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그렇게 그녀는 이방인을 ‘체화’했다
2009-07-31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인종과 성, 젠더의 충돌을 통해 <반두비>가 보여주는 것

여름, 블록버스터의 계절이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 그리고 한국영화 <차우> 등이 극장에 걸렸다. CG가 보여주는 조정, 교정, 수정, 변경 가능한 재앙의 세계. 파국을 막아내는 영웅들, 블록버스터의 파국과 재앙은 더 많은 자본과 기술의 구성, 축적을 위한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구성과 축적은 블록버스터급 파국과 재앙을 필요로 한다. 4대강 삽질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블록버스터와는 달리 컴퓨터그래픽 기술이나 자본의 마술적 원조를 받지 못하는 주변인, 비정규직, 소수자의 삶은 점점 더 벼랑으로 몰린다. <반두비>는 이 조건 안에서 우정과 관용 그리고 환대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영화 제목 반두비가 방글라어로 우정을 뜻하니 우정의 문제는 자명하게 드러나는 편이고, 관용(불관용), 환대의 문제는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인종과 성, 젠더가 부딪히다

이 영화의 짜임새는 두 재현 방식들이 맞물려 이루어진다. 한축은 좋아지지 않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다소 관행적 재현이다. 이주 노동자의 삶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다른 한축은 여고생, 소녀 민서(백진희)의 이야기다. 이 부분은 비관행적이다. 이 두개의 축이 만나 이루어내는 복합적, 양가적, 비균질적 이야기는 기존 판박이, 그 재판이 아니라 판의 형세를 어느 정도 변동시킬 잠재력을 갖는다. 말하자면 인종과 성, 젠더가 부딪히는 축과 판을 형성하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 노동자 카림(마붑 알엄)이 임금 체불과 관련해 부딪히는 상황에 대한 플롯은 예상 가능한 수준이다. 개선되지 않은 고용주와 이주 노동자의 관계가 반영된다. 예컨대 카림은 방글라데시의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데 이전 고용주가 임금 지급을 미뤄 이혼당할지도 모르는 곤란한 입장이다. 그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전화를 해보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장의 집을 직접 찾아다니는 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가 뒤쫓는 카림의 동선, 서울이라는 시티스케이프가 드러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의 뒤로 불타버린 숭례문을 덮은 사진 덮개 숭례문이 보인다. 화염으로 사라진 국보 1호를 뒤로하고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길을 찾는다. 그 와중에 카림이 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리고 그것을 민서가 슬쩍 자신의 가방에 넣음으로써 카림과 민서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카림을 둘러싼 재현의 방식이 다소 상례적이라면 민서의 경우는 예사롭지 않다. 백진희가 연기하는 민서는 독특하다. 이 소녀는 원어민 강사가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각종 알바를 전전한다. 이중 안마시술소는 ‘섹스’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섹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나는 민서가 안마시술소 등을 거치면서 혹은 그것을 거치기 전 자신의 몸과 성, 섹스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영화가 제시하는 이방인과의 우정이나 환대의 문제와 연관해 생각해보고 싶다.

민서는 자신이 슬쩍 자신의 가방에 주워 담은 지갑을 카림이 찾아내 경찰에 가자고 하자, 설왕설래 및 몸싸움을 하다가, 적반하장 카림에게 가슴을 만졌다며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고 맞받아친다. 그러나 곧 휴전을 제의하며 자신이 한번 카림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면서 그의 볼에 뽀뽀를 하고 사라진다. 돌아서는 민서의 얼굴 표정은 그 표현 효과를 정확히 아는 눈치다.

민서는 노래방을 하는 엄마와 실업자 남자친구의 관계에 대해 섹스 파트너라고 규정하면서, 그 남자의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대체 역할을 부정한다. 그리고 문제의 안마시술소 알바. 그녀는 말 그대로 몸의 ‘반사 작용’으로서 성적 쾌감을 주는 서비스업을 알게 된다. 이것과 교환되는 것이 원어민 영어 학원 수강증이다. 그녀는 카림을 영어 원어민에게 소개하고 둘의 영어 대화를 듣게 된다. 여기서 예의 백인 원어민은 한국 여자들을 “스위트”하다고 표현하면서 카림에게 한국 여자친구가 없느냐고 묻는다. 카림은 민서에게 이 ‘스위트’란 한국 여자를 쉬운 여자, 창녀로 표현한 것이라는 ‘문화적 번역’을 해준다. 크게 따져 오역은 아니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 바라보는 남성 시점적 과장이 있는데 민서는 이것을 더 적극적으로 오버 수용해 원어민 교사에게 행동으로 앙갚음한다. 바로 자신이 배운 반사작용이 일어나는 존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다. 나는 이 영화가 사회적, 경제적 제도로서는 한계를 지닌 이주 노동자에 대한 법적 장치들(영화에선 3년 만기의 연수 제도, 임금 체불 해결의 난항 등)을 어쩔 수 없이 평이하게 그려내면서 이것을 문화적 차원에서 좀더 복합적으로 다루려 했다고 생각한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각에서 벗어나 이방인에 대한 사고를 하게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천대받는 손님 노동자의 현실

