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 35잔> 35 rhums
2008년 감독 클레르 드니 상영시간 97분
화면포맷 1.78: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5.1, 2.0 프랑스어
자막 영어 출시사 뉴웨이브 필름(영국)화질 ★★★☆ 음질 ★★★☆ 부록 ★★★
<럼 35잔>을 본 평론가 조너선 롬니는 클레르 드니를 만나 “해체되어 있고 급진적이며 도전적인 전작에 비해 아주 다르다.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라고 평했다. 드니의 몇몇 영화에 대한 상반된 평가와 달리 <럼 35잔>에 쏟아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은 그러니까 ‘친밀성’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드니의 작품 가운데 유독 <럼 35잔>과 친밀성을 연결짓는 건 합당한 일이 아니다. 롬니의 반응에 드니는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려 했을 뿐, 나는 이전과 같은 존재다”라고 답했다.
아버지와 딸이 나란히 서서 밥을 먹는 장면은 데뷔작 <초콜릿>에서 흑인 남자와 백인 소녀가 음식으로 대화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고, 아프리카계 부녀는 <잠이 오질 않아>의 (같은 배우 알렉스 데스카가 연기한) 홀아비와 어린아이의 15년 뒤 이야기를 계속 잇고 있으며, 밥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냄새는 <금요일 밤>에서 추위를 녹이던 라디에이터의 온기를 기억하게 하고,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는 <네네트와 보니>에서 헤어진 부모 탓에 오누이면서도 서먹해진 (마찬가지로 같은 배우 그레고와르 콜랭이 연기한) 소년과 소녀를 빼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터운 정을 나누는 부녀의 관계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종종 보았던 부녀지간의 사랑을 낯선 파리 외곽에서 재회하도록 만든다.
오즈의 부녀지간 사랑을 파리 외곽에서 만나다
허우샤오시엔이 오즈에게 바친 헌사인 <카레 뤼미에르>가 (오즈가 사랑했던) 전철이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럼 35잔>의 도입부는 어지러이 교차하는 철로와 기차로 한없이 채워져 있다. 하기는 21세기의 프랑스와 20세기 중반의 일본이 공유하는 일상의 닮은꼴이 달리 무어 있겠는가. 도시인이 생활하며 익숙하게 접하는 기차는 <럼 35잔>에서 주제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니에게 인생이란 ‘운동의 법칙을 따라 지속되는 여정’이다. 드니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의 기관사인 주인공을 통해 ‘인간은 멈추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걷기를 그칠 때 생명이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럼 35잔>의 인물들이 나이가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모두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건 그래서다. 정년을 앞둔 기관사인 리오넬은 대학에 다니는 딸 조세핀과 파리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홀아비인 그는 이제 딸을 떠나보낼 때라는 걸 알지만, 속 깊은 그녀는 쓸쓸히 남겨질 아버지를 두고 결혼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 자신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구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딸은 “날 더이상 사랑하지 않나봐요”라고 응수한다. 그들의 주변으로 가브리엘과 노이와 르네가 배치된다. 택시를 운전하는 가브리엘은 리오넬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맴돌며 중년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아파트를 저주받은 유산이라 생각하는 노이는 세상을 떠도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선택을 망설이며, 퇴직 뒤의 풍요로운 삶을 꿈꾸었던 르네는 정작 세상 밖에 머물 곳이 없자 과거를 그리워한다.
2000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드니는 “뇌는 이미지와 노래로 충만하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심리적인 설명을 제거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콘서트로 향하던 네 사람이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은 그 말의 실증이다. 차 안에서 잠시 서먹한 순간을 보냈고,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비에 흠뻑 젖은 그들은 매력적인 카페 여주인의 환대에 미소를 되찾는다. 이어 <시보네이>와 <나이트 시프트>가 흐르면 그들은 하나둘씩 음악에 몸을 싣는다. 드니는, 단순하면서 율동적인 몸짓과 은밀한 시선의 교환을 매끄럽고 에로틱하게 맺음으로써 6분여 만에 복잡한 내면의 지형도를 완성한다. 붉은색과 흰색의 전기밥솥을 빌려 부녀의 이심전심을 들려주는 장면은 또 어떤가. 거의 선문답에 가까운 두 장면의 구사에서 드니는 동양의 정서와 정신의 깊이에 다다른 듯하다. 이렇듯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고 있으나, <럼 35잔>은 그저 온정에 기대 착하게 살아보라고 다독이는 데 만족하진 않는다. 리오넬의 딸 조세핀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그것이 바람에 불과함을 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아비는 어쩔 수 없이 외롭게 살아가야 할까. 17년의 생을 마치고 쓰레기봉투에 버려지는 노이의 뚱보 고양이처럼, 공허함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 퇴직 기관사처럼, 리오넬은 나머지 인생을 내동댕이쳐야 할까. 드니의 대답은 ‘노’다.
비주얼과 사운드에서 다른 방식을 찾은 클레르 드니
오즈의 <만춘>과 <꽁치의 맛>의 영향 아래 있는 <럼 35잔>은 결말에 이르러 사뭇 다른 길을 간다. <만춘>에서 딸의 결혼식을 마친 아비는 바에 들러 술을 마신다. 오즈는, 집으로 돌아온 그가 사과를 깎다 멈추는 옆모습과 파도치는 바다의 짧은 삽입으로 영화를 마쳤다. <꽁치의 맛>에서 과년한 딸을 시집보낸 아비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파한 다음 다시 혼자 바를 찾아 술을 주문한다. 술에 취해 귀가한 그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다 의자에 앉고, 처량한 그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 남자가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외로움으로 가득한데, 오즈는 웃는 표정 아래 깊은 슬픔을 감춘 아비의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한데 눈여겨볼 부분은 <꽁치의 맛>의 바 장면이다. 오즈는 야속하게도 배경음악으로 행진곡을 틀었다. 오즈는 극중 인물은 물론, 몇 개월 전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자신에게도 기운을 내라고 당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럼 35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 행진곡의 대구다. 딸의 결혼식이 끝난 뒤, 리오넬은 바에 가서 쓰디쓴 35잔의 독주를 삼킨다. 그건 이별의 순간을 위해 간직한 전설의 의식이다. 그는 말한다. “일생에 이런 순간은 딱 한번뿐이지.”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홀로 긴 시간을 버티려면 그토록 독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뜻이다. 리오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드니는 주저앉지 말기를 응원한다. 길을 떠나는 자 앞에서 그녀는 용기있는 축배를 들이켠다.
영국에서 출시한 <럼 35잔>의 DVD는 드니의 영화 동반자인 ‘아녜스 고다르’와 ‘틴더스틱스’의 영상과 음악을 보고 듣기에 딱 좋은 수준이다. 부록으로, 프랑스 영화채널 <시네무아>에서 제작한 드니와 조너선 롬니의 인터뷰 영상(21분)과 예고편을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