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승자의 패배
2010-08-19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마지막 장면을 중심으로 본 <이끼>를 말하다

(내가 이후 <이끼>라고 부르는 작품은 모두 강우석의 <이끼>이다). <이끼>를 보며 가장 의아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은 역시 그 엔딩이었다. 이는 그 반전이 원작을 훼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 어떤 배신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훌륭한 반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또는 감춰졌던 진실)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어떤 쾌감이 동반되게 마련인데, <이끼>는 그러한 체험이 불가하다. 왜냐하면 <이끼>의 반전은 내용이 아니라 결론이 반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엔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증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끼>의 엔딩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반전이나 사족, 또는 원작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삽입된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이끼>가 원작을 변주할 수 있었던 토대가 바로 이 엔딩장면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웹툰 <이끼>를 보고, 영화 <이끼>를 봤다. 그 이후 나는 <이끼>에 대한 남다은의 평론을 읽었고, 김영진과 강우석의 대담을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 개봉 전에 이미 웹툰 <이끼>를 읽은 독자, 달리 말해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나는 이미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색깔로 얼룩진 도화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이끼>에 대해 글을 쓰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는 굳이 하얀색 도화지가 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필요하다면 웹툰 <이끼>를 참고하면서 <이끼>의 엔딩에 접근해보려 한다. 이는 <이끼>를 원작과 비교하며 어떤 질적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엔딩장면의 함의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다소 돌아가긴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엔딩을 향한 여정이다.

유목형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

<이끼>를 보며 가장 이상했던 점은 류해국(박해일)을 류목형(허준호)의 아들로 규정하려는 반복적 태도였다. 상주 노릇을 하는 류해국에게 김덕천(유해진)이 던진 농담, 그러니까 ‘허준호’와 ‘박해일’을 똑같이 생긴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이 그냥 유머에 불과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후 류해국을 단순한 아들이 아닌 죽은 류목형의 살아 있는 귀환처럼 규정하려는 대사(죽은 류씨가 돌아왔다든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든가 하는)가 반복적으로 등장할 때 그것은 더이상 농담이 아니다. <이끼>가 원작의 주요 대사를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처럼 새로 쓰인 대사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한다는 점은 쉽게 지나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한 충분한 정보임에도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 과잉 속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원작과 비교해보자. 원작에서는 그 말미에 류목형이 류해국을 자신과 같은 놈일 거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영지의 회상장면이기도 하다). 즉, 류해국을 류목형의 아들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류목형 자신이며, 이는 마을의 비밀을 들춰낼 수 있었던 궁극적 동력이 두 사람의 유사성(또는 동일성)에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반복으로서의 아들.

하지만 <이끼>는 두 사람의 관계가 류목형이 아닌, 하성규(김준배), 진석만(김상호), 김덕천 등의 입에서 발화된다. 이는 두 사람이 부자관계라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의 어떤 ‘근성’을 건드렸다는 것 정도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제기한다는 뜻이다. 이는 원작에 없던 또 다른 대사의 삽입과 연관된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류목형에게 “죄, 죄 좀 그만 하세요”라며 따지는 대사. <이끼>는 류목형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렇기에 류해국 역시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류해국을 죽이려는 행위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원작에 비해 더 강조하고 있다. 물론 류해국이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건드렸다는 설정은 원작에서도 유추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강우석은 이를 영화 표면 위로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류목형이 그들을 구원하려는 행위가 그들을 구원하기는커녕 그들의 죄의식을 자극하면서 구원과는 다른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류목형의 무능함과 자기 착각(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더욱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류목형에 대해서만큼은 강우석이 원작의 윤태호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가혹하다.

