던 인간 상훈만의, 온전히 그 홀로 감내해야 하고 그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죽음처럼 보인다. 처절하고 가혹하며 외로운 죽음이다.

순정(純情)주의자보다 순정(純正)주의자

정한석은 양익준을 “순수주의자, 근본에 대한 혈맹주의자, 더러는 순정주의자”인 것 같다고 말하며 그를 박진표에 비교했다(<씨네21> 제699호). 절반만 동의한다. 나는 양익준이 박진표와는 반대의 지점에서 비로소 순수주의자이고 근본에 대한 혈맹주의자의 모습을 취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면, 순정(純情)주의자보다 순정(純正)주의자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는 여느 감독보다 감정이 영화를 만들고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여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영화가 마음을 울리는 순간은 파토스가 흘러넘칠 때이기보다는 그걸 해체해서 파토스로 부풀려진 저 밑바닥의 본질, 육체, 상처를 냉정하게 분별하고 바로 거기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고 고집할 때다. 양익준이 올해의 무서운 신인이라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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