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 들어온 김해숙의 모습에서 ‘친정엄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극중에서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외모,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스탭들과 거리낌없이 대화하는 친화력, 그리고 왠지 따라야 할 것 같은 단호한 말투의 김해숙은 엄마보다는 왕언니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이런 특성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TV 요리강사이자 주부 김민재와 겹친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친정엄마>를 비롯해 <우리형>(2004),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2004) 등에서 보여준 소박하고, 한 고집하고, 속정 깊은 엄마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김민재가 실제 저와 가장 비슷해요. 그래서 ‘청국장’이 되어야 하는 <친정엄마>의 엄마가 어려웠던 것도 실제 저는 청국장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영화에서 김해숙이 맡은 엄마는 세상 대부분의 엄마가 그렇듯 딸을 끔찍이 아낀다. 제 손으로 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 일일이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는가 하면, 딸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사돈 앞에서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정말 징글징글한, 한국적인 엄마다. 동시에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출연을 결정한 이유이자 연기의 과제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모정.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연기예요. 새롭진 않지만 배우로서 도전해볼 만했죠.”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최근 배우 김해숙을 재발견한 <무방비도시>의 전설적인 소매치기, 배우로서 새롭게 태어나게 한 <박쥐>의 섬뜩한 시어머니 등, 파격적인 역할들을 통해 그녀는 스스로 쌓아놓은 ‘국가대표 엄마’ 이미지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전의 이미지로 되돌아간 듯한 ‘친정엄마’라니. 정작 그녀는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끄집어낸다.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엄마뿐이에요. 그런데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모정이 있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해보지 못한, 징글징글한 모정인거죠. 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엄마를 연기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여배우 둘이서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이 흔치 않은 기회를 그녀는 분명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해숙은 <박쥐> 이후 고민이 부쩍 많아졌다. 연기관도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어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드라마 <하얀 거짓말>을 끝내고 연기 생활 중 처음으로 푹 쉬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래서다. 배우로서 자신이 소모되지는 않았는지, 비슷한 모습의 캐릭터만 맡아온 것은 아닌지, 그녀는 스스로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아끼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몸에 익은 습관이 어딜 가랴. 그녀는 쉬는 기간에도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고 기어이 친정엄마를 연기했다. “지금이 연기에 가장 목말라 있는 시기”라고 하니, 김해숙은 어쩔 수 없는 천상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