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장편영화 다음에 꽤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장편 <폭풍전야>를 만든 조창호는 한국영화계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폭풍전야>는 개봉 당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데뷔작 <피터팬의 공식>이 특이한 정서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터라 이번에는 조창호가 어떤 것을 보여줬을지 궁금했다. 잊고 있다가 뒤늦게 영화를 찾아봤다. 역시 특이점이 있지만 그만큼 대중적인 외연은 옅은 영화였다.
<폭풍전야>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텔레비전 드라마 소재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 그만큼 통속적인 자극이 강한 상투형의 범벅인데 감독의 취향이 이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버무린다. 여주인공은 마술사 상병을 사랑한다. 상병은 실은 동성애자이며 그걸 안 미아가 상병의 애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상병은 미아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가고 거기서 수차례 탈옥을 시도한 수인을 만난다. 요리사 출신인 수인은 에이즈 환자는 출옥한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상병의 피를 받지만 출옥하지 못하자 탈옥한다. 상병의 부탁으로 미아가 운영하는 카페에 칸 수인은 거기서 주방장으로 일하며 수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환상적 리얼리즘이 아침 드라마와 만난 부조화
데뷔작인 <피터팬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금지된, 치명적인 사랑이라는 모티브에 죽음의 기운을 얹은 <폭풍전야>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위해 스토리를 강제한 흔적이 짙다. 논리적으로 무리한 부분을 억지로 밀고 나가며 마치 특정 상황에 처한 인물의 내적 심상을 풍경으로 펼쳐 보이기 위해 기능적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을 준다. 미아가 운영하는 카페는 세상의 오지처럼 거의 이웃이 없고 손님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인데 동시에 외부자들에게 완벽하게 노출된 투명유리창 안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이즈에 걸린 수인은 시한부 생명이며 미아도 마찬가지다. 수인은 쫓기고 있으며 미아는 스스로 유폐돼 있다. 수인과 미아, 그리고 상병 모두 거둬내기에는 깊이 박힌 심한 마음의 자상을 입고 있다.
조창호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인물들을 감싼 무기력과 출구없는 절망과 가끔 느껴지는 관능과 느닷없이 벌어지는 마술적 상황이 주는 놀라움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다. 영화 속 인물의 삶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철저하게 방기되어 있는데 그걸 채운 내용은 때때로 덧없는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쪽이다. 수인이 요리를 만드는 장면, 그 요리를 미아와 함께 먹는 장면은 공들여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상병과 미아가 보여주는 마술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로 벌어지는 일 같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이 아침 드라마와 만난 이 부조화 속에서 조창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 내내 생기없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연속극 연기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 미아와 수인 역의 황우슬혜와 김남길의 연기가 그냥 그랬던 것은 이 맥없는 이야기의 굴레에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역시 너무 전형화돼 있다. 가끔 이들이 자신들의 배역에 동화되어 연기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배우들을 정물처럼 배치하고 감독은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풍경을 각인시키려 한다. 화면의 물성을 포착하려는 이 노력은 영화감독 조창호의 재능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가 찍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인지도 모른다. 나른하고 무심한 풍경, 겉으로 심심해 보이지만 너무 초연해서 오히려 무섭고 잔인하게 다가오는 풍경, 비바람이 불 때만 비로소 억센 표정을 보여주는 풍경, 불행이 예정되어 있는 운명과 닮아 있는 풍경의 각인이 스토리를 지탱하는 명분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 풍경의 부분으로 가려 있으나 아주 가끔, 특히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그 풍경에 자신들의 뭔가를 새긴다. 오로지 진짜 마법으로만 성취 가능한 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해변 가득 날리는 색종이들의 흩날림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그토록 가라앉아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풍경에 묻히고 바람 속에 밀리기만 하던 인물이 이윽고 거기에 자신들의 자취를 새기는 것은 운명에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생명과 관능의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아름답고 인상적이지만 미로에 갇힌 발버둥처럼 보인다.
CF 같은 가공의 세계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조창호라는 감독이 이런 길을 택한 것은 유감이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상업영화판에서의 생존방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방식으로 복수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적 충격을 갖춘 이야기를 꾸미는 척하면서 거기 감독 나름의 개성을 새긴다고 하는 추상적인 명제는 실제로 증명되기 힘든 신기루 같은 것이다. 숱한 감독들이 실패했으며 성공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창호는 <폭풍전야>에서 상투적인 이야기에 비관적인 패배주의와 거센 영화적 에너지를 심고자 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모티브,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세상의 구석에서 유배당했거나 유배를 자청한 인간들, 루저의 삶에 무관심한 세상의 표표한 질서를 그려내는 것은 그의 취향이지만 상업적으로 용도폐기당하기 쉬운 그 상상력의 겉에다 그는 가짜 충격의 당의정을 입혀놓고 실은 알맹이는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어떤 정서만 갖고 영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삶의 이력이 전시되는 공간으로서의 풍경에 정서만 남고 나머지는 휘발될 수 있을까. <폭풍전야>의 배경이 된 해변가의 공간적 질감은 멋있는 외양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서너명의 등장인물들만으로 애욕과 상처가 전시되는 이야기를 펼치고 풍경은 이야기를 걸치는 긴 사다리 노릇을 한다. 실제의 풍경이 완전한 인공적 산물이 되는 순간들이다. 비관의 정서는 현실적으로 착목될 목침을 갖지 못한 채 풍경속에 떠도는데 이 CF 같은 가공의 세계는 마술이라는 모티브와 결합해 환상적 리얼리즘의 비약을 가능하게 할 것처럼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잔인한 상황의 도래와 그것을 치유하는 데 드는 시간이 이어지며 영화는 내내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영화적 제스처가 나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초월적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벌어지면 그걸 관객에게 기적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은 시효가 지난 듯이 보이는, 이 계열의 대표자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등장인물들의 총합적 에너지의 맥을 따라 펼쳐진다. 쿠스투리차의 <아빠는 출장중>과 같은 영화에서 주인공 꼬마의 비상하는 순간은 구체적이고 실증 가능한 듯이 보이는 일상적 사건들의 질감을 뚫고 나옴으로써 충격을 준다. 쿠스투리차의 근작들에서 더이상 그런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남용된 영화적 수사의 시효가 끝난 이유도 있지만 구체적인 현실의 실감을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닌, 가공된 영화적 장치로서만 기능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무분별한 경계 속에서 창조력을 이상한 방식으로 펼쳐낸 안타까운 사례이다. 재능있는 감독 조창호가 오랜만에 만든 신작에 대해 야박한 글을 쓰는 것이 미안하지만 이건 한 감독 개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영화계 전체의 불길한 사례로 재고되어야 한다. 영화에 대중적인 외피를 두른다는 강박이 의식적으로 일정한 자극을 배열하는 텔레비전 막장드라마식의 패턴을 모방하는 퇴행의 증거로서, 동시에 감독의 자율적인 상상력이 제한된 이야기 소재 범주의 굴레에 갇혀 낯선 방식으로 분출되는 증거로서, 창조적 표현욕구가 시장의 사이즈에 맞춰 예측 불가로 어그러진 사례로서 남을 것이다. 조창호의 실패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타협하거나, 아니면 자기 영역을 고수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당장 많은 이들이 보지 않는 개인적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볼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폭풍전야>는 어느 쪽으로도 자세가 잡혀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