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라이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드 SF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플라이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 조각을 꿰매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 가능성보다 특별히 더 높지 않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과학자들이 영화 속 주인공 엘사와 클라이브가 벌이는 실수를 그대로 반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긴 익숙한 장르 관객은 컴퓨터가 ‘인간+동물 유전자 합성 삐뽀삐뽀!’를 알릴 무렵부터 그런 기대는 접었겠지만.
SF라고 할까 막장드라마라고 할까
정말 딱 <프랑켄슈타인>이다. 빈센조 나탈리는 유전공학 시대를 무대로 자기만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이름마저 힌트가 된다. 엘사와 클라이브. 이들은 유니버설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배우들인 엘사 란체스터와 콜린 클라이브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 대부분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일어났다. 다양한 유전자들을 조각이불 만들듯 꿰매어 만든 드렌과 다양한 시체 조각들을 하나로 합쳐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비교는 너무 손쉬워 민망할 지경이다. 드렌과 엘사의 관계. 엘사의 애인인 클라이브와 드렌의 관계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부자 관계의 성전환한 거울상에 가깝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건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와 주제가 현실 세계의 과학보다는 장르 관습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빈센조 나탈리가 유전공학에 대해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건 <스플라이스>는 현실 과학과 그 위험성에 대해 생각처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스플라이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환상의 슈퍼 과학을 통해 과장된 가공의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서 ‘과학’은 ‘마법’으로 전환되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중요한 건 이 시치미를 뚝 뗀 비현실적인 도구가, 소재가 되는 인간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이다. 그것은 꼭 현실적이지 않아도 좋다. 그 연역과정이 얼마나 타당하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 인간을 잘 설명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과학이 아니라 멜로드라마다. 그것도 가족드라마. 빈센조 나탈리는 <스플라이스>를 통해 우리가 올해 텔레비전에서 보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막장 연속극들을 모두 모아서 쌓아올려도 그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막 나가는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현실세계만을 다루는 연속극 작가들은 결코 빈센조 나탈리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의 제한된 상상력과 현실이 길을 막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막장성은 기존 SF의 우주전쟁이나 시간여행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SF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SF의 도구를 타고 영화는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했고 갈 수도 없는 곳으로 간다. 단지 그 종착역이 다른 행성이나 다른 시간대가 아닐 뿐이다.
<스플라이스>가 다른 행성 대신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가족 관계, 그것도 모녀 관계가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의 끝이다. 이 영화에서 엘사와 드렌의 관계를 보자. 빈센조 나탈리는 시작부터 우리가 ‘어머니와 딸’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관념 저 너머의 지점에서 이야기의 터전을 잡는다. 엘사는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제공해준다는 기본적인 행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을 반대로 한다. 잉태하는 대신 잉태시키고, 보호하는 대신 이용하고 학대한다.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
영화의 모든 이야기들은 이런 식으로 부모 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심지어 영화가 깃발처럼 흔드는 ‘유전자 공학으로 탄생한 신종 생물에 대한 창조자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주제를 볼까?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과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는 훨씬 친숙한 주제로 치환된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건 언제인가? 바로 부모 관계와 임신이 개입되었을 때다. 왜 사람들은 우리의 몸이 모두 유전자 공장이며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인가.
엘사의 이런 위치는 자연스럽게 ‘나쁜 엄마’의 역할로 넘어간다. 하지만 엘사의 역할이 부정적인 여성적 스테레오 타입을 일부러 과장한 것이라는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오히려 반대다) 기능성을 따진다면 더 큰 의미가 있는 주제가 이미 있으며, 엘사의 역할 역시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플라이스>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창조주’로서 부모의 권리이다. 이는 서구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미신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주제이기도 했고, 그 이후 수많은 SF에서 복제된 주제이기도 하다. ‘나쁜 엄마’인 ‘미친 과학자’ 엘사의 위치가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SF영화에서 엘사의 위치는 아버지와 남성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역할은 겹치지 않는다. 이 역할을 여성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역할 전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과학이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처럼 계승되어오던 ‘창조주 아버지’에 대한 신화를 무심히 깨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탈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역할을 여성인 엘사에게 주는데, 그 부정할 수 없는 생물학적 정확함은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부모의 위치가 바뀌면서 드라마도 변화한다.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다룬 일반적인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대부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누가 권력을 잡아 신의 위치를 지키거나 차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 권력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 좀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의 영역이다. 이 역시 기본 골격은 익숙하다. 영화에서 드렌이 펼치는 모든 이야기는 “왜 엄마는 날 이해 못해!’라는 10대의 절규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는 익숙한 순환의 미신을 깬다. 엘사는 끝끝내 드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한 딸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나쁜 엄마’인 엘사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딸’인 드렌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약간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해도 둘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타자이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엘사가 드렌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가두려 해도 드렌은 늘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
드렌의 이야기는 이 이해불능 사태를 극도로 과장한 잔인한 코미디 시리즈다. 엘사와 클라이브는 드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이며 딸인 존재를 익숙한 틀에 넣고 해석했다가 그것을 깨트리고 다음 틀에 넣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늘 불완전한 해답만을 제공해줄 뿐이며 드렌은 늘 이해 불능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것은 부모에게 최악의 악몽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그들의 연속이길 바라고 성장 과정의 불이해는 순환의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탈리는 드렌과 엘사의 관계를 그리면서 그 미신을 하나씩 발로 밟아 으깬다. 영화 후반에 이르면 드렌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학대들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엘사의 폭력적인 대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엘사에게는 드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방법이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아마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는지도 모른다.
아까 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과학이 아니라 그를 매개로 발생하는 멜로드라마라고 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스플라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에 대한 영화다. 단지 그것은 유전공학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과학의 추구와 그 결과물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의 환상에 대한 은유이다. 나탈리가 <스플라이스>를 통해 거둔 최대의 업적은 이 익숙한 추구의 과정을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멜로드라마는 한없이 막장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다. 늘 경계선 밖을 탐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막장 아닌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면 우린 처음부터 이 막장 드라마의 가능성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