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면서 <대성당>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 정복> 등의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한 김연수 선생으로부터 영어와 관련된 칭찬을 듣고 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렇다, 내가 바로 김연수 선생에게 <No Woman No Cry>라는 말은 ‘여자 없으면 울 일 없다 해’가 아니라 ‘그만, 그대여, 울지 말아요’라는 뜻이 아니겠냐며, 슬쩍 영감을 준, 아무런 생각없이 늘 해맑게 웃으며 살고 있는, 그 사람이다. 나는 늘 번역하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개의 다른 언어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자신의 색을 지워가면서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어지간히 성실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서너번 환생해도 꿈꾸기 어려운 경지다. 예전에 번역가 윤희기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돌아오고 나서 “번역은 반역(半譯)”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머리에 남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반밖에 전달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오류를 줄이기 위해 사전을 끌어안고 책을 들여다보는 번역가의 모습은 숭고하다.
한때 나도 번역을 꿈꿔본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다. 김연수 선생의 번역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나도 번역을 해보고 싶었다. 나의 끈질긴 간청을 못 이긴 김연수 선생은 영어책 한장을 주며 번역을 해오라고 했다. 나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영어 문장을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좀 어렵더니 한 문장 한 문장,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석이 이어졌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이해했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비밀통로를 발견했고, 어떤 희열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됐다. 다음날 나의 번역을 읽은 김연수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장은 참으로 훌륭하나 원문의 뜻과 너무나 다르도다.”
그때 나는 번역가의 꿈을 접고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 영어책을 읽을 때가 있는데, 한 문장을 읽으면 다음 문장을 미리 추측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내 생각대로 영어를 해석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읽힌다.
김연수 선생이 추천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원제는 Vicky Cristina Barcelona) 역시 나처럼 자기 생각으로 충만한, 아무 생각없이 늘 해맑게 웃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 제목 번역 작업에 동참했던 모양이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와 바르셀로나라는 세개의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비밀통로를 발견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해맑은 제목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한 발짝 더 나아가 ‘네 남자의 아내도 좋아’ 정도의 일부다처제스러운 세계를 구현하려는 제목이나 ‘내 남자의 아내의 남자도 좋아’와 같은 미스터리한 관계를 드러내는 제목이라면 더 좋지 않았겠나 싶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냥 해보는 소리다.
너무 약해서, 너무 외로워서, 너무 힘들어서
글로벌한 평소의 성품답게 바르셀로나가 주인공이라는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추천해준 김연수 선생의 호의에 답하기 위해 나도 파리가 주인공인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똥파리>다(안 웃을 줄 알았다).
<똥파리>를 보고 처음엔 좀 불편했다. 욕 때문이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들이 욕을 내뱉고 또 내뱉고 급기야 길에다 욕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극장을 나갈까도 잠깐 생각했다. 나는 욕을 견디는 게 힘들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친구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나는 어지간해선 욕을 하지 않았다. 치고받고 싸울 때도 아주 단순한 형태의 욕만 했던 것 같다. 요즘에도, 술을 먹고 혼자 걸어갈 때 땅바닥을 쳐다보며 ‘아이, 참, 씨발, 인생이 이따위예요, 정말, 내가, 기가 막혀서, 빌어먹을…’과 같이 귀엽기 그지없는 욕을 가끔 내뱉는 것 말고는 욕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는 욕을 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욕을 하지 않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씨부럴 것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진짜로 좆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래도 욕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똥파리>의 주인공들이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좀 슬펐다. 그들이 욕을 하는 이유는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분노로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욕을 해서 내가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공격적인 욕이 아니라 방어적인 욕이다. 너무 약해서, 너무 외로워서, 너무 힘들어서 욕을 하는 것이다. 욕으로 자신의 몸에다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세상에는 존댓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칼로 찌르는 사람도 있고 오만 가지 욕을 하면서 속으로 우는 사람도 있다.
영화를 계속 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 욕이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서 욕이 묵음처리되고 대사만 들렸다. 욕이 들리지 않자 영화가 좀 심심하게 느껴졌다. 욕이 없었다면 <똥파리>라는 영화가 어떻게 됐을까. <똥파리>가 흥행에 대성공하게 되면 클린버전의 <똥파리>도 한번 만들어주면 좋겠다.
욕이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욕도 문화의 일부분이고 표현의 방법이니까. 문제는 쓰는 방법이다. 학교에서 욕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줄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은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그렇다.
외화 속 욕, 반이라도 번역해다오
외국영화를 보다보면 그 다양한 욕의 세계에 놀랄 때가 많다. 그들의 욕도 참 궁금한데 역시 외국어인지라 번역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반이라도 번역해주면 좋을 텐데 영화 자막에서는 생략될 때가 많다. 외화 번역가가 국내 정서에 맞게 자체 생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많고 다양한 욕을 담기에는 화면이 좁은 것인지, 아쉽기 그지없다. 조금 심한 표현이다 싶은 것들을 너무나 부드럽게 의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난주 우리의 <개그콘서트> 황현희 PD께서는 이런 고발을 감행하게 되었다. “자막에 대한 소비자 고발이 이어졌는데요. 영화에는 ‘고 투 헬, 왓더 헬, 셧업’ 한참 떠듭니다. 그러나 자막은 무조건 ‘꺼져’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정확한 지적입니다. 황 PD님. 이로써 번역가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 칼럼에는 ‘평소에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라는 말을 해서 주위의 영화 칼럼니스트를 안심시키고는 <씨네21>에 격주로 영화칼럼을 쓰는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영화배우로까지 영역을 확장해서 주위의 눈총을 사고 있는 소설가 김연수씨에 대해서 집중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