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가 1천만 고지를 넘은 다섯 번째 한국영화가 됐다. 뒤늦게 발동이 걸렸지만 <국가대표>도 여유롭게 700만명을 넘을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 대중영화에 찾아든 산업적 빛이다. 한국 대중영화는 이제 보릿고개를 넘긴 것인가. <씨네21>이 1천만이라는 숫자를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제기하는 질문을 피해가지는 않으려고 한다. 먼저, 지금 한국 대중영화의 흐름과 좌표를 제시하는 간략한 글을 읽는 것으로 워밍업을 해보자. 그 다음 오랜 기간 동안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해온 김영진, 이동진, 허문영의 대담에서 본격적이고 세밀하고 실질적인 진단과 모색을 접할 수 있다. 한편 한국영화에 늘 지대한 관심과 성실한 안목을 가져온 달시 파켓이 글을 기고한다. 이렇게 하여 안과 밖에서 보는 관점의 시너지가 있을 것이다. 덧붙여, 지금 충무로가 애지중지하는 충무로 대박 키워드도 함께 소개한다.
전형성의 안온함에 젖지 말라
동시대 정서 겨냥한 컨셉 영화가 대박 전형이 된 2009년 한국영화계로의 전언
와야 할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반기는 기색들이 역력하다. 적어도 영화산업 관계자들의 입에서 지금 <해운대>가 달성한 관객 1천만명을 성취로 보지 않는 분위기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300만∼400만명 규모의 영화들이 양적, 질적으로 진짜 한국영화산업의 효자가 될 거라고 꾸준히 말해왔던 이들도 지금은 잠시 이 결과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쪽이다. 당초에 <해운대>와 함께 올여름 3파전으로 예상되었던 영화 중 <국가대표>도 흥행에 가속도가 붙었고 700만명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축하 분위기에 한 몫하고 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해운대> vs <국가대표> vs <차우>가 될 것이라는 구도에서 <차우>가 유독 뒤처졌는데, “재능있는 신인감독의 영화인데 적절한 규모를 찾지 못하고 약간 어정쩡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운대>하고 비교하자면 쓰나미라는 것이 적어도 어떤 동시대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데 반해 멧돼지의 형상에서 그런 걸 느끼기 어려웠다(허문영)”는 말에서 무언가 감지할 수 있다. 주류로 진입한 야심찬 신인감독의 B급영화적 기질인가(<차우>), 동시대의 정서를 겨냥한 계산된 컨셉 영화들인가(<해운대> <국가대표>). 그렇게 격돌했을 때 후자가 확연한 승기를 잡았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전형성이 흥행으로
지난 네편의 1천만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왕의 남자> <괴물>의 연장선에 <해운대>를 놓고 보자면 이 영화가 그동안의 1천만 계열에서 다소 차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점이 지금 한국 대중영화의 어떤 지향점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는 비장했다. 역사적 상흔에 의존했고 울음을 끌어냈다. 그에 비한다면 <해운대>는(그리고 <국가대표>는) 적절한 수위 이상의 치명적인 통곡에 의존하지 않으며 웃음은 기본이다. 한편으로는 정교한 서사적 얼개로 관객 수용력을 발휘하거나(<왕의 남자>) 무의식적인 사회 반영성(<괴물>)이 작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좀더 단순하고 명료하고 직선적이다.
<괴물>을 제작했고 <괴물2>를 준비 중인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실은 <괴물>을 만들 때의 목적 중 하나도 미국영화의 괴물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도 한국영화에서 한번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는 재난 중에서도 물의 구현에 성공한 것 같다”고 적절하게 지적해준다. 새로운 기술적 구현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시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해운대>의 기술적 성취를 높이 산다. 다만 <괴물>과 <해운대> 사이의 한 가지 차이를 짚을 수는 있다. <괴물>은 할리우드에서 거의 하지 않은 방식의 정서와 이야기로 비껴가 성공했다. <해운대>도 서사 안에 그런 방식의 기입 흔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전략이 있다. 그동안 기피해온 ‘전형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과속스캔들>을 제작한 토일렛픽쳐스의 안병기 대표는“<해운대>와 <국가대표>는 이전 1천만 영화하고 다르게 대중영화로서, 상업영화로서 어떤 전형을 갖고 승부를 걸었다. 투자자들은 그럴 때 너무 빤한 이야기인데 그게 되겠냐고 묻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있게 밀어붙여서 된 거다. 예전에는 색다른 이야기에 호응했다면 지금은 빤하지만 오락적인 것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들이 더 잘된다. 지금 새로운 기획이란 기존의 영화를 벗어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형화된 것 안에서 관객이 그동안 못 받아줬던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새로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새로움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로 들린다.
