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똥파리>의 감독이자 주연인 양익준을 여러 차례 만났다. 몇해 전인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술자리에서 그를 처음 봤다. 독립영화인들을 불러 호기있게 술을 샀는데 자꾸 손님이 늘어났다.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온 새 손님 중에 양익준도 있었다. 술자리가 불쾌해지면서 상대방의 영화를 씹는 격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조용히 앉아 열심히 안주를 먹던 양익준이 한마디 했다. “저는 제 영화가 정말 좋거든요.” 그 말을 듣고 그의 영화가 기대됐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때 그는 <바라만 본다>라는 단편영화를 출품해 부산에 왔었다. 장점이 있지만 예술적 야심이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장면과 어색한 장면이 섞인 그의 연출 데뷔작은 몇몇 장면들에서 빛이 난다. 주인공이 백수 친구 집 근처에 간 어느 여름날 잠옷 비슷한 반바지 입은 친구와 길가 평상에 맥주와 안주 따위를 퍼질러놓고 마시며 나누는 농담과 충고가 오가는 대화가 생생했다. 그저 귀여운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양익준은 자기 영화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
자기도취에 빠진 감독이 호감을 줄 리 만무하다. 독립영화계를 잘 모르는 내가 근거없이 이쪽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도 대중의 관심권에서 벗어난 이들의 영화가 소아병적이고 폐쇄적인 자기도취의 영역에 갇힌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다. 그쪽에서는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지만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 영화계에서 자족적 만족감은 독약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자부심도 독약이다. 삶의 고통을 다루든 기쁨을 다루든 아님 둘 다 아우르든 좋은 영화는 충만한 즐거움이 형식에서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익준의 장편 데뷔작 <똥파리>를 보고 양익준은 자기 영화를 좋아할 만하다고 느꼈다. 이 영화는 어떻든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반영한 흔적이 역력한데, 동시에 세상을 향해 자신있게 인사하는 청년의 패기로 가득하다. 이런 건 자기도취와는 영역이 다르다. 보는 사람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음습하고 폐쇄적이며 내성적인 예술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자기 기운을 전달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내지르는 예술이다. <똥파리>를 환대하는 서구 영화제뿐만 아니라 국내 영화제에서도 이런 유형의 독립영화는 그리 자주 본 기억이 없다. 노영석의 <낮술> 정도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
<똥파리>는 용역깡패로 사는 주인공 상훈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다. ‘씨발놈’이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자는 가정폭력의 상처를 안고 사는 정신적 불구자다. 금방이라도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남자인데, 첫 등장하는 장면부터 강렬하다. 길가에서 여자를 때리는 남자를 다짜고짜 두드려 팬 다음, 맞고 있던 여자에게도 침을 뱉고 뺨을 때리며 ‘왜 맞고 사냐?’고 힐난한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욕과 폭력뿐이다. 상훈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 여고생 한연희의 소개방식도 역시 강렬하다. 상훈이 거리를 걸으며 침을 뱉는다는 것이 한연희의 얼굴에 튀자 둘이 시비가 붙는다. 상훈이 한방 갈겼는데 연희는 기절한다. 깨어나보니 상훈이 기다리고 있다. 둘은 다시 욕지거리로 한바탕하고 캔맥주를 사먹은 다음 헤어진다. 이건 네가 좋아 어쩌고 하는 대사가 오가는 어떤 장면보다 둘 사이의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으로 이 영화의 등장인물 묘사방식이 정해졌다. 표면적으로 떠도는 욕설들, 세상을 꼬나보는 인물들의 눈초리, 건들거리는 몸짓이 다 애정결핍의 산물이며 이것들이 인물의 액세서리이고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똥파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싸가지없는 캐릭터를 다루는 이 영화가 실은 너무 마음씨 고운 영화라는 것이다. 너무 대책없이 착해서 그 일면성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 방향으로 설정된 이 착한 지향성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악인들, 곧 상훈과 연희를 불행하게 만든 각자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들 주변에 포진한 용역깡패 조무래기들이나 상훈의 친구이자 깡패 소우두머리인 만식에 이르기까지 고루 적용된다. 이렇게 되니까 상훈의 막말에도 늘 포용해주는 상훈의 배다른 누나의 속없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이게 된다. 관객이 이런 마음이 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곧, 이 영화가 현실의 리얼리티를 생생하게 접수한 것 같지만 실은 양익준의 심성적 필터로 걸러낸 지극히 인공적인 산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정폭력으로 멍든 가정이라는 설정은 상훈의 과거사와 연희의 과거사를 통해 가지런히 대구로 배치된다. 가만히 보면 <똥파리>는 아주 친절하게 대구와 반복을 통해 주인공의 캐릭터와 플롯의 상승곡선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지나가고 결말에 이르면 결정적인 대구를 심어놓고 있는데, 그게 어떤 체하는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폭력과 고통의 순환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에 덜 부자연스럽게 못질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어른 세대와 아이 세대가 합심해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 상훈은 거기 대항하기보다 결국 맞춰 살기로 할 때 비극을 맞는다. 상훈은 영화 내내 자신이 잃어버린 가족을 다른 방식으로 복원하기 위해 애를 쓰며 노골적으로 착해진다. 배다른 누이의 아들, 조카 형인에게 아빠 구실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연희에겐 오빠처럼 군다. 나이 차이가 나는 상훈과 연희가 처음부터 연인 비슷하게 맺어질 때부터 거부감이 들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한눈에 알아보고 오빠, 동생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눈물 짜는 방식을 욕설로 대치했을 뿐
<똥파리>는 내용과 형식 모두 전복적인 영화는 아니다. 그저 눈물을 질질 짜는 방식을 욕설로 대치했을 뿐이며 건들거리는 주인공의 기세에 맞게 카메라가 지켜본다기보다는 상황 복판으로 뛰어들어가는 스타일을 택해 다른 외관을 꾸몄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좋아할 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는 섣불리 위악적으로 굴지 않는다. 섣불리 관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상과 인물의 모호함을 주장하는 예술영화를 많이 봐왔다. 그게 겸손함보다는 권위적으로 보이는 역설을 스스로 감추지 못하는 영화도 많다. 홍상수식 영화의 관찰 태도는 겸손하다. 받아들이는 관객이 많지 않을지라도 그게 또 다른 인간이해의 겸손한 지평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영화에 많은 데이터를 깔아놓는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모호하게 인간을 파고드는 방식도 위험하다.
거꾸로, 직설적인 <똥파리>에서의 표현태도는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불행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폭력과 욕설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다, 다만 그들의 착함을 드러내는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들을 사랑한다, 이들이 변했으면 좋겠다. 후반부에 상훈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똥파리>는 관객에게 조마조마한 심정을 안겨준다. 착하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원래 착했던 <똥파리>의 주인공들은 조금 착하게 살려고 한다. 그때 그들은 다친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다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양익준은 착하게 살자고 한다. 감독이자 주연배우로서 온몸으로 분투한다. 이 정도면 이 시대의 성자 아닌가. 하워드 혹스는 “휼륭한 장면이 세 장면 들어있고 잘못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똥파리>에 대해서라면 “훌륭한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모든 인물에 애정을 품고 만든 영화도 좋은 영화”라고 해야겠다. 애정이 있는 인물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게 관객에게도 감염된다. 할리우드식 스토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애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