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죽음에 대한 애도, 가능합니까? [2]
2010-06-1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시> <하녀> <하하하> 속의 죽음이 남긴 질문

타자의 죽음은 현현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미자가 지은 <아네스의 노래>가 완결된 형태로 들릴 때, 그녀의 모습은 사라진 뒤다. 시를 읊는 미자의 내레이션은 어느 순간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가 투신했던 다리 위로 돌아온 영화는 스크린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소녀를 보여준다. 영화 도입부에 얼굴을 물에 처박고 흘러가던 주검이 영화의 마지막에 살아 돌아와 우리를 똑바로 응시한다는 것, 그 대비되는 이미지. 미자가 공기처럼 사라진 자리에 소녀의 육체를 위치시키며 영화를 끝내는 것, 그 자리바꿈. 실체를 알 수 없는 육체 덩어리가 환한 인간의 얼굴로 개별화되고,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당한 소녀가 언어를 되찾았다. 명백하게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게 이 소녀의 얼굴은 기어코 의미를 담아내는 얼굴이다. 말하자면 교감과 소통을 거부하는 불안으로 팽창된 <마더>의 김혜자의 얼굴과는 다르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에서 그 의미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얼굴에 감화를 받은 다른 평자들에게도 그런 것 같다. 소녀의 마지막 응시에 대해 안시환은 “기적의 체험”(754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직 관객의 체험에서 가능할 따름이라고 말하고 김영진은 “우리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가?”(754호)라고 묻지만,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얼굴이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견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눈여겨봐야 한다면, 그건 이 장면이 주는 압도적인 감흥 때문이 아니다.

앞서 내가 미자와 소녀의 고통이 영화적으로 긴장을 유지하며 마주보고 있다고 했을 때, 그건 미자와 소녀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는 시 혹은 시 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미자를 타자(의 죽음)와 마주하게 만들지만, 둘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중요했고 거기 고통이 들어섰다. 그런데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자, 미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녀가 들어선다. 타자와의 그 불가능한 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미자가 마침내 시를 완결한 순간, 타자의 얼굴은 영화적으로 상징화된다. 미자의 상징적인 죽음(그녀는 모든 걸 버리고 사라졌다)과 죽은 소녀의 상징화는 그렇게 교환한다. 이것은 주체의 불안한 얼굴에서 타자의 두려운 얼굴로의 이행일까. 주체가 타자가 되는 순간일까. 혹은 이것은 타자의 죽음을 영화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일까. 타자의 죽음이 어떻게든 돌아와 설명 가능해지는 것이 최선의 애도라는 걸까. 그 얼굴과 얼굴을 감싸고 바라보는 영화의 시적 태도는 우리에게 기억을 요청하는가, 결국 망각을 요청하는가. 내가 느낄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이 타인에게 있다는 실패의 깨달음이 중요한가, 타인의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과 요구가 중요한가. 혼란스럽다. 하지만 미자의 시와 소녀의 언어를 단숨에 일치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미자와 소녀의 자리를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영화의 마지막 결단만큼은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가 소녀의 얼굴을 쉽게 쳐다보기 어려운 건 그 순간 타자의 얼굴이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균열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해석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 얼굴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살아나서는 안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불러와서는 안되는 얼굴이 아니었을까.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이 시를 경유해서 숭고한 얼굴로 나타나는 순간을 기어코 보게 만드는, 혹은 보려는 영화의 혹은 우리의 욕망에 대해 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가.

<하녀>의 죽음, 스펙터클의 매혹?

