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난영화 가운데는 가끔 재난 ‘예방’이나 재난 상황에서 ‘탈출’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 특이한 작품들이 출현한다. 일찍이 <타이타닉>이나 <노이 알비노이>가 보여주었듯이 이런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재난의 성질 자체인데 그것은 단지 갑자기 주어진 것, 하늘이 내린 것, 우연히 마주친 엄청난 재앙으로 나타난다. <해운대>는 이런 유형의 특이한 재난영화에 속한다. 재난은 영화 끝나기 20분 전쯤에 시작되며,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외로운 ‘선지자’인 지질학자 김휘(박중훈)가 당국에 하는 경고를 제외한다면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재난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재난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묵시록
이와는 달리 많은 재난영화의 줄거리는 예방과 탈출을 위해 주인공들이 벌이는 사투 과정에 주목한다. <딥 임팩트> <아마겟돈>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에서 최근의 <노잉>이나 <지구가 멈추는 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명 살상은 불가피하지만 그 이전까지 주인공들이 기울인 예방의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얻는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타워링>에서처럼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재난영화에서 재난은 영화의 서론이 끝난 직후 서둘러서 시작되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 재난영화는 우리의 상식에 부합한다. ‘재난이란 최대한 예방해야 하며 이미 발생한 경우에는 필사적으로 복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깔리고, 그 위에 ‘재난을 일으키거나 재난 앞에서 태만한 책임자들은 처벌받아야 하며 재난에서 인명을 구출한 영웅에게는 최상의 찬사를 올려야 한다’는 것 등이다.
<해운대>의 이야기 구조는 상식을 기초로 한 여타 재난영화와 다르다. 인간의 부주의와 문명의 오만이 재난의 원인이라는 메시지가 전혀 없지 않지만, 오히려 그 느닷없이 등장한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의 순간이 핵심 설정이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잠깐 드러내 보인 언뜻 스쳐가는, 무시무시한 삶의 심연을 확인하는 것은 영화 읽기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영화의 표피층을 장시간 덮은 온갖 느슨하고 물렁물렁하며 휴머니즘적인 서사들은 신파적이고 오락 지향적인 관객 대중을 유인하기 위한 ‘어트랙터’이자 작품의 관점에선 잡음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해운대>는 그 골격에서 그다지 한국적이지도 휴머니즘적이지도 않다. 이런 모든 습관적인 것들, ‘한국적 인연’으로 얽힌 애증의 인간관계들은 그것이 우리의 취향에 익숙하고 진부할수록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을 영화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재난과 거의 아무런 인과관계를 갖지 않고 재난에 의해서 갑자기 특이점을 맞이한다.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생뚱맞고 충돌적일수록 관객은 더 근본적인 공포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메타적인 수준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나키스트로서 그것은 소원 충족이기도 하고,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불안해하는 현대인에게는 죽음 충동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해운대>는 재난을 둘러싼 인간의 갈등과 화합을 다루는 재난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묵시록적인 영화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런 효과는 영화가 보여주듯이 가장 인간적이고 지리멸렬한 이야기와 가장 신속하고 비인격적인 사태가 강렬하게 병치되었을 때 달성된다.
첫 쓰나미의 부채를 일일이 청산하다
2. 재난의 예방과 해소가 아니라 재난 자체의 묘사에 중심을 두는 것은 지난 10년간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꾸준히 이어져왔다. 지구를 지키겠다는 광인 안에서, 근친상간의 고문을 당하는 부녀 안에서, 추억 자체가 살인범의 성격을 갖는 음흉한 시공간 안에서 말이다. 여기서 드라마화한 선악의 대결은 거의 언제나 (심하게 말하면) 맥거핀이며, 동일성 안에서 서로 대립하는 선악의 사각 링 자체를 습격하는 언어화하기 어려운 어떤 파괴력이 텍스트의 진짜 주인공임을 우리는 보아왔다. 어둠에서 탈출할 희망을 거의 제시하지 않는 이러한 불안의 사회심리는 지난해의 <추격자>에서 거의 극에 달했고, 올해 개봉한 <똥파리>에서는 ‘자멸’의 심리로 이행하는 느낌이다.
