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웅과 그들 계급의 사슬
한국 감독 중 국가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 같은 감독은 수두룩하지만 그 불신을 기어코 영화에 노골적으로 기입해넣는 것의 기술적 수준으로는 봉준호가 독보적이다. 이때 그는 자기의 인물로 쉽게 예상하기 힘든 소영웅을 택한다. 그런 방식은 다른 영화에서도 흔하다. 그것만으로 봉준호 영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순 없다. 다만 그 소영웅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특징이다. 말한 대로 어떤 소영웅을 택하는데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의 계급이 문제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 불화를 봉준호는 은밀하게 영화에 담는다. 예컨대 사태를 수습하고 싶어 하는 그 인물들의 마음은 높기만 한데 그들의 하부구조(물적 토대)는 미약하다. 자신들의 하부구조가 엄청난 사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늘 불속에 뛰어들고 나서야 알게 된다.
신출귀몰하는 범인을 잡아내기에는(<살인의 추억>), 한강에 나타난 괴물을 한방에 때려잡기에는 혹은 만연한 바이러스를 막기에는 혹은 죽은 딸을 되살리기에는(<괴물>) 다소간 역부족이다. 그들에게 충분한 돈이 있다면 물적 자산이 있다면 해결은 좀더 쉬울 것이겠지만 그때 봉준호의 영화는 성립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없고 <괴물>처럼 해결이 된다 해도 딸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너무 큰 희생이 따른다(<괴물>). 아니 실은 그들이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봉준호의 영화는 대중의 기대를 얼마간 안고 끝나야 하므로 겉으로는 해결로 보이는 결말이 문득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적 구조가 그들을 ‘헛수고’시키고 있다는 걸 몸소 드러내려고 한다.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보아야 할 것 같다. <마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들 애처로운 헛발질이며 헛수고다. 그러니 그들이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잘 해결되지 않고 해결된다 하더라도 텍스트 외부에서 오는 타협의 의사(흥행성을 담보한)이거나 텍스트 안에서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있다. <마더>의 두 번째 인정투쟁의 주인공 문아정을 말하기 위해서다. 봉준호의 플래시백을 따라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보자. 동시에 이 영화의 크레딧 시퀀스에서 엄마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지만 음악은 우리만 듣는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들려오는 음악 때문에 엄마의 몸동작을 춤이라 보고 있는 것인지, 엄마의 몸동작을 춤이라고 이미 인식했기 때문에 마치 우리에게만 들리는 이 음악과 더없이 그녀도 어울리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 보게 된 것인지 가늠하면서 보자. 말하자면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를 제안해본다. <마더>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독법제시라면 일종의 그런 면모에서다.
고물상 늙은이의 진술을 따라 우리는 플래시백으로 그날 밤 폐가에 다시 도착한다. 늙은이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그 폐가에 간다고 하면서 그날 밤도 역시 그랬다고 한다. 그랬다가 끔찍한 사건을 본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마치 원치도 않았는데 무서운 사건을 목격하고 만 또 다른 피해자처럼 말한다. 그의 말을 우리는 플래시백 화면이 보여주는 그의 행동과 겹쳐서 비교하며 보아야 한다. 늙은이는 그때 폐가 안에 돗자리를 펴고 있다. 그는 집을 놓아두고 이곳에서 자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의 옆에 웬 검은 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쌀이 들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폐가쪽으로 쌀떡소녀라 불리는 그 불쌍한 소녀가 오고 있다. 늙은이와 소녀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다. 그는 문아정의 휴대폰에도 있지 않았던가. 문아정의 휴대폰에 있는 사람은 그 아이의 몸을 샀던 자들이다. 늙은이는 그날 밤 문아정과 섹스를 준비하느라 돗자리를 펴고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거짓말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문아정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었는지 늙은이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이해된다. 문아정은 지금 몸을 팔고 쌀을 얻으러 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 뒤에 도준이라는 녀석이 따라붙어 말도 안되는 농지거리를 한다. 영화에서 우리는 문아정에 대한 많은 묘사를 듣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녀가 바보 도준에게 꼭 바보새끼라고 말할 만큼 독한 아이가 아닐지 모른다고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런데 왜 문아정은 도준에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을까. 몸을 팔러 가는 아이에게 바보 녀석이 “오빠랑 함 할래? 술 한잔?”이라고 말하자 문아정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준에게 돌을 던졌고 욕을 했다. 그 돌이 도로 날아와 문아정을 죽였다. 그 뒤로 문아정이 분노로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무기였던 핸드폰은 엄마가 다시 찾아내기까지 술독에 묻혀 있게 된다.
