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유해진] 나는 나를 채찍질한다
2010-07-23
글 : 이주현
사진 : 오계옥
<이끼>의 유해진

영화 <이끼>의 명장면 중 하나는 이장(정재영)의 오른팔 덕천(유해진)이 유해국(박해일)과 박민욱 검사(유준상)를 찾아가 이장의 비리를 무엇엔가 홀린 듯 쏟아내는 장면이다. 원작 만화에선 눈알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지는 덕천의 모습이 섬뜩하게 묘사된다. 만화이기에 가능한 묘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유해진은 만화보다 더 폭발력있게 장면을 그려낸다. 두고두고 회자될 유해진의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유해진도 알고 있다. “그 장면이 배우한테 흔하게 오는 기회는 아니거든요. 그 신이 저한테 왔다는 게 복인 것 같아요.”

만화 <이끼>를 무척 재밌게 읽었다는 유해진은 마침 강우석 감독이 <이끼>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무슨 역이든 괜찮으니 저 좀 뭐 하나 시켜주십시오.” 그리고 유해진은 덕천이라는 인물을 받아든다. 원작에서 덕천은 약의 힘에 기대 어릴 적 트라우마를 지우려 하는, 우울하지만 조금은 모자란 캐릭터다. 영화로 옮겨오면서 덕천의 어두운 전사는 생략된다. 대신 순진하고 착하지만 어딘가 모자란 듯한 모습이 부각된다. “감독님은 덕천을 쉼표 같은 존재로 생각하신 것 같더라고요. <이끼>가 너무 숨막히게 계속 달리기만 하는 영화잖아요.” 확실히 영화에서 웃음이 터지는 순간은 유해진이 등장할 때다. 유해진은 표정 하나로, 대사 한마디로 피식피식 웃긴다. 그럴 때 그는 진정 코미디 배우 같다. 그러나 웃음은 앞서 말한 “발광하는 장면”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불안과 공포, 광기와 패닉에 휩싸인 덕천을 유해진이 연기할 때 관객은 더이상 웃을 수 없다.

“발광하는 신에 대한 심적인 부담이 있었죠. 그 신은 부담이 되니까 촬영 날짜가 잡히면 시간을 좀 주십시오, 하고 감독님께 부탁드렸어요. 준비할 시간이 너무 촉박하면 안되니까. 감독님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하라’며 믿음을 주셨어요. 사실 그것만큼 막막한 얘기도 없는데…. (웃음) 어쨌든 덕천의 감정을 찾으려고 혼자 제주도에서 2주일 동안 머물렀어요. 제가 걸으면서 연습하는 버릇이 있어요. 생각해야 하고, 소리 지르면서 연습해야 해서 연기 연습할 때 아무도 없는 들판을 자주 찾아가요. 이번엔 제주도의 넓은 목장을 계속 걸어다녔어요. 집 밖에 나갈 때는 하얗던 운동화가 집에 들어올 때는 까매졌죠.”

연습과 실전은 또 다르다. 아무도 없는 넓은 공터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과 수많은 스탭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사를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한번 NG를 내기 시작하면 발음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엇박자가 나서 정말 힘들어지거든요. 그래서 달달달 연습했어요. 결국 한번에 끝냈는데, 연기하고 나니까 어질어질하더라고요. 에너지를 쭉 써버리고 소리를 무지하게 질렀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더라고요.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어요.”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현장 여기저기선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촬영 현장이 연극 무대도 아니고, 스탭이 관객도 아닌데 말이다.

덕천이라는 인물이 유해진에게 그냥 굴러들어온 복은 아니다. 유해진은 스스로에게 엄격한 배우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했으니 연기 경력만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슛 들어가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오늘 찍을 게 이거니까 내 준비는 다 됐어’ 이런 게 아니라 ‘그래도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슛 들어갈 때까지 뒤에서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시간을 가져요. 촬영 들어갈 때까지 손에서 안 놓으려고, 뭔가 다른 걸 찾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연기와 관계된 일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 답을 구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가 준비한 것, 생각한 것을 사전에 감독님과 상의하든지, 슛 들어갈 때 표현하든지 해요. 그래서 아니라고 하면 다시 가는 거예요. 지적받는 게 무서워서 제 방식을 버리진 않아요. 그렇게 해서 새로운 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이끼> 촬영 때도 그랬다. 유해진은 촬영이 종반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강우석 감독을 “괴롭혔다”.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감독님 붙잡고 “제 생각은 이런데…” 했다고.

배우의 일이 본래 갇힌 글을 살아 꿈틀거리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유해진은 그런 면에서 발군인 배우다. 유해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대중의 가슴에 새긴 작품들, <왕의 남자> <타짜>를 떠올리면 쉽다. 그는 긴 대사도 술술 맛깔나게 풀어낸다. 어미 하나, 감탄사 하나하나를 있어야 할 제자리에 딱딱 넣어 말한다. 그런데 평상시의 유해진은 정 반대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서 자기 자랑은 옆에서 쿡쿡 찔러야 겨우 한두 마디 한다. “부족한 점도 많고”라는 말이 겸손이 아니고, “작품 안 들어올 때가 고비”라는 말이 엄살이 아니란 얘기다. “예전에 <무사> 할 때 안성기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배우는 해보니까 기다림의 작업 같다. 그 기다림을 어떻게 기다리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전 그 말이 아직도 기억나거든요.”

유해진이 <이끼> 다음으로 선택한 작품은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와 박건용 감독의 <적과의 동침>이다. <이끼> 개봉을 일주일쯤 앞두고 <부당거래>는 크랭크업했고, <적과의 동침>은 크랭크인했다. <부당거래>에서는 질 나쁜 건설사 대표로 <적과의 동침>에선 <이끼>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 중 한명으로 출연한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은 “내일 모레 촬영에 들어가는 <적과의 동침>에서 그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라고. “이러면 만날 연기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재수없을 수도 있는데(웃음), 쑥쑥 지나가는 게 그런 고민들이에요.” 서른다섯살 이후에는 멀리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지만 조금씩 앞으로, 조금씩 멀리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고민들 때문이리라. “에너지가 너무 소진됐다, 내가 너무 나태해졌다 싶으면 스스로를 좀 괴롭혀요. 여행도 편한 여행이 아니라 힘든 여행을 하고요. 일부러 고통을 만들고, 그걸 극복하는 데서 오는 성취감으로 다시 에너지를 만들어요.” 스스로 마조히스트가 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꿈은 정말 없는데, 누구나 그렇듯 저도 행복이 우선이에요. 매 순간 행복이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행복한 삶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한마디 던졌다. “연애하시니 행복하겠어요.” 돌아온 대답은… “허허허, 이거 <씨네21> 인터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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