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인생 최고의 아이러니
2010-08-12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테이킹 우드스탁>이 거대한 혼돈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끌어안는 법

어린 시절, 풍문으로 들은 우드스탁 록페스티벌은 전설이었다. 리안이 재현한 <테이킹 우드스탁>의 미덕은 전설을 신화화하지 않고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드스탁에 참여한 뮤지션들과 그들의 음악보다는 우드스탁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엘리엇이란 인물과 그의 가족사를 중심에 놓고 그 주위로 페스티벌 풍경을 폭넓게 배치한 구도로 영화가 완성되었다. 우드스탁의 대중음악사적인 위상이나 문화사적 의미는 다른 필자와 지면에 미루고 여102기서는 엘리엇 가족 드라마에 초점을 맞춰 보려 한다. 가족 드라마는 리안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제재이다. 록페스티벌과 가족 드라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를 조합시킨 영화가 <테이킹 우드스탁>이다. 남북전쟁, 헐크, 카우보이 등 미국의 역사와 대중문화를 자신의 영화 속에 담아온 감독이기에 우드스탁을 재현하는 일이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가족과 히피즘이 어떤 조화를 이룰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의 팽팽한 긴장과 그 틈새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인물들은 리안 영화의 매력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가장은 가족과 연인을 지키고자 비밀을 만들고 거짓말을 하며, <색, 계>의 여성 스파이는 상대를 배신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에 가장 충실할 때 사랑의 절정을 맞이한다. 근원적 부조리함을 견디며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긴장 속에 리안 식의 윤리가 존재한다. 그의 윤리가 때론 법과 규범에 배치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개인의 정체성이나 가족의 질서를 지키는 선택이다.

가족 드라마의 리안식 갈등 해결법

리안의 전작들과 연결시켜보자면 <테이킹 우드스탁>은 <쿵후 선생> <아이스 스톰>이 보여준 시니컬한 가족 드라마를 한결 부드러워진 방식으로 이어받으면서, <결혼피로연> <브로크백 마운틴>이 제공한 성 정체성과 가족제도의 혼전을 보다 단단한 태도로 해결하고 있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선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가정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내재된 구멍을 인정하는 리안의 자세는 훨씬 너그러워진 느낌이다. 1970년대 초반 미국 중산층 가정을 파고든 어두운 심연을 정말 음울하게 묘사했던 <아이스 스톰>을 떠올리면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결혼이란 제도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 자유로운 청년이 책임감 때문에 결혼을 하고(<라이드 위드 데블>), 낭만적 사랑을 꿈꾸던 아름다운 처녀는 실연의 처절한 상처를 겪고서야 안정된 가정을 이뤘던(<센스, 센서빌리티>) 리안의 전작에서 자유는 삶의 책임과 안녕을 위해 양보해야 할 가치였다. 부모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은 게이 아들이 등장하는 초기작 <결혼피로연>에서는 모두가 덜 상처받는 타협안으로 영화를 봉합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우회로도 거치지 않고 현실적 해결책을 찾는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가족관계 속에서 갈등을 해소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때 갈등은 해결된다.

엘리엇과 그의 부모는 3일간 열린 우드스탁록페스티벌을 통해 자유를 체험한다. 자신의 꿈을 뒤로한 채 부모의 일을 돕는 착한 청년 엘리엇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히피 커플과 어울려 대마초를 나눠 피우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상을 제공한다. 애니메이션 처리된 영롱하고 찬란한 배경 화면은 엘리엇이 느끼는 자유롭고 몽환적인 감각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돈만 아는 고집스러운 엄마와 무기력한 아버지는 우연히 약물이 섞인 케이크를 먹고 마치 생애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는 사람들처럼 빗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이런 에피소드에 법적, 도덕적 잣대를 대는 건 잠시 미루자.

