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영화사가 있다. 도중하차되어 영화사에만 남은 프로젝트들. 그 부재의 역사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나폴레옹>이 있고, 장선우의 <천의 고원>이, 팀 버튼의 <슈퍼맨 라이브>가, 제리 루이스의 <어릿광대가 소리치던 날>이, 그리고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가 있다. 그중에는 1964년 당시 촬영 3주 만에 도중하차한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전설적 작품 <지옥>도 이 시련의 장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칸에서 소개된 뒤 최근 <지옥에서의 로미>라는 책과 함께 DVD로 출시된 세르주 브롱베르의 다큐멘터리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 그 좌초사를 잘 그리고 있다. 거기서 우린 통제를 벗어난 영화의 거장 클루조의 놀라운 영상들을 되살려 보게 된다.
그 어느 것도 <지옥>의 운명을 최악의 상태로 몰아갈 거라 예정해놓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던 어느 지방 자동차 정비센터 주인이 질투의 소용돌이에 말려 끝내 아내를 살해한다는 아주 평범한 가정비극이다. 1960년대 초 많은 프랑스 작품들이 그랬듯이 <지옥>도 미국의 스튜디오(컬럼비아사)에서 제작하던 작품이다. <21번가의 살인자>(1942), <까마귀>(1943), <공포의 보수>(1953), <디아볼릭>(1955)을 만들었던 장본인 클루조는 당시 가장 거대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4년 동안 촬영을 중지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미국인들은 그를 영화로 복귀시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꽤 우쭐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정작 클루조 감독은 <지옥>에서 질투극 이상의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환상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소리와 색상을 비틀고, 반사효과와 혁신적인 특수효과를 창조하는 등 주인공의 광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영화의 기술적인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할 작정이었다. 클루조는 남자 주연으로는 당대의 스타 세르지 레지아니를, 여자 주연으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고 유망한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를 발탁한다. 비운의 황후를 그린 <시씨>의 어수룩한 역할에서 처음으로 대작을 만나게 된 로미 슈나이더는 연기에 혼심을 기울이기로 다짐한다.
클루조 감독은 먼저 시험 촬영에 들어간다. 몇 시간이고 계속되는 그 시험 촬영의 결과는 숨이 멎어버릴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파란색 입술의 로미가 전라로 등장, 그녀의 담배 연기는 분홍색 배경 위로 춤을 추고 있다. 온몸에 윤기가 흐르는 로미, 청동의 동상 로미, 셀로판지에 포장된 로미. 클루조 감독에 의해 로미 슈나이더의 피부는 불빛이 춤을 추는 채색유리로 탈바꿈한다. 이에 완전히 매혹된 미국인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영화에 자금을 무제한 제공하기로 한다! 그러자 감독은 현기증이 날 만큼 어마어마한 대규모의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어느 누구도 끝을 보지 못하는 작업 말이다. 그는 촬영 3주일이 지났는데도 겨우 몇 페이지 대본의 분량을 촬영했을 뿐이었다. 클루조는 컬러와 흑백으로 계속 촬영을 하는 두팀을 풀타임으로 전격가동하고, 도대체 무슨 작품을 찍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배우들과 기술담당자들을 괴롭히면서 영상 하나하나를 세밀히 공들여 손질한다. 결국 작품은 숭고하지만 두서가 없는 천만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나고 만다.
클루조는 결국 슈나이더와 다니 카렐 사이의 한 장면을 촬영하다 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지는데, 그 장면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감독은 용케 살아남았고, 1977년에 세상을 떴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어시스턴트, 배경 담당자, 스크립터들이 오늘날 다시 클루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을 존중해 마지않았던, 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그들의 대장. 모두들 마치 클루조의 광기, 자신의 예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무기력해진 어느 천재의 현기증을 이해했었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