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너희가 윤발이형을 아느냐?
2010-02-16
글 : 주성철
주성철 기자가 젊은 관객에게 들려주는 배우 주윤발의 전설

지금 중국에는 공자 바람이 불고 있다. 그의 전기영화나 다름없는 <공자: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정부의 밀어주기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상영관을 확보하면서 <아바타>와의 경쟁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공자를 연기하느냐다. 공자의 가르침을 스크린에서 재현할 때 납득할 수 있는 인품을 지녀야 함은 물론, 공자의 키가 2m가 넘는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니 어쨌건 키 큰 호남형의 배우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중화권 남자배우 모두를 아우를 때 이에 걸맞은 배우는 주윤발 말고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홍콩영화계의 대표 배우로서 언제나 리더로서 신의있는 인물로 출연했기에 <공자: 춘추전국시대>는 마치 주윤발 그 자신의 반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속 그의 모습을 보며 옛 생각이 하나둘 불러져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2007)와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 등을 통해 그를 처음 본 사람들도 꽤 될 테니, 현재 중국 젊은 세대만큼이나 우리 젊은 관객도 주윤발이 생소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영웅본색>(1986), <첩혈쌍웅>(1989) 등의 기록적인 흥행을 비롯해 당대 한국 청년문화의 큰 자리를 차지했던 ‘레전드’이기도 하다. 노년의 공자까지 연기하는 그를 보며 옛 기억을 불러내봤다. 한때 그는 정말 얼마나 우상 같은 이름이었나. 그리고 광둥어에 익숙한 토박이 홍콩 배우로서 보통화 연기에 도전한 <공자: 춘추전국시대>의 흥행 결과를 노심초사하고 있는 그에게 서면으로 질문을 던졌다.

<영웅본색3>
<공자: 춘추전국시대>

모든 것은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됐다. 초반부터 선글라스를 번쩍이며 위조지폐에 담뱃불을 붙이고 “영어도 할 줄 아냐?”는 적룡의 말에 “오브 코스!”라고 답하던 주윤발의 쿨한 넉살에 반해버렸다. 나중에 적룡의 체포 소식을 접한 주윤발이 육교 위에서 가만히 신문을 떨어뜨릴 때는 그야말로 내가 육교 위에서 추락하는 듯한 비감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신문지가 떨어지듯 강호의 도리가 떨어졌다며. 그러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주윤발은 입에 성냥개비를 끼워 물고 친구의 복수를 위해 홀로 풍림각에 쳐들어간다. 도대체 누가 열어주는 건지 슬로모션으로 문이 열리고, 주윤발은 일체의 시선 변화도 없이 조직원들을 무차별 난사한다. 악당들이 죽었는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총알이 바닥난 쌍권총을 내던지던 주윤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감동 그 자체였다. 쓰러지듯 비운의 일격을 당한 그는 기어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와 복수를 마무리짓는다. 이른바 ‘홍콩 누아르’가 향후 10여년간 한국 극장가를 지배하게 되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협, 무술이 아니라 슈트를 입고 찾아온 최초의 홍콩 스타였다.

그의 전설은 <영웅본색>부터였다

홍콩 라마섬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주윤발은 그렇게 유덕화, 장국영과 함께 아시아 전역을 호령하는 대스타가 됐다. <영웅본색>을 찍은 1986년 주윤발은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1987년에도 11편에 모습을 비췄으며 1988년에는 무려 16편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을날의 동화>(1987)의 경우 미국 촬영차 몇 개월 홍콩에 없었던 걸 감안하면 아침, 오후, 저녁 각기 서로 다른 3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최후승리>(1987)에 주윤발을 캐스팅하려 했던 담가명 감독의 얘기를 빌리자면, 그때 홍콩영화계는 시나리오가 채 나오기도 전에 주윤발 출연부터 결정짓던 때였다. 당대 다른 스타들과 비교해도 어떤 역할이든 소화 가능한 배우니까 이번에는 어떤 장르의 영화를 할 건지 감독도 제작자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주윤발부터 모시는 데 혈안이 된 거다.

국내에서의 인기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열혈청춘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도 한 당시 영화잡지 <로드쇼>를 펼치면 유덕화의 ‘투유 그랜드’ 속지에 사랑의 사연을 적어 보내달라는 광고가 나오고, 다음 장을 넘기면 외할머니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더 친숙했던 토미 페이지가 ‘아모르’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주윤발도 빠질 수 없었다. 오연수의 ‘암바사’와 왕조현의 ‘크리미’가 대결했지만 지금까지 옛 디자인 그대로 살아남은 건 주윤발의 ‘밀키스’가 유일하다. 여성 팬들 사이에서는 음료를 마시면 주윤발과 은밀한 키스를 하는 기분이기에 이름이 밀키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얘기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주윤발 팬클럽 회원이 되는 건 힘들었다. 유덕화와 알란탐과 만나려면 파워임팩트 팬클럽, 성룡과 장만옥과 종초홍과 왕조현과 장학우를 만나려면 골든웨이 팬클럽, 글로리아 입과 호혜중을 만나려면 판아시아팬클럽에 등록해 신청하면 됐지만 주윤발은 따로 없었다.