슬픈 일이다. 서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러움과 분노가 어처구니없이 격돌하는 밤이었다. 그 밤의 정체는 서럽고 더럽고 천하고 무지몽매한 인정투쟁이 실패한 밤이었다. 봉준호의 영화에 만약 어떤 정치적 아우라가 늘 휘감겨 있다고 느껴진다면 이날 죽어가거나 죽인 두 인물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이런 빗나간 인정투쟁의 서러움이 배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미리 말했지만 그 인정투쟁이 서러운 이유는 소영웅인데도 불구하고 하부구조의 미약함으로 인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화살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더>의 인정투쟁의 슬픈 사슬을 보아야만 한다.
사건은 종결될 뿐, 해결되지 않는다
도준의 인정투쟁은 곳곳에서 이미 드러나 있었다. 경찰서에서 그에게 읽을 줄은 아냐고 묻는 형사에게 벌컥 화를 내며 도준은 “나 읽어요!”라고 대든다. 면회실에서 엄마와 얘기를 하는 중에도 “이런 바보야”라고 말한 엄마의 말에 “바보라니! 아들한테!”라며 계속 말하던 주제는 아예 잊고 말머리를 돌린다. 도준은 사실 바보여서 무시당하는 인물이기 전에, 무시당하기 위해 바보로 설정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거짓을 꾸며낼 수 있는지는 봉준호의 몫인 것 같다. 그게 의아하기는 하지만 내가 추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그 대신 도준의 인정투쟁에 이어 엄마의 인정투쟁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오류에 잔뜩 빠져버린 그 엄마의 인정투쟁. ‘내 아들은 범인이 아니야’, ‘내 아들은 그러지 않았어’라는 믿음을 안고 있는 그 엄마는 문아정의 장례식장에서 상상 못할 반격을 가한다. 문아정의 유족을 방문한 엄마는 “세상 사람들 다 헷갈려도 여러분들은 (내 아들이 그러지 않았다는 걸) 헷갈리면 안돼. 우리 아들이 안 그랬어”라고 도리어 큰소리를 친다. 그 말은 진심인 것 같다. 엄마는 아들이 그러지 않았다고 믿고(오인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믿음으로써, 결백한 아들의 엄마로서, 아들의 사회적 인정투쟁과 함께 본인의 인정투쟁을 동시에 성실하게 수행하는 중이다. 단지 고함만 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들이 인정하지 않자 스스로 탐문자가 되어 인정받을 증거들을 수집하러 나서지 않았는가. 그러다 결국 아들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엄마의 행동은 마찬가지다. 내 아들이 범인입니다, 투옥하세요, 라고 이 엄마는 하지 않는다. 이제 상황은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한 것 같고 이미 인정했던 것이 거짓이라도 계속 인정받는 쪽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고물상 늙은이를 죽이고 망각의 허벅지침을 꽂는 것은 그런 엄마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행동일 것이다.
아들의 인정투쟁이 사건을 불러오고 엄마의 인정투쟁이 끔찍한 방식으로 사건을 종결시킨다. 해결이 아니라 종결이다. <괴물>에서 현서가 납치당하고 현서가 살아 있음을 알고 있는 건 아버지 강두와 그의 가족들뿐이다. 나머지는 강두가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미쳤다고 생각한다. 인정해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가 자위권을 발동한다. <마더>에서는 그 과정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사태의 끝점은 다르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든 끝나는 종결이 아니라 그 과정인 것 같다. 그 과정을 이행하는 사이에 실재의 부스러기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때문이다.