이 영화들에서 광폭하게 후려치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은 대개 ‘악몽의 회귀’와 관련이 있다. 예컨대 똥파리 애벌레는 어른 똥파리가 파괴한 잔해를 먹고 어른 똥파리가 되어 또다시 파괴를 일삼으며, 농약 동반자살의 기억을 공유하는 한약방의 어떤 모자는 십수년 뒤 동반살해(?)를 감행한다. 만식(설경구)에게 들이닥친 쓰나미 또한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반복된다. 악몽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해운대>도 예외는 아니지만 기존 영화에서 축 이동한 반복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인도양 한가운데에서 원양어선을 덮은 쓰나미 신에서 시작한다. 집단적 꿈과 회상의 미장센으로 연출된 이 장면을 단순히 민식과 연희(하지원)의 개인적 러브 라인으로 해석하기는 협애하다. 어떤 원형 기억을 연상하게 하는 첫신은 이후 두 번째 쓰나미가 닥칠 때까지 해운대의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조직하는 일종의 ‘결핍’지점이다. 연희가 만식을 사랑하게 된 계기, 만식이 구애를 주저하는 이유, 만식의 선주 억조(송재호)에 대한 증오, 억조의 연희에 대한 관용 등 모든 ‘인연’의 한가운데는 참혹한 기억이 마치 글자 맞추기 판의 빈칸처럼 중심적인 접착 역할을 하면서 자리바꿈을 계속한다. 사람을 잇는 이런 모델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멘털리티로 확장될 법하다. 그 가장 극단적 형태는 다큐멘터리 <할매꽃>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전쟁통에 이웃 마을간에 서로 죽이고 죽은 경험을 안고 매장된 부채의식을 품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마을 공동체일 것이다.
이제 기억이랄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참혹함이 초대형 쓰나미로 다시 등장할 때 영화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간의 불안과 자멸을 주제로 한 영화가 선택한 길은 두 번째 쓰나미를 원형적 쓰나미의 훨씬 강화된 버전으로 터뜨리거나 그 모습을 은폐한 채 소리만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조의 불길함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묻힌 기억이 괴물로 귀환한다’는 명제는 이 상황에 꼭 알맞다. 말하자면 반복의 고착성, 그 기계성을 지나치게 도드라지게 재현하고 폭로함으로써 관객이 정신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감정을 갖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해운대>의 결말에서 두 번째 쓰나미는 첫 번째 쓰나미가 만들어낸 부채를 일일이 청산한다. 연희는 과거에 만식이가 연희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급류에 휩쓸린 만식의 손을 놓는다. 만식을 억조가 구하는 것은 둘 사이의 또 다른 청산의 과정이며 신은 억조를 데려감으로써 억조에게 남은 빚을 받아낸다. 마찬가지로 신은 불효자식 동춘(김인권)에게 홀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안겨준다. 두 번째 쓰나미는 이렇게 죽음의 가능성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순간 이동시키면서 첫 번째 쓰나미가 함축하는 고질적으로 결착된 한국적 멘탈리티를 풀어헤친다.
불운한 과거가 현재 상황에서 증폭, 반복되어 현현하면서도 일련의 창조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사례는 한국영화에서 흔치 않다. 의사소통의 결렬 때문에 실어증에 걸린 감독 지망생이 디지털 의사소통으로 영화 제작에 성공한다는 <은하해방전선>이나 이와 비슷한 패러다임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희극적 드라마는 생산적 반복을 보여주는 소수의 사례다. 외국영화에서 최적의 사례를 들라면 아마 <그랜 토리노>가 적격일 것이다. 라스트 신에서 노인이 자처해서 몸으로 받았던 총알 ‘쓰나미’는 그가 50년 전 한국에서 맞이했던 전쟁 ‘쓰나미’의 숭고한 반복이라고 할 만 하다.
<그랜 토리노>와 같은 생산적 반복
3. “부산 사람들 이 영화 보면 정말 무섭겠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말하는 게 들렸다. 사실 <해운대>의 CG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고 드라마 또한 요즘 한국영화의 현란한 이야기 흐름에 비해서 덜 세련되어 보인다. 그럼에도 항상 새로움은 서로 다른 진부한 것들 사이의 획기적인 조합에서 탄생한다. 이 점에서 <해운대>는 답이 안 나오도록 얽히고설킨 ‘한국적 인연’ 혹은 천민자본주의적 낙후성에 신선한 일격을 가하는 영화다.
이창우
중앙대에서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영화비평을 쓰면서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