<하녀>는 <시>와 달리 타자의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의 결단 그 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죽음을 읽기 위해서는 하녀 은이의 캐릭터가 좀 기이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한 인간이 분신자살을 감행할 때에, 그걸 보는 우리는 그런 절박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게 마련이다. 표피적으로만 보자면, 은이에게도 죽음의 이유는 충분하다. 억울하게 뱃속의 아이를 잃었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일터에서 쫓겨났다. 최상류층 주인집 사람들에게 하층계급인 은이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죽이든지,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 안에서 상징화되지 못하고 배제된 자는 스스로를 상징적 사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의문이 생긴다. 영화 전반을 통해 나타난 은이의 캐릭터는 그런 극단적인 행위를 선택할 만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임상수는 그녀의 전사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저택에 들어온 뒤에 보인 모습도 어딘가에 절실하게 매달리고 있다기보다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뿐이다. 말하자면 은이의 캐릭터는 하층계급, 여성, 하녀가 가질 만한 두텁고 복합적인 층위가 의도적으로 밀려 나가고 비정상적으로 투명해 보인다. 상징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징화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훈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욕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두드러지는 건 훈의 성적 욕망이다. 우리가 ‘하녀’에게 기대하는 전형성, 혹은 ‘하녀’를 끌어들인 영화들이 필연적으로 붙들고 있는 계급적 욕망, 아니면 계급의식이 은이에게는 거의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그녀의 분신자살 행위에서 남는 건 목적이 아닌 껍데기 같은 행위 그 자체뿐이다. 그녀는 도대체 왜? 은이의 분신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갑작스럽게 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행위의 극단적 형식을 채울 만한 내용물이 그 안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뱃속에서 살해된 아이가 행위의 계기가 되었을지라도, 그 죽음의 행위는 단지 복수심으로도, 계급의식으로도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은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가 진정 무언가를 욕망하는 자인지 확언할 수 없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면, 이것을 가장 순수한 차원의 행위, 즉 “행위를 위한 행위”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이것은 결단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결단하는 행위, 오직 “결단하기로 결단하는 것”만이 중요한 텅 빈 행위다. 선택할 수 있는 항(내용)들을 갖지 못한 자들, 결국 ‘선택’과 ‘비선택’ 사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지할 때 내리는 선택. 그렇다면 은이는 수많은 철학자가 칭송한 안티고네의 현대적 변주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호를 통해 크레온을 납득시키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권리만을 맹목적으로 요구하는 자, 스스로를 내던져 사회를 중지시키는 타자 그 자체, 그리하여 숭고한 존재인가? 아니면 그녀는 테러리스트인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의 목적이 물리적인 파괴보다 실질적 이득보다 공격의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데 있다면, 은이의 마지막 행위도 그러한가?

전혀 틀린 질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장면에서 은이의 행위가 급진적으로 읽힌다고 해서 그것이 <하녀> 전체를 영화적으로 지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일례로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적인 스펙터클로 만드는 은이의 선택과 은이의 스펙터클을 스펙터클화하는 영화적 선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급진성이 반드시 후자를 윤리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다. 둘을 구별하는 건 어려운 문제이지만, 영화가 죽음을 다룰 때 그만큼 근본적인 문제는 없다. 은이의 행위가 앞서 말한 텅 빈 행위이고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의도였다면, 영화마저 그 스펙터클을 텅 빈 눈으로 구경해서는 곤란하다. 그 행위가 전체 맥락 안으로 어떻게 단단하게 묶여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말이 <하녀>가 행위의 내용 혹은 의미를 더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그건 은이라는 캐릭터로 잘못 들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문제는 <하녀> 전체가 그 죽음의 장면으로 지나치게 소급되거나, 아예 반대로 그 장면을 너무 느슨하게 붙잡고 있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이는 영화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 장면이 주는 충격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리고 기필코 올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점도 인정하고 싶지만, 그때 영화가 타자의 죽음의 스펙터클 자체에 의존하거나 매혹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울 수가 없다. 그건 거대한 죽음의 스펙터클과 그 외설성에 개입하고 견뎌낼 만큼 영화에서 형상화된 삶의 힘이 치밀하고 중층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애도에 대한 세 영화의 세가지 자세

세편의 영화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살아내고 싸울 때, 우리가 그 안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든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든 세계를 비관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끌어안든 기억과 망각의 절박함으로부터 피해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시>는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애쓰는 영화다. 타자의 상징화를 무릅쓰고서라도, 아니 그래야만 애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하녀>는 애도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다. 상류계급은 상실한 것을 감추거나 상실한 줄 모르기 때문에, 하층계급은 상실할 무엇도 가진 적 없기 때문에 이 사회가 애도를 말한다면 그건 가짜다. 그리고 <하하하>는 애도를 몰라도 되는, 혹은 몰라야 하는 영화다. 죽음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행복에 밀착된, 늘 여기 물질로 현현한 무엇이기 때문에 만약 애도를 하게 된다면 죽음뿐만 아니라 행복도 보내야만 한다. 그렇게 세편의 영화 안에서, 그렇게 죽음과 애도를 생각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붙잡아야 할 것들과 떠나 보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이 봄의 남은 나날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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