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베일의 벽은 견고하다. 그는 영화마다 역할의 문을 굳게 걸어잠근 듯 온전히 영화 속에 존재했다. 28kg이나 감량한 뒤 출연한 <머시니스트>의 기계공이나 마술의 힘으로 인생의 함정에 빠지는 <프레스티지>의 마술사, 베르너 헤어초크의 지독한 영화 <레스큐 던>의 포로까지. 그의 인물들은 항상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음영이 매우 뚜렷해 틈이 보이지 않았고 그 안의 베일은 탄탄하고 완벽한 마스크 같았다. 밥 딜런을 7명의 인물로 표현한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케이트 블란쳇, 히스 레저, 벤 위쇼 등 대부분의 배우들은 뭉그러질 듯 환영처럼 나타났지만 크리스천 베일은 이 그림에 점을 박듯 밥 딜런을 새겼다. 그가 연기한 60대의 정치가와 80대의 전도사는 밥 딜런에 대한 도덕적 양면과 같았다. 영화는 크리스천 베일을 만나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역할에 봉한다. 그러면서 존재한다. 그에게 자주 붙는 형상제조기란 수식도 이에 대한 다른 표현일 거다. 이른바 대다수의 연기파 배우들이 자신의 기운을 역할 밖으로 뿜어내며 멋을 갖춘다면 베일은 그 기운을 역할 안에서 모두 소진해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이 된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영화를 봐도 완성되어 있다.
<3:10 투 유마>를 함께 찍었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보통의 배우들은 도약의 계기가 되는 작품이 있게 마련인데 크리스천은 그저 모든 영화가 완벽하다”고 말했다. 베일의 인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극도의 긴장 속에서 굴러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복수, 광기, 책임, 욕망 등. 베일은 감정의 어떤 극대치들을 정복이라도 하듯 샅샅이 탐닉한다. 실제 크리스천 베일은 촬영장에서 종종 ‘극도로 미친 디바’ 행세를 한다고 한다.
크리스천 베일이 <배트맨 비긴즈>를 찍는다는 건 꽤나 놀랄 뉴스였다. <배트맨>은 웨일스 출신인 베일이 맡기엔 너무 미국적인 시리즈물이었고, 작은 인디펜던트 영화들로 주로 채워진 베일의 필모그래피도 할리우드의 빅 프랜차이즈를 맡기엔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베일이 이미 브루스 웨인을 완벽하게 재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겐 연기 변신이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캐릭터를 가장 설득력있게 버무려내는 배우 중 하나고 존 코너는 베일이 충분히 흥미를 느낄 어둠을 갖고 있다. 실제로 베일은 맥지 감독이 들고 온 “뻣뻣하고 무미건조한”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터미네이터>의 부활, 영화의 뒷이야기엔 흥미가 많”았다. 결국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이자 작가인 조나 놀란을 끌어들여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에 탑승했다.
크리스천 베일은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에서 지구를 지키는 용사가 됐다. 그는 존 코너가 되어 기계들과 맞서고 저항군을 이끈다. 지금까지 베일의 인물들을 생각해보면 다소 무미건조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미친 듯이 연기했다. “반은 베일, 반은 코너가 되었”고, 본인의 변명이긴 하지만 그 여파로 촬영감독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F**K가 40차례 포함된 4분여의 욕설 세례에 대해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돌아이 같았던 걸 안다. 너무 민감했고 몰입해있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베일은 이 사건에 대해 두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사생활에 대한 그의 고집스러운 침묵을 반영하듯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으로 두 어깨에 할리우드 빅 프랜차이즈를 두개나 짊어진 배우가 됐다. 짙고 강한 역할들로 작품 목록을 촘촘히 채웠던 지난날과는 또 다른 입지다. 베일이 그동안 쌓아온 벽의 성과일까. 크리스천 베일은 오로지 연기로만 존재를 새기는 가장 완전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