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홍상수의 이야기 교육 [2]
2010-06-03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나폴리 모텔의 수박 껍질

<하하하>를 보면서 연대기적 순서를 그리기 곤란한 것은 홍상수가 늘 명징한 시간의 계시 방법을 회피하면서 연대기적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궁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홍상수는 네 인물의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 대해 벽에 걸린 달력을 통해 신호한 바 있다. <오! 수정>은 더 나아가는데,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이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시간 순서에 따라 앞과 뒤로 쪼갠 연대기적 구성을 택하고 있다. 문경과 중식의 11일간의 여정에 대한 시간적 연대기의 추론이 틀리지 않다면, <하하하>에서도 홍상수는 분리된 채로 제시되는 두 남자의 액션이 단일하고 일관된 연대기로 결합될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신호한다.

그렇다면 한사코 그 존재를 감추려고만 하는 이 신호들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이를 위해 두 단락에서 제시된 요소들 사이의 아주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밝은 눈을 가져야 한다. 주의를 기울일 것에 대해 은밀한 신호를 보내는 디테일은 특별한 강조없이 반복 또는 축적된 이후에야 그 중요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중요한 정보는 늘 버려진 듯 거기에 있다. 이를테면 6일째, 중식의 단락에서 우리는 나폴리 모텔에서 수박을 쪼개 먹는 중식과 연주를 본다. 수박은 바로 전날 잔뜩 성이 난 성옥과 마주칠 때 연주가 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큼지막한 수박을 갈라 먹는다. 이어지는 문경의 단락에서 이 수박은 시간의 전후 관계를 고지하는 증거가 된다. 정호와 정화가 나폴리 모텔 복도를 걷는 동안 방문 앞 쓰레기통에 삐죽 머리를 내민 수박 껍질이 보인다. 쓰레기통은 물론 홍상수가 의식적으로 거기에 둔 것이다. 프레임 내의 정보를 요약하면 정호와 정화가 나폴리 모텔로 들어간 시간은 중식과 연주가 수박을 모두 먹은 뒤에 발생한 사건이 된다.

또 다른 신호. 10일째, 여기에는 중첩되는 시간을 표지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호동식당에서 중식과 연주가 복국을 먹으며 큰아버지 댁 방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과 문경이 엄마에게 성옥을 소개하기 위해 호동식당으로 오는 시간은 중첩된다. 시간의 포개짐을 알리는 것은 중식의 단락에 등장하는 장 관장이다.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보이스 오버를 신호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장 관장은 중식과 연주에게 인사를 한 뒤 거울을 보고 퇴장한다. 문경의 단락으로 이행했을 때, 장 관장은 문경과 성옥이 호동식당에 당도하기 직전 호동식당의 문을 열고 나옴으로써 나뉜 두개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메신저의 역할을 한다. 순간 친절하게도 성옥은 “어, 장 관장 아저씨네”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확인시켜주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두 단락을 종합하면 중식과 연주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문경과 성옥은 호동식당 앞에 당도했다가 발길을 돌린 것이다. 중식과 문경의 에피소드에 공집합으로 등장하는 장 관장은 두 에피소드의 시간이 겹쳐져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순수한 ‘시간의 기호’이다.

<하하하>의 은밀한 시간 기호들을 여기서 모두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기호들이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처럼 그윽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홍상수는 여기서 중요한 정보와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고 하는, 정보의 위계에 설정된 습관을 전복시키려 한다.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정보는 아주 사소하다. 예컨대, 청계산에서 회고하는 과거 사건의 엇갈리는 라인들이, 몇개의 작은 예외(시간의 중첩)를 가지고, 단일하고 일관된 연대기를 형성하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확연한 시간의 기호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과 한여름의 변덕스러운 날씨, 무심한 대사, 아무렇게나 놓인 사물들이다. 아마도 <하하하>는 홍상수의 전작(全作) 중에서 가장 현란하게 의상의 교체가 이뤄지는 영화일 것이다. 마치 이것은 디자이너 홍상수의 패션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인물들은 매일 같이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 그날이 전날과 다른 날임을 무언으로 증언한다. 날씨도 매일 바뀌는데, 쨍쨍하다, 비가 오고, 흐리고, 바람이 불며, 비의 강도와 세기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부주의하게 흘려보내기 쉬운 대사들은 그것이 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지 않은 채 무심히 던져진다.