엄마의 히스테리, 사회의 히스테리
봉준호는 인터뷰에서 문득 엄마의 “히스테리”를 말했다. 나는 그것이 단지 엄마의 히스테리라고 보지 않는다. 사회의 히스테리를 봉준호가 옮겨내고 있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는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그 병적 히스테리를 영화가 그대로 의도적인 차원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때 사회적 히스테리를 영화로 각인해내는 봉준호의 기획을 말하기 위해 두 가지 점을 묻고 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도준은 왜 문아정의 시체를 옥상에 걸쳐놓은 것일까, 라는 점과 우리는 종팔이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진태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젤루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옥상(위로 손짓하며)! 시체를 옥상에다 올려놨잖아. 죽은 애… 보통 죽이면 파묻잖아. 근데 이건 위로. 시체를 전시한 것도 아니고 말야…. 봐라, 동네 사람들! 이 씨발년 이거 내가 죽여버렸다! 시체 잘 보이냐? 뭐 그런 거….” 그러면서 앞으로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한다. 엄마가 묻지 않았는데 진태가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영화의 종결부 엄마와 도준이 밥상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도준이 말한다. “엄마 내가 생각 좀 해봤거든? 종팔이 걔 있잖아. 왜 옥상 위에다 올려놨을까? 시체를… 내 생각엔… 잘 보이라고 그런 거 아닐까? 얘 지금 피 질질 흘리고 있으니까 빨리 병원 데려가라고. 그래서 사람들 젤 잘 보이는 데에 올려놓은 거지… 그치? 그런 거지!” 엄마가 묻지 않았는데 도준 혼자 묻고 답했으며 엄마는 침묵한다. 묻지도 않은 걸 제 입으로 말하는 걸 보면 도준은 뭔가 엄마에게 자기의 행위를 정당하게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진태와 도준의 진술을 들으며 따라 묻고 싶어졌다. 우리는 진태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도준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진태의 말을 믿자면 도준은 끔찍한 괴물이고 도준의 말을 믿자면 어쩌다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다시 진태의 말을 믿으면 도준이 한 말 자체가 너무 끔찍하고 사악한 거짓말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도 시원하지 않고 저것도 시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쪽인가. 대답은 오지 않고 짜증이 밀려온다. 그렇다. 짜증. 히스테리는 곧잘 짜증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때 봉준호가 말한 엄마의 히스테리가 본격적으로 이 영화를 지배하는 해결되지 않은 범죄로서의 사회적 히스테리로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냥 스쳐간 것 같았던 다음의 대화가 명백하게 그 점에 관해 말해준다. 도준: 나 무시하는 놈들… 족치라며! 엄마: 그래… 무시하면? 도준: 작살낸다! 엄마: 한대 치면? 도준: 두대 깐다! 도준과 엄마는 척척 상대방의 말을 이어가며 이렇게 면회실에서 대화한다. 장단을 보면 한두번 오간 대화가 아니다. 그러니 도준의 살인은 되돌아볼 때 엄마가 이식해준 가르침대로 행한 것이다. 엄마가 가르친 잘못된 인정투쟁의 욕망이 문아정을 죽인 것이다. 엄마는 왜 그런 가르침을 주었을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엄마는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것 같고 재산이 없음이 분명하며 기댈 곳이 없다. 게다가 아들은 온전치 않다. 그런 아들에게 자신들의 물적 토대에 대한 결핍을 견딜 만한 인정투쟁의 강화(그것이 올바르건 그렇지 않건 간에)를 불어넣는다는 것이 늘 어떤 히스테리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도준의 엄마가 문아정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고물상 늙은이도, 그리고 또 문제의 종팔이도 상징적으로는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종팔이의 등장. 그 점을 따라 질문이 붙는다. 그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연쇄되며 옮겨가는 모순
