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금기를 깬 주체는 누구인가?
2010-07-29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내게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스플라이스>

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사 하나. “What’s the worst that could happen?” 영화에서는 그때그때 다르게 번역되었던 거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번역은 영화의 엔딩 부분이다. 제약회사 사장이 엘사(사라 폴리)에게 계약에 대한 의중을 물었을 때, 드렌의 아이를 임신한 엘사는 이 대사로 답하는데, 자막에는 “갈 데까지 갔으니까요”라고 표현되었다. 난 이 번역이 참 좋았다. 왜냐하면 <스플라이스>는 이 자막 말마따나 더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가보는 영화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금기를 넘나드는 자극적인 설정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스플라이스>는 선정적 장면의 전시나 자극적 설정에 매몰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이 다른 후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영화 엔딩을 보며 연작을 기다리는 입장에 서기로 결정한 이유이자 <스플라이스>에 대한 (다소 늦은) 평론을 쓰는 이유이다.

무섭지만 아름다운 이끌림

드렌(델핀 샤네크)을 더이상 연구소에서 몰래 키울 수 없게 되었을 때, 엘사와 클라이브(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드렌을 엘사가 성장했던 외딴곳으로 옮긴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 드렌이 갑자기 도망치고, 엘사와 클라이브는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들이 드렌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입가에 피를 묻힌 채 토끼를 물어뜯고 있는 드렌의 모습이다. 이에 상응하는 장면으로 <스플라이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을 답답해하던 드렌이 집 바깥으로 뛰쳐나간 직후, 그러니까 드렌이 지붕 위에 서서 지금까지 감춰왔던 날개를 쫙 펴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스플라이스>의 영화 포스터의 홍보문구인 ‘무섭도록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관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이 장면만큼은 이 홍보문구에서 조금의 과장도 찾을 수 없다. 드렌의 욕망이 날개를 펴는 이 장면은 한마디로, ‘무섭도록 아름답다’. 이후 클라이브를 힘껏 껴안는 드렌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그 매혹은 지속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장면에 대해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거다. 빈센조 나탈리가 다른 장면이 아닌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드렌의 몸 안에 숨어 있던 자연 상태의 욕망이 날개를 활짝 펴는 이 순간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 장면의 연출 속에 빈센조 나탈리가 <스플라이스>에서 표현하려는 인간관의 실마리가 숨어 있다고 느꼈다. 자연 상태의 인간과 그 욕망에 대한 빈센조 나탈리의 입장은 이 장면의 연출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물론 드렌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녀가 인간의 DNA를 지니고 있는 이상 인간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토머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빈센조 나탈리의 이러한 인간관은 오직 생존의 문제만이 제기되는 극단적 환경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자연 상태의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을 내세웠던 <큐브>(1997)에서 이미 다뤄진 바 있지만, <스플라이스>는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그의 반복적 이끌림의 실체를 넌지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무섭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너무도 아름답다고, 그렇기에 자신은 그런 인간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빈센조 나탈리가 자연 세계의 욕망에 이끌린다는 것이 이를 윤리적으로 옳다라고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윤리적 판단 너머에 존재한다.

빈센조 나탈리에게 과학은 자연 상태의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는 그 반대로 사회 속 인간이 자연 상태의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장면은 드렌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엘사의 옷에는 ‘핵교환 연구소’(Nuclear Exchange Research and Development)를 약칭하는 ‘NERD’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물론 NERD라는 영단어는 멍청이나 얼간이를 뜻하고, 이는 과학을 조롱하려는 빈센조 나탈리의 유머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단어를 뒤집어 드렌(Dren)이라는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이 언어적 유희는 단순한 조롱에 머물지 않는다. 드렌은 과학적 욕망의 이면이다. 엘사와 클라이브를 통해, 빈센조 나탈리는 겉으로는 거창하고 윤리적인 목적을 내세우는 과학적 욕망의 이면은 자연 상태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면을 ‘감히 알려고 하라’로 대변되는 근대적 욕망의 외설성이라고 해도 좋다. 즉, 드렌은 과학적 욕망의 이면으로서 그 외설적 결과물이다.

이는 엘사와 클라이브가 수많은 제약 속에서 제약 회사의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라는 제약에 의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한다. 반면에 자연 상태의 욕망은 완전한 자유의 영역이다. 드렌의 창조 과정은 이러한 제한 너머의 자유를 추구한 결과이다. 물론 (프레드와 진저의 사례나 드렌이 남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암시되듯이) 그 자유가 갖는 최악의 상황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전쟁 상황이지만, 우리가 과연 완전한 자유가 주는 매혹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사회 속 인간이 자연 상태의 욕망을 거부하는 이유이자, 그에 무릎 꿇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자유, 하지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전쟁 상황의 충돌, 그 모순의 결과가 드렌의 날갯짓이 아름답지만 무서운, 무섭지만 아름답게 묘사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옷을 벗는 자는 누구인가

