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영과 함께 드라마를 하고 영화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사랑하고 함께 작품을 하려고 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는 그 기억 속에서 장진영의 지난 얼굴을 더듬어본다.
<싱글즈> 노혜영 작가
“자기, 친구 삼고 싶다!” 스타 여배우가 어린 새내기 작가를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 한편, 화통하게 웃는 언니 모습에, 이 사람 외로워 보인다, 라고도 생각했다. 짱언니, 언니가 먼 길을 떠났다는 믿을 수 없는 비보를 들었을 때 난 축하인사를 듣던 참이었다. 결혼을 5일 앞둔 신부로서, 나 혼자 행복해해서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언니 곁에 사랑하는 분이 있으셔서,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면서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울지 않으려고 결심해서. 나 역시 암으로 아버지를 여읜 지 4개월…. 앞으로 암환자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싱글즈2>는 안 나오냐는 우스개 얘기를 들었을 때, 나의 분신이었던 ‘나난’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갈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 나난은 짱언니와 내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닮아 있을 것이라고…. 이제 나는 그럭저럭 나이를 먹어가겠지만, 우리의 나난은 영원히 파이팅을 외치던 스물아홉일 거다. 언니가 없는 나난은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과속방지턱처럼 덜컹이는 스물아홉을 떠올릴 때마다, 아름다운 언니를 추억할 것 같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이제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길. 안녕….
<싱글즈> 권칠인 감독
“한마디로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스트레이트’한 배우였다. 그 점이 어렵기도 했다. <싱글즈> 때 그녀가 맡은 나난은 많이 망가지는 보통 여자다. 그런데 진영씨는 워낙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가 키가 크고 예뻐서 감독으로서 망가뜨리려고 해도 잘 망가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서 여자 두명과 남자 한명이 친한 친구로 나온다. 촬영 전에 친해져야 해서 이범수, 엄정화, 장진영과 함께 틈만 나면 만났고, 술도 많이 마셨다. 다들 그렇게 친구가 돼서 촬영에 들어갔다. 당시는 여배우가 중심인 영화가 기획이 잘 안될 때였다. <싱글즈>는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라 여배우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였는데, 그만큼 진영씨는 의욕이 넘쳤고, 자신을 다 보여주려고 했다. 나 역시도 ‘이건 너의 영화다. 네가 마음껏 등장하는 영화다. 스탭들 모두 너를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기억나는 건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일이다. ‘십년 뒤에 우리 다 같이 만나서 <싱글즈>를 다시 보면 즐겁겠다. 실제 모습이 꽤 많이 묻어난 영화라서 살면서 되돌아보게 될 것 같다. 40대에 만나자.’ 그런데 아직 십년이 안 지났다. 영화감독들은 함께했던 배우들을 계속 지켜본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또 걱정하고. 연기를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안 좋은 부분들을 이야기해주고. 그게 즐거운데, 나에게는 이제 그런 배우가 사라지고 없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김해곤 감독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캐스팅 때 장진영씨를 처음 만났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밝고 착했다. 영화 속 캐릭터와 절로 대비가 되더라. 감독으로서 그런 면을 희석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여러 명의 배우들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날 바로 진영씨와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진영씨의 소속사에 적극적으로 제의를 했다. 인상적이었던 게, 그렇게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함께하자고 하면 보통 답을 빨리 안 준다. 감독으로선 속이 터질 노릇이다. 진영씨 역시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답을 바로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웃으면서 ‘감독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더라. 그게 그렇게 고맙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달 반 정도를 기다려 승낙을 받았다. 그런데 촬영 때는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자기 모습과 정반대이기도 했고, 제작상 이런저런 난관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그때마다 남들한테 싫은 소리 하나 안 했다. 힘든데도 진영씨는 현장에서 스탭들을 배려하고 항상 밝게 대했다. 화 한번 낸 적 없다. 그렇게 늘 안으로 삭이는 진영씨 성격이 때로는 안돼 보이고 안타깝기도 했다.”