종팔이가 모습을 비추기 전에 영화는 한 가지 곡예를 부린다. 여러분께서 보신 종팔이의 모습(다운증후군 장애인)을 지금 잠깐 머릿속에서 지워보자. 그리고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당신이 기도원 종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만 생각해보자. 개인적으로 ‘종팔이’라는 어감을 접하자마자 나는 그가 영화 속 진태와 같은 부류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다. 진태는 누굴 죽이지는 않았어도 불량해 보이고 종팔이가 그런 껄렁한 인물일 거라고 여길 즈음 실제의 종팔이가 등장한 것이다. 봉준호가 그 말의 어감과 이미지 사이에 놓인 차이의 효과를 전략적으로 구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충격은 예상대로 더 깊어졌겠지만 그걸 기만의 곡예라고 부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곡예 부리기와 상관없이 도준보다 못한 종팔이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장면이 너무 뻔해 보여서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여기게 되었다. 그래, 봉준호는 도준보다 더 못한 인물을 등장시켜 이것이야말로 슬픈 일이 아니냐며 감정을 쥐어짜는 것 아닌가, 더 나쁜 것을 등장시켜 조금 덜 나쁜 것으로부터 충격을 주려는 심사인가, 라고 누구나 반박이 가능할 만큼 이 장면은 사실 좀 뻔해 보인다. 그런데 왜 이 영화는 이렇게 뻔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려 했던 걸까. 그 부분에 대한 어떤 이해가 사실은 <마더>를 보는 데 핵심은 아닐까 싶다. 약자보다 더 약자가 누명을 쓰는 구조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계가 바로 이 영화의 세계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 영화를 본 우리도 이 안에 있는 세계의 인식 구조를 이미 보고 알았으므로 지레 이것이 뻔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종팔이가 영화적 억지에 희생되기 위해, 난데없이 지금 도준을 살려내려고, 얄팍하더라도 더 큰 충격만을 위해서, 여기 끌려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가 도준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희생물 종팔이를 억지로 등장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적 주장이 제기된다면 그 생각은 윤리적으로 올바르겠으나 이미 벌어진 이 영화의 세계적 사태에 대해서는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뿌리까지 미쳐버린 이 영화 속 사태를 바로 보라는 봉준호의 제안을 외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윤리적 올바름이라는 자신만의 근사한 덕목을 사리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가 지금 뻔함의 누명을 감수하면서도 이렇게 사태의 몸뚱이를 처참하게 몸소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종팔이의 등장은 억지로 온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보여준 세계와 인식의 구조 즉 연쇄되며 옮겨가는 오인의 그 모순을 따라 ‘올 것이 온 것’이다. 도준이 옥상 위에 문아정의 시체를 놓은 것이 그만의 최악의 인정투쟁이었는지 그녀를 살려주라는 신호였는지 아직 판가름도 나지 않은 상황에서, 게다가 그가 뉘우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준의 선함과 사악함 둘 중 어느 쪽도 믿기 어려운 판단의 히스테리에 우린 빠져 있었다. 그 사이에 어느새 터진 새로운 사건번호 2번(종팔이의 누명)이 시작된다. 이 철두철미한 미결 속에서 전진하는 오착의 연쇄고리들만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도준인가, 종팔인가, 혹은 왜 문아정의 죽음이며, 왜 종팔이의 누명인가, 하는 점이 아니라 ‘종팔이가 도준이 끌려온 방식 그대로 끌려왔다’는 점이 중요하고 또 중요해 보인다. 같은 인식의 힘으로 씌어지고 채워진 사건 보고서와 수갑. “제일 만만한 게 도준”(엄마)이었던 것처럼 혹은 “도준이 이름 쓰여 있는 골프공 하나 나왔다고”(진태) 종팔을 잡아간 것과 같은 이치다. 문아정과 그의 친구가 사진관에 왔을 때 문아정은 코피를 흘린다. 그건 피로한 삶이 흘리는 슬픔이다. 그 슬픔을 안을 수 있었던 건 영화에 따르면 혹은 종팔이의 주장에 따르면 그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 살인자라는 누명을 썼고 여기 끌려왔다. 경찰은 문아정의 “코피”와 문아정의“혈흔”을 오인하여 종팔이를 데려온 것이다. 종팔이의 옷에 묻은 건 코피이지만 경찰은 그걸 혈흔으로 보았다. 도준을 끌어간 방식 그대로다. 그들은 도준의 행위를 입증하지 못했는데 단지 공에 쓰인 도준이라는 기호만 믿고 그를 데려갔던 걸 반복한다. 물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진실이었다고는 하나 문제는 그 과정에 있었다. 경찰은 “땅을 파도 돈이 안 나오는”(엄마) 집의 아들 도준을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종팔이인 것이다.
