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커다란 붉은 스카프가 하늘을 난다. 그리고 이내, 스카프가 사라짐과 동시에 2시간여 진행된 재난의 여정이 정리된다. 붉은 등대, 다리 위를 흐르는 붉은 빛깔의 휘발유, 그리고 급작스레 화기를 뿜는 라이터에 빨간 원피스를 걸친 소녀까지, 영화 속 디테일이 쌓여 이르는 이른바 레드 계열의 인상은 분명 무언가를 지향하는 듯 보인다. 재난의 예고, 사건의 전조. 여기에 몇 가지를 더할 수 있겠다. 만식의 작은아버지가 간판에 부딪히기 직전 이미 날아오는 간판을 본 듯 소리를 지르는 연희의 컷은 이 영화의 편집 역시 같은 원칙 아래 움직였음을 이르는데, 물리적 긴장감의 유발보다는 좀더 유연한,- 이를 한국적인 정서라 칭할 만 하겠지만 이보다 더 적극적인- 분명 <해운대>의 연출적 지향점은 윤제균의 이전 작품들과 궤가 같아 보인다.
하늘을 나는 붉은 스카프의 그 ‘레드’
<해운대>에 등장하는 집단의 단순화는 분명 장르적 관습에서 비롯됐다. 부분이 갖는 감정적 동요가 이에 더해지며 사건의 양상은 변화하는데, 한국적 기획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러한 경향은 <해운대>에서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다만 <투모로우>로 대변되는 스펙터클한 CG가 여기에 맞물려 영화는 재난영화의 허울을 뒤집어쓴다. 그러니 이 영화를 총괄하는 것은 통일성있는 범주가 아니라(재난영화에 이를 한정시키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해 장르가 아니라 일종의 ‘양식’으로 보는 편이 적절하다. 재난을 경고하는 방식에서도 <해운대>는 한국형 재난영화의 타이틀로 인지상정의 코미디를 즐기도록 유도하지만, 부분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과 별개로 부분이 전체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단점을 드러낸다. 실제로도 재난에 이른 이후 영화는 개인적 위안을 남기며 전체를 퇴장시키는데, 해운대의 황량한 모습을 담은 전경숏이 이를 모두 감당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벤 싱어가 말한 멜로드라마의 다섯 가지 핵심 요소란 것이 있다. ‘강렬한 파토스, 과장된 감상,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 내러티브 역학, 스펙터클 효과.’ 이상하게도 <해운대>를 보는 내내 이 말이 떠올랐다. 사실 멜로드라마로 한정시키면 이중 어느 한 가지를 충족시켜도 그 지칭을 사용할 수 있는, 이것은 여전히 모호한 지칭이지만 어쩐지 이 영화가 다섯 조건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재밌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덧붙는다. 멜로드라마가 현대에 발생한 것에 비롯한 모더니티의 발전, 최근 ‘과잉자극’(hyperstimulus)이란 용어와 종종 멜로드라마는 결합하곤 하는데 <해운대>의 CG가 주는 효과가 이곳에 꼭 들어맞는 것은 따라서 흥미롭다. 선정성이 아니라 스펙터클로 대치될 뿐 멜로드라마의 속성들이 <해운대>의 특징과 묘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라 부르자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과정을 통해 <해운대>가 내건 ‘한국형 재난영화’의 타이틀이 ‘드라마와 재난의 합(合)’으로 들린다. 색에 대한 고다르의 언급이 떠오른 것도 바로 이 순간인데, “이것은 피가 아니라 빨간색이다.”, 앞서 말한 붉은 스카프가 날아가는 순간에 이르러 이는 장르뿐 아니라 색과 공간 역시 <해운대>의 논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공간의 배치에 의도가 있긴 한가
일반적으로 블랙과 화이트로 대변되는 색상의 양태는 잠재적 표현법과 결합해 영화 전체의 정감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색은 때로 이미지와 결합해 추상적 주제와 연계되거나 혹은 (표현주의 이후 줄곧 그랬듯) 강렬하게 정서적으로 차용되곤 하는데, 그러니 굳이 불을 소재로 한 <분노의 역류>나 <볼케이노> 같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재난영화에서 붉은색의 의미가 강렬한 것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물론 <해운대>의 색채주의를 파헤칠 의도는 아니지만 물에 의한 재난을 말하는 이 영화가 불을 배치한 방법, 혹은 묵직한 스카프가 굳이 바람에 날아가는 부분에 이르러서 레드가 무언가 예견하고자 했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물론 그렇게 도달한 지점 ‘재난에의 예고’가 결국 스펙터클에 전혀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기에 더 파고들기 어렵지만, 지속적으로 등장한 라이터의 효과처럼 영화의 색상 역시 같은 의도로 시작한 것은 명백하다. <해운대>가 코미디 정서를 여타 재난영화와 동떨어져 인지한 것처럼, 색채 역시 다만 한곳에서 뭉쳐지지는 않는다. 이는 스케일이 아니라 일종의 요소들, 바다의 색이 검푸르지만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큰 동작이 대단한 듯 보이지만 작은 동작과 별개의 의미를 갖는 식으로 발전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색이나 정서처럼 공간 역시 서로 분리되어 각자의 장단을 뽐낸다.