‘하나의 이야기’에 저항한다

오늘날 어떤 영화감독도 홍상수만큼 영화의 이야기성에 대해 깊게 사고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내러티브의 성립과 그 수용을 새로이 교육하려 한다. 진화와 통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화소(話素)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이야기 구축 방식에 기질적인 거부를 보이는 그는 전통적인 서사 양식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주변적이고 탈중심적인 요소를 통해 갱신된 서사의 체계를 만들어내려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하는데 홍상수의 영화를 체계로 해명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그의 영화들이 체계적으로 짜여 있지 않아서라기보다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홍상수가 체계화를 부인하는 방식에 따라 이야기를 구성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고정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변경시키는 홍상수의 태도는 여러 갈래로 생성돼나가는 내러티브를 지향한다.

홍상수가 만들어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늘 오인과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한편의 영화 안에서도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논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정확한 인식을 저해하는 오인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투쟁으로서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구성한다. 상투화된 인식은 지속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오! 수정>의 다의적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정’ 혹은 ‘교정’은 홍상수 영화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이다. 홍상수의 모든 이야기처럼 <하하하> 역시 타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겸허한 수정의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대상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제시된 내러티브 정보에 대한 관습적인 지각과 결별하고 이미 보았다고 생각하는 정보들을 꼼꼼히 맞춰봐야 하며, 중요한 듯 다뤄지는 것들을 의심하는 회의의 태도가 필요하다.

<하하하>는 홍상수식 내러티브 교육법의 최신 버전이다. 정성일은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는지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떻게 말하는지에 의해 무엇을 말하는지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한다. 홍상수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구조의 힘을 믿는 형식주의자다. <하하하>에서 그가 문경과 중식의 여행의 경로를 시간적으로 교차시키는 것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었다면, 두 남자의 화행의 경로를 그토록 절묘하게 시간 교차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 외양보다 덜 파편적이고, 단일한 연대기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어떤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이 도출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정한 행위, 아주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이야기의 논리에 의해 그릇된 사고나 믿음, 추정이 생긴다면 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 특권적인 서사의 관습을 깔아뭉개면서 홍상수는 관객에게 스토리 정보를 제시하는 프로세스를 철저히 통제한다. 사건의 누적과 갈등, 그 소진이라는 서사의 법칙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지 연대기적 순서의 교란만이 아니라 주류적인 서사 독법에 배어 있는 습관적인 패턴을 교정하려는 ‘교육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영화가 제공하는 많은 정보 가운데 우리는 극히 일부만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았다. 모든 정보가 다 가용적이지 않다면 선택과 배제는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이를테면 습관적으로 우리는 프레임 앞에 자리한 주인공의 말이나 행위, 액션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프레임 안의 위치는 정보의 위계를 가늠하는 첫 번째 척도이다. 디제시스적으로 중요한 액션은 늘 가운데, 앞자리를 배정받고, 내러티브의 흐름을 관장하는 중심적인 사건은 과잉 강조된다. 정보의 위계에 따른 계산적인 프레임 디자인은 흔히 ‘연출’이라고 불린다. 한 사건은 필연적으로 그와 연결된 다른 사건을 낳고 그 연쇄에 의해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뒤따른다. 홍상수는 ‘하나의 이야기’에 저항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프레임 내에서의 지정학적 위계에 저항한다. 예컨대 앞서 예시한 <하하하>의 10일째 에피소드에서 관객의 주목을 끄는 것은 교착 상태에 놓인 연주와의 피곤한 관계를 해소하기로 작정한 중식이 큰아버지에게 연주를 소개하기로 결정하는, 중심 인물들 사이의 대화이다. 하지만 이 서사 공간에서의 정보들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의해 위계화될 수 있는데, 프레임 앞을 부산스럽게 오가는 장 관장이 중식과 연주의 대화 내용보다 중요한 시간 지표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물며 홍상수 영화에서는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행인이나 아낙, 사물들이 측량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종종 그 역할은 금붕어이거나 개, 무구함 자체인 아기에게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밀통을 나누기 위해 나폴리 모텔 복도를 걸어가는 정호와 정화의 달뜬 걸음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 한구석에 찌그러진 쓰레기통의 수박 껍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주변적인 것들의 권력, <오! 수정>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요리사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시간의 기호들에 의해 성립되는 새로운 내러티브다. 버려지는 것들을 중심에 둔 이 혁신적 내러티브는 이야기의 권력 관계에서 떠밀려 있던 사소한 것들의 위대한 힘, 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생성되는 이야기의 질서를 꿈꾸게 한다. 핍박받은 사소한 기호들에 부여된 강렬한 생명력,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위계를 부수는 이 사해평등적 연출이야말로 홍상수 영화가 가한 전율적 충격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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