종팔이에게 사태의 여파가 미칠 때 소름 끼칠 만큼 남아 있는 힘의 잔재가 아직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이 자리를 휘어잡고 있음이 감지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종팔의 등장이 뻔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이때 이 영화의 마지막 남은 인정투쟁 즉 종팔이의 인정투쟁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약 기도원 종팔이의 인정투쟁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고 할 때 무엇이 다음 차례인가. 종팔이에게는 구해줄 엄마도 없다. 종팔이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종팔이를 구원할 수 없도록 만드는 영화 속 이 세계의 구조,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무서움이다.
날카롭고 냉혹한 자학 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의 사실뿐이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최악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사상 최악이라는 해결이다. 봉준호가 창조하는 대한민국 소영웅들의 인정투쟁의 길은 험난하고 불운하고 절박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의 광기의 모순은 그것보다 더 강력해서 인정투쟁을 하는 어떤 자에게도 상처를 품지 않고 쉽게 해결책을 갖도록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봉준호의 영화가 가리키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심오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혹은 시원한 해결이 아니라 이런 상태에의 강력한 주의환기, 스스로 발광하여 문제의 세계를 홀딱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 속 인정투쟁은 의문스러운 사건과 완전치 못한 해결을 왕복한다. 영화 스스로가 해결점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부족한 답이라도 억지로 내놓으려는 대신, 어느 순간 히스테리적으로 발가벗고 나섬으로써 그 상태를 몸소 자폭하여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봉준호 영화의 용감무쌍함이다. 그 어떤 윤리적 정언명령조차도 이 안에서는 발휘되지 않고 있으며 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용감무쌍함 말이다. 그럴 때 인물들은 그 불능의 절벽에서 외마디 말처럼 하고 만다. “너… 부모님은 계시니? 엄마 없어?” 엄마가 종팔이에게 물었다. “너 밥은 먹고 다니냐?” 박두만이 물었던 것의 메아리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사회 안으로 허망하다는 듯 물음을 그냥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봉준호의 영화를 볼 때 그 수많은 재치 속에서도 결국에는 한순간 등골이 오싹하게 느껴질 만큼 덮쳐오는 싸늘함의 정체가 위와 같은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건 비정함이 아니라 싸늘함이다. 나는 봉준호의 싸늘함이 서글프다 느껴지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정하다는 것에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사태를 어떤 식으로건 안으려는 의지의 결기가 있지만 싸늘함에는 넘어진 자가 그 추한 자태를 그대로 전시하여 포기하면서 저항하는 자학적 냉혹함이 있다. 그때 그 꼴은 흉하지만 날카롭다.