‘허름한 시장’, ‘벡스코 일대’, ‘바다와 구조대’ 이렇게 3곳이 영화의 무대가 된다. 당연히 핵심은 하지원이 연기한 연희의 횟집이다. 이곳에선 광안대교와 백사장, 그리고 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 먼 전경이라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가 아니면 다른 장소 모두를 연결하기 어렵다. 하지만 왜 굳이 해운대일까? 광안리나 인천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장소에 대한 어떤 위안도 이런 의문을 막지 못한다.
결국 해운대의 인파를 보여주기 위해 그곳이 배경이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영화의 과정이 굳이 시장통이 아니어도 좋았다는 결론에 다시 닿는다. 감정의 축도 상황은 비슷하다. 세 그룹을 통해 발전한 감정은 결국 한곳에서 조합되지 못한다. 미희의 캐릭터가 해운대에서 시작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오히려 단절되듯, 바다에선 요트에, 쓰나미가 일어날 때 오히려 파도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다. 결국 미희는 100만 인파의 대표가 아니다. 해변의 인구를 일반화하기엔 오히려 연희 커플이 더 적합해 보이는데, 하필 배경이 해운대인지에 대한 답이 다시 여기서 길을 잃는다. 만약 해운대를 본 적이 없는 외국인에게 세 공간을 연결하라 청한다면 그들은 과연 적절히 그려낼 수 있을까?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설경구의 역할이, 그러니 예를 들어 그가 피서객으로 분했더라도 결과는 비슷했을 거다. 재난이 전개를 이끈 <투모로우>의 전철을 들먹이지 않더라고, 적어도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개인을 2차대전으로 끌어들인 방법, 혹은 볼프강 페터슨 감독의 <퍼펙트 스톰>이 개인에 집중했던 방식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한스 울릭이 경탄한 해운대의 인파는 공간의 파워를 끝내 획득하지 못한다. 게다가 인물들의 난파가 이루어진 장소가 낡은 골목임을 떠올릴 때, 도대체 이 공간의 배치가 의도를 지녔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결국 인물의 분리가 영웅론(단일 주인공의 사투)을 벗어나기 위한 올바른 대안이었는지에 대해 <해운대>는 적절한 답을 내놓지 않고 마무리한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관객군의 소외
어느 인터뷰에서 윤제균은 “적을 만들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투모로우>가 자연 스스로의 누그러짐에 도움을 받는다면 <퍼펙트 스톰>은 결국 자연의 승리로 끝나고, <해운대>는 마침내 휴머니즘이 재난의 반대급부가 된다. 동의한다. 이 영화는 물론 이 부분에만 한정한다면 꽤 성공적이고 사랑스럽지만(샴푸신과 야구장신), 재난영화로서 <해운대>의 대척점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국가의 전능함, 혹은 전(全) 인간적 휴머니즘 대신 <해운대>가 선택한 따스한 마음이 결국 너무 모호해져버린 탓이다. 김 박사가 외치는 메가 쓰나미를 넘어서는 방법이 인간 개별이 되는 지점에서 목적은 와해되고- 때로 정부, 마구잡이식 현대화, 혹은 사랑의 마음으로 분화되고- 생사를 넘어 마음이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 행복하다는 개별적 휴머니즘은 너무 광범위하다. 그러니 전작 <1번가의 기적>을 넘은 건 오히려 CG뿐이란 결론에 도달한다면 너무 야박한 평가일까. 이 영화의 지지자들이 지적하듯 <해운대>의 장점은 개별적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재난영화의 스펙터클한 긴장감을 기다린 관객의 기대는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나? 만약 영화 <해운대>의 목적이 진정으로 눈물과 웃음이라면 굳이 ‘재난영화’ 장르를 선택한 이유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를 다 보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관객군의 소외, 이 역시 보호받아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