자연 상태의 인간, 그 자유의 영역에 대한 이끌림이 빈센조 나탈리가 B급영화 영역에 머무는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빈센조 나탈리의 이러한 태도는 엘사와 클라이브에게도 반복되는 특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플라이스>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제 막 탄생할 프레드를 확대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프레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빈센조 나탈리는 프레드의 모습을 보여주기 이전에 프레드의 시점숏, 그러니까 프레드를 감탄하며 바라보는 인간들을 향한 프레드의 시선을 담는다. 빈센조 나탈리는 <스플라이스>에 등장하는 시점숏을 엘사나 클라이브보다는 주로 드렌의 것으로 연출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드렌의 망막에 엘사의 모습을 새기는 장면이다. 드렌의 눈에 각인된 엘사, 그리고 빈번히 드러나는 드렌의 시점숏은 <스플라이스>에서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스플라이스>는 창조주 인간을 닮아가는 피조물이 아닌, 그 반대로 피조물을 닮아가는 창조주 인간의 모습을 담으려 한다(영화 오프닝의 극대의 클로즈업과 프레드의 시점숏은 인간의 감춰진 욕망을 확대하여 보여주겠다는 시각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결국 관객은 자연 세계의 욕망 덩어리인 드렌에게 이끌리거나 부지불식간에 그(녀)와 닮아가는 사회 속 인간을 관찰하도록 종용받는다. <스플라이스>가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 세계의 인간이 사회 속 인간에게 동화되는 과정이 아닌, 그 역으로 사회 속 인간이 자연 세계의 인간에게 동화되거나 그와 동일한 욕망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엘사는 클라이브가 딸과 같던 드렌과 한몸이 되어 뒹구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마치 그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드렌을 ‘발가벗긴다’. 그리고는 드렌의 폭력성의 징표인 꼬리 부분의 날카로운 무기를 제거한다. 엘사가 벗긴 드렌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자신과 드렌을 가르는 경계,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비인간(사회 속 인간과 자연 세계의 인간)을 가르는 경계이다. 그런데 문제는 엘사가 이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드렌과 자신의 경계를 확정짓기는커녕 그 반대로 드렌의 폭력성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플라이스>는 사회 속 인간이 자연 세계의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이고, 그럼으로써 관객은 동일화의 대상을 상실하게 된다. 빈센조 나탈리가 관객을 불편하게 유도하고 있다면, 이는 동일화의 대상을 관객으로부터 빼앗아버린다는 점에 있다. 어둠 속의 관객은 자신이 믿고 따르던 대상으로부터 소외된 채 길을 잃는다.

<스플라이스>에 등장하는 여러 금기의 위반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영화의 초반부 이종교배 실험의 주체이던 엘사는 영화 후반부 남성으로 변한 드렌에 의해 이종교배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섹스신의 충격은 그것이 단지 근친상간과 이종교배라는 두 가지 금기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강도로 비교해볼 때, 이 강간신은 동일한 방식으로 금기를 위반했던 클라이브와 드렌의 섹스신에 비해 훨씬 강렬하게 체험된다. 즉 이 장면이 주는 감각적 충격과 불편함은 금기를 넘어섰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키면서 주체의 자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엘사는 과학자로서 이종교배를 실험하는 주체가 아닌, 이종교배의 욕망에 의해 강간당하는 무력한 객체로 전락한다. 엘사는 실험자로서 자신이 한 일을 피실험자로서 그대로 되돌려 받는다.

나의 문제가 나에게 돌아온다

끝으로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금기를 위반한 주체는 누구인가? 금기 위반의 주체에서 드렌은 제외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 세계의 드렌에게는 그 어떤 금기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금기를 위반한 주체는 엘사와 클라이브 등의 사회 속 인간에 한정된다. 과학적 금기뿐만 아니라 근친상간의 금기를 침범한 것은 드렌이 아니라 엘사와 클라이브다. 그런데 <스플라이스>는 금기를 넘어서는 원인에 대해 인과율적 설명을 생략한다. 클라이브가 드렌에게 이끌리는 순간에, 그리고 남성으로 변한 드렌이 어머니를 강간하며 자신의 소유물이라 주장하려 할 때에도 그것은 (자연 세계의) 욕망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지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드렌의 탄생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드렌을 탄생시킨 것은 그 어떤 이유를 갖다붙인다 하더라도 과학적 욕망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엘사는 거창한 몇몇 이유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욕망에의 추구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후에 부여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플라이스>는 자연 세계의 인간과 사회 속 인간을 나누는 경계를 허물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는 애초에 ‘색다른 한쌍’으로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엘사와 클라이브의 섹스신은 제약 회사의 발표회 장면과 연결되는데, 이 발표회장 신은 제약회사 사장이 ‘색다른 한쌍’을 소개하겠다는 말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이 말은 프레드와 진저를 향한 것이긴 하지만, 신의 연결을 봤을 때 이 대사는 앞신의 섹스신과 은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딸이 지켜보는 앞에서 섹스를 나누는 엘사와 클라이브라는 색다른 한쌍뿐만 아니라, 부인과 사랑을 나누며 딸과 은밀히 시선을 교환하는 클라이브와 이를 지켜보는 드렌이라는 색다른 한쌍 말이다. 물론 이 색다른 한쌍은 엘사와 드렌, 드렌 내부의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엘사와 그녀가 잉태한 아이 등으로 지속적으로 증식된다. 물론 이 영화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색다른 한쌍은 사회 속 인간과 자연 세계의 인간이라는 한쌍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타자간의 관계가 아니라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한쌍이다.

<스플라이스>는 외부의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의 욕망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와 싸우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것이 과학자로서의 욕망이든 부모로서의 욕망이든 남성으로서의 욕망이든 간에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내게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드렌을 두고 성찰을 위한 맥거핀이라 불러도 좋다. 즉, 드렌은 단순히 나 외부의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이 투영된 거울이다. 빈센조 나탈리는 이 거울 앞에 엘사와 클라이브를 세운다. 그리고 그 거울 속 자신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지 묻는다. 결국 <스플라이스>가 제기하는 윤리의 문제는 자연 세계의 욕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사회 속 인간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스플라이스>가 온갖 금기를 넘어서며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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