동일하게 장르영화의 수단을 경유하는 데 박찬욱은 윤리를 버리지 않은 채 안고 가려 한다. 그때 형식과 내용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박찬욱은 그 태도를 견지하는 견고한 윤리주의자다. 그에 반해 봉준호는 윤리의 중요성에 관해 묻지 않고 마침내 영화의 인물들이 처한 전면적 상황에서 윤리의 역량을 의심하며 그게 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게 그 둘의 큰 차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뜨겁든 차갑든 감정을 요구할 때 봉준호의 영화는 그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싸늘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그 싸늘함은 포기한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지탄받을 수 있으며 혹은 그러해야 하겠지만, 온기있지만 서투른 해결보다 모든 걸 다 드러내서 이미 모든 인식의 구조가 미쳐 있다는 것을 싸늘하게 말하는 것이 봉준호의 방식이고 나는 그걸 인정하려고 한다. 아니 그것이 아직 봉준호의 전면적인 방식이라 말할 순 없다 해도 <마더>의 분명한 방식이다. 그러니 필름누아르의 구조에서 살던 곤경에 빠진 주체가 이 미쳐버린 세계로 들어와 자학적 쇼를 벌이는 이유는 너무 명백한 셈이다. 그의 곤경이란 세계의 광기가 결정지어준 문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엄마의 모성이야말로 미친 것이다, 라고 말하기 전에 모든 미친 것들 중 하나가 엄마의 모성일 뿐이다, 라고 말해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그 광기는 그런데 어디서 왔던가. 또다시 생기는 그 또는 그녀의 물적 토대의 불안, 그것이 낳은 괴이한 인정투쟁의 사슬들 그리고 생겨난 숭고한 괴물로서의 엄마의 모성애. 어쨌거나 그걸 만들어낸 실체는 히스테리라는 병에 걸린 세계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도무지 나는 그런 봉준호의 영화적 방식을 버리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런 세계에서의 인정투쟁이란 크고 작음 혹은 성공과 실패의 여부에 상관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전 우리의 현실 속에 뚜렷하게 남은 상징적 인정투쟁의 행위를 알고 있지 않던가.
바보 종팔이는 누가 구원할 것인가
엄마 혜자가 아련하게 노을이 지는 석양을 받으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뽕짝 메들리에 몸을 맡기고 엉망진창의 몸동작으로 망각을 부르는 춤을 추고 있을 때 도리어 질문은 서글픔을 안고 찾아온다. 질문에 대한 답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과 무관하게 바로 그 질문의 어쩔 수 없는 귀환 자체가 더 중요할 것이다. 모든 걸 잊을 수 있을까, 라는 바로 그 질문이다. 기껏해야 영화 글쟁이인 내가 2009년 5월23일 아침에 그의 죽음으로 멍해 있던 순간에 <마더>에 관해 쓰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그 질문 때문이었을까. 절벽 위에 선 그의 절박한 인정투쟁 때문이었을까. 종팔이를 보았을 때 왜 나는 노무현이 생각났을까. 바보 노무현. 아니 솔직히 순서는 반대이다. 그날 아침 그의 죽음을 접했을 때 종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보 종팔이. 누가 종팔이를 구원해줄 것인가.
우리의 현실 속 그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에 관해서는 내가 더 말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행위와 결부된 것 같은 <마더>의 몇 가지 영화적 사실은 알고 있다. 영화 속 종팔이의 인정투쟁은 불능상태다. 그래서 마침내 종팔이를 거기 끌고 온 영화 속 어떤 힘의 강도에 더할 수 없이 당혹을 금치 못하고 놀라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아니라 다시 반복된 그 과정의 광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영화 속 종팔이는 죄가 없지만 상징적 죽음인 철창으로 갈 것이다. 그는 미친 엄마도 없고 아무도 없다. 종팔이가 불쌍하다, 그런데 이미 그를 구할 수 없는 세계다. 종팔이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인정하기 싫은 이 사실, 이 결과를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이 영화는 그래도 그게 네 옆에 있는 모순이라고 무섭게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희생은 다시 또 돌아올지 모른다는 공포로 무참히 흔든다. 잊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의 인정투쟁. 우리는, 정말, 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