단기적 변칙은 표준이 될 수 없다
틀린 말이 아니다. <씨네21>이 취재하여 키워드로 제시한 것처럼(70쪽 참조) 지금 충무로 안에서 대박영화의 성공 전략으로 입을 모으는 코드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명료하게 요약된다. 관객을 앞서가지 말고 관객의 눈높이에 맞출 것. 선한 인물들(악해도 끝내 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킬 것. 코미디와 재난 등 다양한 즐길 거리를 장치할 것.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폭넓은 관점을 지킬 것 등이다. <해운대>나 <국가대표>가 그렇다. 이 전략에 대한 영화적 평가에서는 쟁점이 남겠지만, 가령 ‘시대가 어려울 때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보기 편한 영화가 더 잘된다’라는 시쳇말이 지금 유효하다는 걸 입증해준다. 유형은 여러 가지다. 워킹 타이틀식의 로맨틱코미디, 소시민 성공담을 소재로 한 스포츠영화, 전형적인 유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등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당분간은 컨셉을 앞세운 대작 영화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향에 대해 우려 섞인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관객이 ‘윤제균의’ <해운대>, ‘김용화의’ <국가대표>를 보러 갔다고 믿기는 어렵다. 부산의 유명 휴양지에 몰아치는 쓰나미라는 소재로서의 <해운대>,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이 선사하는 웃음과 울음의 <국가대표>를 보러 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때 봉준호의 <괴물>,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그 작가와 장르의 결합만으로도 일정한 흥행력을 담보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작가적 장르영화에서 작가의 수준이 일정하게 관객의 흥미를 끌어당기고 놀랍게도 그것이 대중적 성공의 주요인이 되어왔던 것을 생각한다면(<괴물>은 한국에서 1천만 영화지만, 국외에서는 한국의 예술영화로 손꼽힌다) 이러다가 작가들이 양산하는 장르영화들이 실종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기우는 아닐 것이다. 또는 관객의 정서를 압도하는 대중영화의 모델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하강했을 때 그것조차 곧 질릴지 모른다는 예감(이동진), 정통적인 정서적 자극이 아닌 단기적이고 변칙적인 기술로 대중영화의 표준성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염려(김영진)는 충무로의 산업 종사자들도 한번쯤 귀담아들어야 할 부분이다.
창의성과 산업적 성공 같이 가도록…
물론이다. 한국영화는 요즘 너무 어려웠다. 지금으로서는 <해운대>와 <국가대표>가 역할 모델로 솟을 수밖에 없다.“결과적으로 조폭영화, 공포영화, 저예산영화, 다 실패하고 유일하게 대작영화만 성공했다. 20억원대 중·저예산 영화들이 수익이 좋다고 판단했던 때가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그 저예산영화들은 다 흥행에 실패했다. 대작영화들은 다 흥행에 성공했고. 예전에 대작영화가 돈 들이고도 실패했다면 그건 판타지 장르였다. 지금은 사실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롤 모델이 많아졌다”(안병기),“<괴물2>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해운대>와 <국가대표>가 잘되는 게 힘이 된다. 한국영화계가 무언가 위축되고 그전보다 못한 것 아니냐는 위기가 해소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투자자들도 되는 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최용배)라는 기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산업적 성공은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이제 남은 숙제는 영화의 어떤 창의적 면모가 영화의 산업적 성공과 함께 갈 수 있는가 좀더 숙고하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관객은 늘 너무 빨리 알아차리거나 너무 늦다. 산업적으로 청신호가 들어온 지금 역동적인 지형도도 함께 구상되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