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뇌의 구조를 체험하라 [1]
2010-08-05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뒤를 향한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의 뇌의 영화 <인셉션>

<인셉션>에 대한 말들은 회의와 질문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을 고대한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이 영화는 불가사의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통해 거절하기 힘든 매력을 제공한다. 영화가 공개된 직후 쏟아진 많은 질문들 가운데 흥미를 끄는 주제는 놀란의 명철한 내러티브 조직이다. 복수의 서사 라인이 연결과 결렬을 통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다중 내러티브의 정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인셉션>은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내러티브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 교과서를 보는 듯한 꿈의 전경화, 추출과 기입이라는 실존주의적 테마, 실제와 가상의 벽이 무화된 세계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통찰, 심지어 꿈과 영화의 유사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메타 시네마적인 함의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은 90년대 초반 쿠엔틴 타란티노에 의해 본격화되었으며, 이후 새로운 내러티브 형식에 대한 나름의 해찰을 보였던 일련의 감독들에 의해 부단히 실험되고 있는 현대영화의 내러티브 언술방식에 초점을 둔다. 멀게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로버트 알트먼까지 거슬러 갈 수 있지만 데이비드 린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찰리 카우프먼, 그리고 박찬욱까지 포괄할 수 있는 내러티브 미학의 혁신에 대한 것이다. 관객의 인지는 어떻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러티브 구조에 적응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속에 <인셉션>의 참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꿈의 미로, 뒤집힌 인과율

형식의 차원에서 <인셉션>은 집요하게 우리의 뇌를 괴롭혔던 <메멘토>(2000)의 격상 버전이며, 더 올라가면 시간과 기억의 미로를 유영하며 혼돈을 준 <미행>(1998)의 확장판이다. 일기와 메모를 매개로 역전된 시간구조를 실험한 <프레스티지>(2006)와도 동류로 묶을 수 있다. 나란히 비교선상에 둘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셉션>과 <메멘토> <미행> <프레스티지>는 깊이 내통하는 구조적 친연성을 보여준다. <인셉션>은 누군가의 집에 침입해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그들의 생각과 특성을 알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내를 주인공으로 한 <미행>과 테마를 나누는 한편, 서사의 순행적 진행을 거부하고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역행 구조를 택했다는 점에서 <메멘토>의 구성적 모티브를 공유한다. 어떤 서사와 화자도 믿음을 주지 않은 ‘신뢰할 수 없는 내레이터'에 대한 관심과 메타 시네마적 함의라는 측면에서는 <프레스티지>와 연결된다.