SBS <순풍산부인과> 김병욱 PD
“내 기억에 장진영은 정말 예쁜 배우였다.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 그 이미지가 장진영의 연기를 남과 다르게 만들어줬다. 작품 속 캐릭터 ‘장 간호사’도 비슷했다. 남들은 다 ‘표 간호사’와 연애하는 거 아는데 정작 자기는 남들 다 속인 줄 아는 순진한 캐릭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진영씨가 ‘저희 사실 사귀어요. 모르셨죠?’라고 말하는데 그게 본인이 가진 순수한 캐릭터와 합쳐져 굉장히 재밌는 장면으로 탄생했다. 같이 더 오래 작품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장진영씨가 하차한다고 할 때 선뜻 격려해줬다. 그건 그녀가 가능성이 많은 배우였기 때문이다. 장진영씨 뒤를 이은 송선미, 허영란 같은 배우들이 특정 캐릭터로 잡기 좋은 배우였다면 장진영은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발견할 것이 많은 백지 상태의 배우였다. 많은 걸 다양하게 해낼 수 있는 주연급의 얼굴이랄까. 작품하면서 그 사람이 가진 그릇보다 내가 준 역할이 너무 작아서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배우다. 뒤에 작품 끝내고 식사를 한 적 있었는데 ‘잘 안되면 다시 돌아오라’고 농담조의 말을 건넸지만, 그녀가 더 큰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건 그녀도 나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MBC <수줍은 연인> 안판석 감독
“처음 만난 건 선배 PD가 연출했던 수목드라마 <수줍은 연인>이었다. 하루는 선배가 아파서 내가 대신 연출했는데 그게 배우 장진영씨와의 첫 만남이었었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연출한 게 아니라 딱히 기억나는 건 없다. 진영씨는 데뷔한 지 얼마 안된 때였고, 나 역시 선배 대타로 맡은 거라 대화는커녕 촬영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내 연출작이었으면 캐스팅할 때부터 만나서 차도 마시고 작품 이야기도 했을 텐데…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많이 아쉽다. 그 뒤, 장진영씨는 머나먼 사람이 됐고. 늘 느낀 건 ‘저 배우가 연기를 진지하게 한다, 또 진지하게 해보고 싶어 한다’였다. 그런 건 작품이나 그 사람이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얄팍하면 얄팍하달까, 진지하면 진지하달까 그런 거 말이다. 분명한 건 장진영씨는 늘 진지한 배우라는 인상이 들었다는 거다. 그런 배우를 잃게 된 것이 너무 아쉽다.”
이현승 감독
결국 아직은 영화로 만들지 못했지만 한국 근대사의 세 여성, 그러니까 무용가 최승희와 화가 나혜석, 그리고 가수 김추자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내 오랜 꿈이다. <시월애>를 끝내고 준비했던 첫 번째가 바로 김추자에 관한 영화였다. 장진영 역시 내 생각과 비슷하게 나를 만날 때마다 ‘다양하고 힘있는 여성 캐릭터가 한국영화에 많이 나와야 한다’고 자주 말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출연을 부탁하려고 1970년대 섹시하면서도 강인했던 그리고 비극적이었던 가수 김추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러다 시나리오를 계속 고쳐가던 어느 날, 우연히 진영과 술을 마시게 됐는데 나에게 다짜고짜 “감독님, 나 근데 노래를 못해 하하하” 하며 웃는 거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섹시하면서도 터프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녀만의 매력은 김추자를 다시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를 친구다. 정말 남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30대 여배우의 현실, 아니 그녀들의 성숙함과 연기력을 담아줄 시나리오 자체가 더 빈곤한 지금을 생각하면, 정말 그녀와의 이별은 그녀와 작품을 함께하지 못한 나뿐 아니라 다른 많은 한국 감독들의 지울 수 없는 슬픔이 될 것 같다.
MK픽처스 심재명 대표
“2007년 가을 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소름> 시네토크’에 윤종찬 감독, 배우 장진영씨와 함께 참여한 적 있다. 사실 난 그 영화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순수하게 <소름> 팬으로서 함께했다. 개인적으로 워낙 <소름>을 좋아했다. 김명민씨도 잘했고, 무엇보다 장진영씨의 연기가 가장 빛난 영화가 <소름>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폭발하는 연기의 아우라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굴곡과 갈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진영씨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가끔 마주친 적이 있다가 그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물론 그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실제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느꼈고 말투나 제스처에서 영화 속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장진영씨는 개성이 뚜렷한 <소름>이든 멜로드라마인 <싱글즈>든 늘 다른 캐릭터로 등장하면서도 ‘강단있다’고 해야 하나, 늘 자기만의 색깔이 있었다. 멜로드라마 안에서도 그냥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가 아니라 ‘강골’의 여자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 게 <소름>이었고 그것이 <청연>의 여류비행사 역할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장진영씨처럼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자신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여배우는 드물었다. 주연급 여배우가 드물다는 한국영화계 안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에 있던 배우였다. 그런 여배우가 사라져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