‘이방인의 환대와 윤리’(이애령)라는 논문은 이방인에 대한 근대적 관용이 이방인은 “우리의 규칙, 삶에 대한 우리의 규범, 우리 언어, 우리 문화, 우리 정치 체계 등등을 준수한다”라는 조건을 제시한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관용은 권력의 불평등에 기초하는 가부장적 덕목에 기초한다고 비판하면서 저자는 절대적 환대라는 데리다의 환대의 윤리를 그리고 레비나스의 친밀한 타인으로서의 여성이란 존재를 비판적으로 소개한다. 데리다는 “관용은 환대의 한계에 불과하다”라면서 초대의 환대가 아닌 방문의 환대, 즉 주인의 입장에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자, 이방인, 타자의 방문에 열려 있는 절대적 환대, 법제화를 넘어선 절대적 환대의 윤리를 강조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적 자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회복하기 위해 돌아오는 주체를 환대하고 영접하는 친밀한 타인이 필요한데, 이 친밀한 타인은 말없이 부드럽게 수용하고 이해하는 거주 공간 내의 존재로 ‘여성’이다. 이와 관련해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라는 책은 창세기 19장 롯이 천사를 환대하고자 할 때 소돔의 남자들이 몰려와 그들을 내어줄 것을 요구하고 ‘상관’하겠다고 하자 손님들을 대신해 자신의 딸들을 내놓겠다고 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저자 이애령은 “(남자) 손님을 대신해 내 집의 (여자인, 딸이거나, 아내인) 타인을 내어놓는 환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면서 환대에 따르는 가부장적 위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환대의 성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아버지가 없고, 대체 아버지를 어머니의 섹스 파트너로 기능 환원시킨 미성년 소녀와 이주 노동자 사이에 일어나는 우정과 환대의 미묘한 지역, 제3의 경계 공간을 탐사하는 것으로 볼 만 하다. 두 소수자의 경계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한국의 법 제도는 관용이나 환대쪽으로 열려 있지 않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면 이방인을 환대해야 할 ‘아버지’는 부재하거나 체불 중이다. 민서는 카림을 이해할 문화적 레퍼런스가 없다. 카림이 민서가 아플 때 해먹이는 음식이 그들의 주레퍼런스가 된다. 그리고 카림은 “마음의 문을 열어라”라는 레퍼런스를 준다. 이 음식과 마음의 태도를 즉각적으로 버무려 민서가 자신의 방식의 우정과 친밀성을 실연하는 것이 예의 그 반사작용 존을 건드리는 것이다. 카림은 수용하고 흥분하는 듯하다가 곧 거부한다.

민서는 여기서 돈이 매개되지 않는 성적 친밀성과 안마시술소 서비스 사이의 간극을 깨달아야 한다. 민서에게 카림이 만들어준 방글라데시 음식의 풍요로움과 대비되는 민서의 실패한 환대의 경험이다. 카림은 민서에게 방글라데시에서는 친구가 집에 오면 아무리 오래 있어도 언제 가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절대 환대라는 그들의 문화적 원칙을 이야기한다. 나중엔 ‘친구를 웃게 하면 천국에 간다”는 방글라데시의 속담도 들려준다. 그러한 방글라데시에서 손님 노동자로 한국에 왔을 때 받는 천대의 양태, 손님의 등골을 빨아먹는 착취 상황엔 사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카림식 환대의 아이러니

이방인이란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믿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 비교의 관점을 제시해 통상적 생각과 타당성을 흔드는 사람이라고 할 때 카림이 민서에게 던지는 질타- 한국인의 영어권 백인에 대한 환대와 동남아권 유색인에 대한 천대- 가 기존의 질문 방식을 크게 바꾸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어떠한 정치적 윤리를 새롭게 제시하는지 모호하기도 하다. 또한 카림이 “스위트”한 한국 여자를 영어권 백인들이 쉽게 여긴다고 몰아세울 때, 이것이 싱글 마더와 살면서 영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안마시술소 알바를 하는 소녀가 꼭 들어야 하는 정치적 진술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또 그녀가 안마시술소에서 배운 ‘기술’로 학원 강사를 공격할 때 그것은 한국 남성을 위한 일종의 대리전으로 보인다.

현 정세로서는 찾아도 없는 법제적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영화는 카림이 제안하는 어떤 절대적 환대를 윤리적 원점으로 삼는다. 아이러니는 이러한 절대적 환대가 일어나는 카림의 방글라데시 집을 지키던 아내가 경제난으로 집을 떠난 것이다. 그곳은 친밀한 타인이 부재하고 한국엔 환대의 ‘남성’ 주체가 없다. 환대의 아포리아! 그러나 민서가 방글라데시 음식점에 들어가 카림의 음식을 떠올리며, 자신을 웃게 만든 그의 제스처를 반복할 때 우리는 그녀가 타자, 이방인을 이제 “체화” 했음을 이해한다. 이전의 그녀에게 가능치 않았던 경험이다. 반두비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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