우드스탁이 열린 1969년은 바야흐로, 베트남전 반전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자연회귀를 주장하는 히피즘이 만발한 때임을 기억하자. 약물에 취해 기분 좋게 잠든 부모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엘리엇은 흐뭇함을 느끼지만 다음날 아침 이들 가족은 적나라한 서로의 실체를 보게 된다. 20년 동안 가족 몰래 모아둔 돈다발을 껴안고 자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 아버지와 아들은 말을 잃는다. 자식은 꿈을 포기하고, 삶의 유일한 터전인 모텔이 차압당할 위기에서도 자신이 모은 돈다발을 꺼내지 않았던 엄마를 보며 아들은 진짜 자유를 찾을 용기를 얻는다.

가족이라는 가치에 스스로 속박당했던 자신을 추슬러 꿈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돈다발에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엄마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아버지는 사랑을 말한다. 어떻게 저런 엄마와 40년을 살아왔는지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감정에 따라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한다.

<결혼피로연>에서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리안이 손쉬운 가족 휴머니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던 힘은 불편한 것을 직시하고 견디는 자세에서 나온다. <쿵후 선생>의 주 사부는 미국인 며느리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 차이나타운에 집을 얻는다. 거리를 두어야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행동으로 옮기는 주 사부에게 다소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해도 그의 선택은 옳다. 가족화합에 관한 <결혼피로연>의 장르적 봉합에서 <아이스 스톰>의 어두운 전망을 거쳐 <브로크백 마운틴>에 도달했을 때 리안은 유보하는 태도를 보인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 에니스는 “나는 맹세할게…”(I swear) 라는 말을 남겼다. 목적어가 상실된 이 문장의 답이 어쩌면 <테이킹 우드스탁>에 있는지 모른다. 엘리엇에게 친구가 말한다. “가족 문제야말로 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문제를 인정하는 건 해결의 첫걸음이다.

의무와 자유의 딜레마에서 괴로워하던 에니스는 아내가 지키는 지상의 가정과 동성 연인이 기다리는 산 위 쉼터 사이를 시시포스처럼 힘겹게 오갔다. <테이킹 우드스탁>의 엘리엇 역시 영화 초반에는 에니스처럼 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 우드스탁이라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해 짐을 벗어놓게 된다. 리안은 이번 영화를 통해 의무와 자유의 힘겨운 싸움터이던 가정에 자유의 자장을 좀더 넓게 부여하는 것 같다. 의무와 자유의 대결구도가 흐려지고 대신 자유라는 커다란 원리 속에 의무가 들어앉는 형국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 아름다운 혼돈의 역사여

데뷔작부터 아이러니라는 주제를 추구한 리안은 이번 영화에서 인생 최고의 아이러니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엘리엇의 고향 화이트레이크에서 열리게 된 건 연속된 우연과 우발의 결과다. 우연이 운명이 되는 조화야말로 인생 최고 아이러니다. 페스티벌 개최 전까지의 일들도 그렇지만, 비가 오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달리 페스티벌 기간 중 폭우가 쏟아져 음향기기가 고장나고 온 마을이 진창으로 바뀐 것 모두 계획과는 무관하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쓰레기로 뒤덮인 언덕을 바라보며 엘리엇은 “아름다워”(Beautiful)를 연발한다. 그리고 영화는 또다시 엘리엇의 시선을 통한 몽환적 화면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생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뮤지션들, 그들에 열광하는 히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록페스티벌의 끝에는 쓰레기만 남았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엘리엇은 아름다움을 본다.

엘리엇의 자유로운 정신은 쓰레기가 아름다움이 되는 마술을 부렸다. 자유로운 정신은 쉽게 규정하고 재단하지 않으며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꺼려한다. 대마초에 취한 히피족, 나체족, 물 한통까지 비싼 값을 받으며 이윤을 챙기는 마을 주민들, 폭우로 인한 감전사고, 진흙탕으로 변한 언덕, 50만의 인파가 뒤섞인 풍경은 혼돈이다. 20세기에 이런 혼돈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리안은, 태초의 어둠 안에서 세상이 창조되었듯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우드스탁이라는 거대한 혼돈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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