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친구 그의영화]
[나의 친구 그의 영화] 그 자리에 샐비어가 있었다면…
2009-06-11
글 : 김중혁 (작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다 <김씨표류기>의 밤섬과 부엉이바위가 오버랩되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말았다. 지난 칼럼을 읽고 관심있는 소설가들에게서 연락이 온 까닭이다. 소설가 두명과 함께 극장을 찾았는데, 거기서 또 두분의 유명한 소설가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이거 뭐 소설가 단체 관람도 아니고…. 아무튼 열다섯명 남짓 들어찬 극장에 소설가가 다섯명이나 되는, 게다가 스크린에서는 김연수 소설가가 연기를 하는,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나는 지퍼가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후드짚업을 입고 갔는데 민망한 장면이 발생할 경우 뒤집어쓰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쓸 일은 없었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심하게 표류하여 영화 <김씨표류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도 좋겠다 싶은 파티장면을 빼고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특히 술 먹다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훌륭하기까지 했다. 역시 연기란 생활에서, 체험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인가 보다. 이제야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술 먹은 보람이 있다.

소설가 김연수씨의 사생활이 (혹시라도) 궁금한 팬들을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김연수씨가 술 먹다 혼자 들어가서 자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일에 적극적인 평소의 성품답게 술자리에서도 꽤 적극적이어서 술 먹다 그 자리에 엎어져 자는 일은 자주 있지만 (탁자도 비좁은데 제발 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자면 안되겠니?) 먼저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친구야 파티장면 빼면 봐줄 만했어

둘이서 참 오랜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상황에서 술을 마셨는데, 내가 참 미안하다(뭐 그렇게 따지면 나도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김연수씨가 고생이 많았다. 길거리에서 밤 12시에 경찰을 붙들고 미셸 푸코에 대한 강의를 하는가 하면, 술 취해 넘어지면서 클럽의 드럼 세트를 망가뜨리는 등 온갖 나쁜 술버릇을 다양하게 선보였던 나를 참으로 잘 보살펴주었다. 고맙게 생각한다(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요즘 술자리에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도 언제부턴가 어른이 되어서 (하하, 진짜라니까요) 술버릇이 참해졌고, 요즘은 적당히 마시고 조용히 집에 가서 잔다.

술에 만취했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내 술버릇 나도 모르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아주 오래 오래 오래전 (체감상으로는 전생에 가까운) 일이다. 신촌에서 술을 마셨고 어쩐 일인지 나 혼자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 이전의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 경과) 눈을 떠보니 내가 버스에 타고 있다. 버스는 제대로 탄 것일까. 아무튼 일산 방향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발이 허전하다. 신발이 없다. 눈앞에 어떤 장면이 빠르게 떠오른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버스 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 내 기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다시 시간 경과) 눈을 떠보니 창밖의 풍경이 낯설다. 일산은 일산인 모양인데 어딘지 모르겠다. 나는 맨발로 버스운전사에게 가서 (다행히 승객은 몇명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본다. 어디라고 얘기해준다. 어딘지 모르겠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주위에 가로등 몇개가 전부였다. 세상에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정도로 주위가 어두웠지만 그때는 그런 동네가 일산에 있었다. 나는 버스가 온 길을 되짚어갔다.

밤은 깊었고, 별은 밝았고, 달은 찼고, 목은 말랐고, 신발은 없었다. 신발이 없다는 게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논둑길도 걸었고 아스팔트길도 걸었다. 걷다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그때 보았던 별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달빛도 밤의 차가운 공기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외롭다는 기분이었다. 한 1시간을 그렇게 걸었던 것 같다. 그게 나의 ‘표류’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정재영씨 왜 이렇게 웃깁니까, 눈물나게

<김씨표류기>를 보면서 그때의 기분을 다시 생각했다.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나 또한 얼마나 조용한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생각했다. 올해 본 한국영화 중 <김씨표류기>만한 게 없었다. 보는 내내 키득거렸고 유쾌했고 쓸쓸했다. 눈물도 흘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많다. 아, 정재영씨, 왜 이렇게 웃기는 겁니까.

<김씨표류기>에 명장면이 많지만 샐비어(사루비아) 장면이 제일 좋다.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섬에 표류하게 된 김씨는 제대로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달려고 한다. 강물을 과음한 다음이라 속이 부글거리는 김씨, 똥 먼저 누고 자살을 뒤로 미룬다. 그런데 똥 싸는 그의 앞에 샐비어가 활짝 피어 있다. 꽃 하나 따서 꿀을 빨아먹는데, 눈물이 난다. 울고 있는 김씨와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한 그의 엉덩이와 엉덩이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샐비어를 천천히 보여주는 장면은 <김씨표류기>의 압권이다. 자살은 해야겠고 그런데 똥은 마렵고 샐비어를 빨아먹어 보니 이건 또 왜 이렇게 달착지근한 것이며 일어나려니 다리는 저린데 똥 무더기는 엉덩이와 너무 가까우니 눈물이 날 법도 하다. 사는 게, 참, 그렇다. 가끔은 샐비어와 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희망이란 게, 참, 그렇다. 희망은 거대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절망의 크기가 다른 사람이 보기엔 터무니없이 작아 보일 수 있고, 한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희망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을 수 있다.

지난 토요일 아침, 그가 운명을 달리했다.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부엉이바위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눈물이 날 뻔했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죽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먼저 와닿았다. 그 위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아득했을까. 얼마나 무거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세상이 무거워야 그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결심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주위에 샐비어 같은 게 없었을까. 샐비어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뛰어내리려는 그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그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갔는데, 사람들이 샐비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면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었을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샐비어로도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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