구조적으로 절개된 <인셉션>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수수께끼 퍼즐이다. 겹구조의 꿈을 탐사하며 순행과 역행을 거듭하는 이 영화의 다중 내러티브는 꿈의 국면으로 설정된 스토리의 이전 단계들을 기억해내도록 돕는 단서들에 의해 밑그림이 그려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놀란은 최고수일 뿐 아니라 타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퍼즐은 해결을 요구하지만, 관객은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기 쉽지 않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가 단기 기억손실증을 극복하기 위해 끼적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모와 몸에 새긴 문신,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묘사하는 데 있어 놀란은 언제나 기억의 모티브가 되는 작은 사물들의 회로를 구성한다. <인셉션>에서 기억을 환기하기 하는 연상기호들은 여럿인데, ‘528491’이라는 숫자가 대표적이다. 여자로 변신한 ‘페이크 맨’ 임스가 피셔에게 적어준 전화번호 528491은 무중력 액션이 벌어지는 호텔 방의 번호 ‘528’로, 금고 번호 528491로 꿈의 단계마다 모습을 달리해 나타난다. 꿈으로 진입하기 전에 보여진 아버지와 찍은 피셔의 어린 시절 사진, 부상으로 인한 사이토의 피 등 이미 보여진 디테일의 반복은 꿈들이 맺는 인과적 관계를 추론하도록 돕는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뒤집힌 인과율을 따르는 <인셉션>의 구조는 면밀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늘 사건의 ‘원인’이 아닌 ‘결과’이다. 꿈의 심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이미 설정된 결과의 원인을 역으로 더듬는 탐사의 과정이 된다. 역으로 단계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이와 통하는 <인셉션>과 <메멘토>에서 관객의 미션은 이미 공표된 결과로부터 미처 밝혀지지 않은 원인을 회고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놀란의 퍼즐영화들이 일목요연한 스토리로 해명되지 않은 것은, 이런 역행의 플롯을 통해 내러티브를 체험하는 관행화된 방식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인셉션>에서 관객은, 그리고 피셔의 생각을 되돌려 역행의 논리로 재구성해야 하는 코브 일당은 이미 나와 있는 결과(관객에겐 최초의 장면인 코브와 노쇠한 사이토의 만남이고, 코브 일당에게는 피셔에게 생각을 심어 기업합병을 저지하는 것)로부터 원인을 만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임무(추출이 아닌 기입)를 부여받는다. 코브와 친구들이 모의하는 꿈의 설계는 원인에 뒤따르는 결과를 추론하며 이야기의 꽁무니를 좇는 내러티브 구성의 고전적인 원리를 뒤집는 역전의 궤도를 따라 구축된다.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는 이야기. 파리의 도로와 건물이 용트림을 하며 뒤집어지는,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압도적인 이미지가 웅변하는 것처럼, 이것은 원인의 뒤에 결과가 붙는 순행적 이야기의 곡선을 구부려 이어붙인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시작과 끝을 상정한 지점적 사고를 벗어나 하나의 둥근 원 위를 순환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놀란의 퍼즐 내러티브는 ‘결과’로서 스토리보다 스토리를 구축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인셉션>이 이야기가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텍스트이며, 영화가 활성화하는 뇌의 작용에 대한 것이라는 근거도 여기서 출발한다. 놀란의 구조적 내러티브는 서사를 구성하는 관객의 인지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고안된다. ‘앞을 향해 전진하는 이야기’라는 영화 내러티브의 기본을 거스르며 플롯을 거꾸로 돌리는 구조는 연대기적 내레이션과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혼용하면서 구조의 효과를 발휘한다. <인셉션>은 꿈속의 꿈이라는 설정을 하고 있지만 플롯을 체험하는 동안 관객은 그것을 시간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미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테면, 코브가 해변으로 떠내려온 도입부는 시간상 언제에 해당하는가? 코브와 그의 아내 맬 사이에 놓인 미스터리는 과거 어느 시점에 발생했는가? 코브가 비행기에서 눈을 뜨는 순간은 현재인가? 따위의 질문.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결과를 통해 원인을 추체험하는 뒤집힌 인과율을 통해 시간을 추론하게 된다. 인과관계의 역전은 <인셉션>의 서사를 결정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꿈의 통제가 ‘추출’에서 ‘기입’으로 전환되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기억의 심층으로 굴착해 들어가면서 미스터리의 심연을 파들어가는 <메멘토>의 원리가 적용되기 시작하는 지점도 여기서부터이다.

관객과 영화의 상호작용의 결과인 스토리의 구성 과정은 기억이 내레이션에 연루되는 방식을 사고하게 만든다. 이 연루의 방식에 있어서 놀란의 방식은 남달리 창조적이다. 꿈과 기억, 망상, 환영이 뒤섞인 <인셉션>의 이야기는 일관된 스토리의 형성을 꺼리는 플롯에 의해 흘러가면서 수시로 당황과 놀라움을 안긴다. “꿈은 늘 중간에서부터 시작하므로” 우리는 앞(발단)과 뒤(결말)가 잘린 불완전한 조각만을 경험한다. 이와 관련해 <미행> <메멘토> <프레스티지>처럼 <인셉션>의 관객은 주요한 서사 라인 안의 모든 사건을 이미 발생한 것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을 되돌리거나 인과율을 뒤집어 체험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추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단서들을 이미 발생한 사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놀란의 형식을 체험하는 곤경이 있는데, 꿈의 심층에서 어떤 단서가 ‘의미’를 얻을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예컨대 528491 이라는 숫자)는 데 어려움이 있다. 첫 번째 사건 뒤에 두 번째 사건을 경험하는 것에 익숙한, 순행적 시간과 인과율에 따라 시간을 체험했던 이들에게 그가 제시하는 삽화적 기억 혹은 꿈의 부호화 시스템은 지난한 탐사의 수고를 요구한다. 관객은 사건들 사이의 시간적, 인과적 연결을 구상해야 하며 기억의 기능을 활용해 꿈의 미로에서 나가는 출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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