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에서 맡은 역은 이영지다. 영지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은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목격하는 여자다. <이끼>에서 유선의 첫 등장신과 대사는 이렇다. 마루를 걸레질하다 유해국(박해일)이 들어오자 말을 툭 던진다. “이 방 쓰실 분? 잘생겼네~.” 그때의 표정과 말투와 분위기가 꽤 신선하다. 이런 것도 연기변신이라 불러야 하나? 글쎄. 지적이고 차분한(<떼루아> <로비스트>), 씩씩하고 고집스러운(<작은 아씨들>), 착하고 순종적인(<솔약국집 아들들>) 인물까지 드라마에서 유선은 참 다양한 역들을 소화해왔다. 영화에선 사이코패스(<검은집>)도 연기했다. 그런데 <이끼>의 미스터리한 여성 이영지가 유선에게 대단한 변신과 도전이 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글쎄, 라고 운을 떼야 할 것 같지만 이렇게 말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유선이 강우석 감독을 만났다. 한동안 여배우와는 작업하지 않았던 강우석 감독이 유선을 택했다. “강우석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끼>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라고. 저도 <이끼>를 터닝 포인트로 만들고 싶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선이 <이끼>에 대해, 그 전과 후에 대해 얘기한다.
<이끼> 이전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학교 연극반은 안 들어갔어요. 중학교 연극반에 들어가서 어설프게 연기 배우는 게 싫어서 일부러 방송반 했어요. ‘난 어설프게 배우지 않으리라, 대학 가서 제대로 배우리라.’ (웃음) 초등학생 때부터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거든요. 당시에 좋아하던 김희애 선배님도 중앙대 출신이었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나오면 잘되는구나 싶었죠. 그런데 고3 때,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생긴 걸 안 거죠. 기존에 연극하던 배우들도 가고 싶어 안달하는 곳이고, 최고의 교수들을 초빙해온 학교라니 얘기만 들어도 너무 화려한 거예요. 그래서 시험이나 한번 보자 싶었죠. 그러다 최종합격까지 했어요. 날 인정해주는 이런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한예종 2기예요.
데뷔는 단막극으로 했어요. MBC 베스트극장. 그러고 나서 바로 미니시리즈 <그 햇살이 나에게>를 했어요. 그간 영화도 몇편 찍었는데, <검은집> 하면서 강신일 선배님한테 강우석 감독님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강우석 감독님 현장은 감독님의 진두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고. 또 강우석 감독님 현장에선 배우들이 모니터 확인 안 한다고. ‘감독이 오케이하면 오케이인 거지 내가 확인할 필요 뭐 있나’ 하시더라고요. 그건 곧 감독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배우가 영화를 찍어나간다는 거잖아요.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사실 여태껏 신인 감독님들의 입봉작만 했었는데 저도 그런 현장에서 연기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강신일 선배님이 <강철중: 공공의 적1-1> 촬영 들어간다고 했을 때 거기 여자 역할 없냐고, 나 좀 소개시켜 달라고 그랬어요.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역할이 없다, 강우석 감독님 작품엔 여배우가 없다고 하셨지만. (웃음)
<이끼>에서
캐스팅 나중에 들은 얘긴데, 영지 역을 놓고 신인들이 굉장히 오디션을 많이 거쳤다더라고요. <이끼> 대본이 완성되기 전이라 오디션 때 <검은집>의 ‘신이화’ 대사로 오디션을 치렀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차라리 신이화 역을 한 유선을 직접 만나보고 얘기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제작팀에서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남이 주선됐는데, 강우석 감독님은 뵙기 힘들더라고요. (웃음) 감독님이 낯을 많이 가리셔서 여배우들을 일일이 다 만나지는 않으신다고. 결국 연출팀 만나고, 제작팀 만나고 그러다 최종선상에 올랐을 때 감독님을 만나는 영광이 주어졌어요. 감사하게도 강우석 감독님이 첫 미팅 자리에서 바로 ‘잘해봅시다’ 하고 악수를 청하셨어요. 막 울컥 하는 거예요. 너무 어렵게 감독님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흔쾌히 오케이해주시니까 감동이 벅차오르더라고요.
이영지 만화 속 영지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실은 부담이 됐어요.(만화에서 영지를 묘사하는 한 대목은 이렇다. “예쁘다. 퇴폐적으로. 남자의 손길을 부르는”)그래서 테스트 촬영할 때 메이크업도 짙게 하고, 옷도 타이트하게 입고, 만화 속 영지를 재현해보려는 시도를 했는데 감독님께서 ‘난 영지를 그렇게 그릴 생각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팜므파탈적인, 치명적인 매력을 마구 풍기는 인물은 만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면서요. 그런데 저는 영지만의 매력을 풍겨야 되잖아요. 비주얼적인 시도들을 걷어낸 상태에서 표현하려니 어렵더라고요. 어떻게 영지만의 매력을 표현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는데, 해답을 완전히 찾고 촬영에 들어간 건 아니에요. 영지는 촬영하면서 만들어간 캐릭터예요. 저는 미스터리한 기운을 풍기고, 말수가 없고, 차분한 느낌의 영지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갔는데, 감독님은 좀더 적극적인 영지를 그려보자 하셨어요. 아줌마 같이 편안한 걸걸함으로 해보자고요. 마루 걸레질하다 대사하는 장면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고요.
정재영과 박해일 <이끼> 현장에선 다들 각자 자기 캐릭터에 몰입해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어요. 박해일씨도 항상 한쪽에 앉아서 콘티 보고. 그러면 정재영 선배님이 ‘야 그만 좀 봐. 공부는 집에 가서 하고 와’ 그러고요. (웃음) 다른 선배님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 대사들 되뇌고,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아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싶었죠. 정재영 선배님은 노인 분장하는 데 두 시간 반 정도가 걸렸어요. 노인 분장한 뒤엔 밥도 안 드셨어요. 수염에 음식이 묻으면 떨어진다고. 굉장히 유쾌하고 호탕한 분으로 알았는데 시종일관 캐릭터에 몰입하고 진지해서 처음에 선배님이 좀 어려웠어요. 알고 봤더니 분장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고, 사투리도 늘 신경 써야 해서 그랬다더라고요. 박해일씨는 저와 나이가 비슷해서 촬영하며 친구가 됐는데, 그 친구의 영화 경력은 저와 비교할 수가 없어요. 너무도 많은 작품에서, 그것도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지금까지 온 거잖아요. 그동안 내 경험이 너무 부족했구나 하는 안타까움에 한스럽더라고요. <이끼> 현장에선 제가 그야말로 풋풋한 병아리였어요.
<이끼> 이후
현재 진행 중인 강우석 감독님의 <글러브>에 정재영 선배님이랑 함께 출연해요. <글러브>는 농아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야구에 대한 꿈을 갖고 도전하는 이야기예요. 정재영 선배님은 현직 야구선수로, 저는 농아학교 음악선생님으로 나와요. 크랭크인만 했어요. 첫 촬영만 딱 해놓고 다시 <이끼>로 돌아왔죠. 감독님께 왜 이렇게 급하게 크랭크인하냐고 물었더니 각오를 다지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지금은 <이끼> 개봉에 집중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갈 곳을 마련하고, 또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거라고. 그래서 스타트만 살짝 해놓았어요. 요즘은 세고, 에너지 넘치는 캐릭터보다 편하게 힘을 풀고 하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싶어요. 연기할 때 표현 방법이나 느낌도 조금은 가벼워져야 할 때인 것 같고요. 앞으론 그런 시도를 하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