주윤발의 ‘밀키스’ CF
<로드쇼>에 실린 <유머1번지> 출연 모습

그래도 아쉬운 건 없었다. 당시 두개의 영화월간지 <로드쇼>와 <스크린>은 매달 홍콩 현지취재 영화기사로 넘쳐났다. <아비정전> 현장을 직접 방문한 기자가 왕가위에게 진짜 가위를 들게 해서 찍은 전설의 사진도 있고, 성룡이나 장국영의 집으로 가서 인터뷰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청소년의 열렬한 관심을 보여주듯 홍콩영화나 배우 관련 기사는 언제나 영화잡지의 메인이었다. 흑백과 컬러 종이로 나뉘어져 있던 전체 잡지 구성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흑백으로 나갈지언정 주윤발과 유덕화와 장국영과 왕조현의 인터뷰 기사는 별 내용이 없어도 꼭 컬러로 나갔으니까.

혹사당하던 주윤발이 당시 본의 아니게 가장 길게 쉬었던 건 간염 등으로 인해 <종횡사해>(1991)에 출연하기 전 9개월여 정도였다. <종횡사해>는 어쩌면 오우삼과 주윤발 모두 홍콩과의 이별을 암시한 작품이자, <황비홍>(1991) 시리즈와 더불어 국내에서 홍콩영화 흥행의 황혼기가 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피카디리극장은 <종횡사해>를 내걸고자 2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하며 잘나가던 한국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를 굳이 내리려고 했다. 급기야 피카디리극장에서 사정을 알 리 없는 주윤발과 오우삼의 무대인사가 열렸고 그 사회자가 다름아닌 최수종이었다. 객석은 이명세 감독이 극장주와 서럽게 대판 싸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 관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국내 CF광고, 쇼프로 출연도 여러 차례

게다가 당시엔 TV 쇼프로그램에 홍콩 스타들이 출연하는 것도 꽤 흔한 일이었다. 주윤발 역시 <유머 1번지>의 ‘내일은 참피온’ 코너에 나가 ‘칙칙이 복서’ 심형래와 복싱을 했고, 최양락이 연기학원 강사로 나오던 코너에서도 김학래의 안내로 연기 시범을 보였다. 2박3일 방한 일정의 마지막은 변진섭, 김민우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이었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이었는지 펑크를 내고 말았다. 변진섭과 김민우라면 당시 그에 버금가는 초특급 스타였지만 <로드쇼>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다른 콘서트보다 다소 비싼 거금 1만원이란 입장료를 오로지 주윤발 때문에 치렀던 학생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그리고 <스크린>에는 심지어 <감옥풍운2>(1991)에서 엉덩이를 제대로 ‘깐’ 주윤발을 계기로 다음과 같은 영화 퀴즈도 실었다. ‘다음 중 주윤발의 엉덩이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보기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감옥풍운2>와 더불어 <화성>(1983), <용호풍운>(1987)에서 주윤발의 엉덩이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주윤발 형님은 이후 <화평본위>(1995)를 끝으로 자신의 거의 모든 영화를 한국에서 흥행시키고 미국으로 떠났다.

<호월적고사>
<첩혈속집>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주윤발은 언제나 공자를 연기했다. <등대여명>(1984)에서 일본군을 피해 만자량과 엽동을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때도, <영웅본색>(1986)에서 장국영에게 친형의 의미를 다그칠 때도, <첩혈쌍웅>(1989)에서 자신으로 인해 눈이 먼 여자를 위해 킬러 생활을 계속하며 악착같이 수술비용을 모을 때도, <정전자>(1989)에서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때 도와준 유덕화의 은혜를 잊지 않을 때도, 그렇게 그는 언제나 공자의 ‘예’를 몸소 실천해온 인물이었다. 직접적으로 연상되는 이전의 모습들도 있다. 어린 칠사궁을 돕기 위해 고루한 벼슬아치들과 대립하는 모습은 <첩혈쌍웅>에서 쫓기는 와중에도 상처 입은 소녀를 안고 끝까지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던 모습이나 <첩혈속집>에서 신생아를 가슴에 안은 채 총격전을 벌이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위나라에서 주신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모습은 <화평본위>(1995)에서 교활한 엽동의 갖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던 모습을 연상시키고, 눈보라 속에서 아들을 잃는 장면은 힘들게 아이를 가졌다가 아이가 탯줄에 감겨 유산된 뒤 아직까지 자녀를 두고 있지 않은 주윤발의 실제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1991년 아내가 임신했을 당시 그는 드디어 아버지가 된다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지만 그런 안타까운 일을 겪었고, 그런 아픔 속에서도 두 사람은 지금껏 모두가 존경하는 소문난 잉꼬부부로 살아오고 있다. 여러 사회봉사활동도 열심이고 도서관 건립에도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진관희 사건으로 인해 그 못지않은 평지풍파를 겪은 사정봉이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심하면서 그 모델로 삼았던 것이 바로 주윤발 부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장면들을 떠올려봐도 일흔살이 다 돼 노구를 이끌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오는 영화 속 공자의 모습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바로 할리우드에서 힘겹게 고생하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실제 그의 모습과 지나치게 겹치기 때문이다. 라마섬의 가난한 시골 소년이 청년일 때 홍콩영화계의 영웅이 됐고, 이제는 중년이 되어 광둥어가 아닌 보통화를 익혀 전체 중국 대륙을 대표하는 공자를 연기했다. 그렇게 <공자: 춘추전국시대>는 오직 주윤발의, 주윤발에 의한, 주윤발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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