이러한 변주에 대해 선과 악, 신과 악마, 구원과 복수, 가해자와 피해자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흐릿하게 하려는 원작의 의도를 좀더 강화한 것 정도로 환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류목형을 변화시킨 이유가 단지 그 정도면 충분한 것일까? 혹시 더 큰 그림의 일부로 그러한 변화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류목형의 구원을 향한 행위가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자극하는 아이러니 정도로 <이끼>의 변주를 환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영화에서 ‘가장 큰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바뀌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강우석은 원작에서 류목형에게 가장 핵심적이었던 설정 중 하나인 ‘자살 훈련’을 삭제한다. 그 결과, 류목형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아들을 호명하고 그로 하여금 마을의 비밀을 파헤치게 했던 주체의 자리에서 강제 퇴각된다. <이끼>의 류목형은 더이상 ‘가장 큰 그림을 그린 주체’가 아니다. 강우석이 보기에, 그 자리의 임자는 류목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각색 과정에서 삭제된 내용이 류목형과 관련된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류목형과 관련한 변화는 다른 변화들을 사소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는 그 자리의 새로운 임자로 영지를 지명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강우석은 류목형이 (원작과 달리) 완전하게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끝까지 남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런 거다. 왜 류목형에게 허락될 수 없는 그 자리가 영지에게는 허락되는가? 강우석이 영지에게 그 주체의 자리를 선물하며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하나씩 풀어가보도록 하자. 내가 <이끼>에서 난감했던 장면 중 하나는 ‘이끼’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웹툰 <이끼>를 읽으면서 이끼라는 제목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웹툰 <이끼>의 제목이 구체적인 어떤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누아르적 세계에 어울리는 음습함이나 싸늘함, 비정함 등의 정서를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반면에 <이끼>는 박민욱(유준상)이 류해국에게 냉소적으로 내뱉는 “납작 엎드려 살아. 이끼처럼. 조용히”라고 하는 것으로 이끼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려 한다. 강우석의 이러한 해석이 웹툰 <이끼>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원작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해석인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오해는 말라. 나는 지금 원작과 비교하며 강우석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웹툰과 다소 무관한 해석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끼’를 하나의 구체적 의미로 규정할 때 그것이 영화에서 어떠한 역할을 떠맡는가, 하는 것이다.

이끼 같은 삶

다시 말하지만, 강우석에게 이끼란 삶의 한 방식이다. 내 나름대로 그러한 삶의 방식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눈감고, 귀 막고, 입 닫은 채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삶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납작하게 엎드려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조용히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끼>에서 가장 이끼다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물론 하성규, 진석만, 김동천이다(표면적으로만 보면 영지 역시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끼처럼 살면서 그들 삶에 최고의 평온함을 맛봤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마을에 정착한 뒤 적당히 류목형을 속이면서 천용덕과 은밀한 달콤함을 맛보는 일련의 회상 시퀀스가 영화에서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고 느꼈다(류목형이 던지는 구원에 관한 질문은 그들에게서 이끼로서의 평온한 삶을 앗아가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끼의 존립 기반이 바위인 것처럼, 이끼로서의 삶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천용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러한 삶의 시작과 끝이 천용덕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가 바로 류목형이라는 점이다. 강우석은 이끼에 대한 이러한 정의 속에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끼로서의 삶을 속물적인 삶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산다. 김영진이 강우석과의 대담(<씨네21> 761호)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화의 인물들에게 일상적 질감들이 더해지면서 원작에 비해 현실적인 인물 같은 느낌이 더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천용덕이 마을을 건설하는 데 류목형을 필요로 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끼로서의 삶이 갖는 평온함은 이 둘이 함께 작용하며 만들어낸 외양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그 외양이 평온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 속은 썩어 있지 않냐고 말이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그렇게 분열된 삶이 이끼로서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끼 같은 삶의 최상 버전은 류목형의 원칙을 대의상의 명분으로 내세운 채, 그 이면에 천용덕의 원칙을 불문율로 결합하는 것이다. 류목형의 원칙이 우리의 목을 옥죈다면, (그것의 위반으로서) 천용덕의 불문율은 숨구멍을 열어주는 것이고, 류목형이 겉으로 드러난 법의 세계라면, 천용덕의 원칙은 보이지 않게 은밀히 유지되어야 한다. 천용덕과 류목형 모두 이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겠지만(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류목형은 자신의 상징적 지위와 역할을 실재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천용덕은 자신의 삶의 원칙을 보이지 않는 영역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류목형과 천용덕이 동전의 양면으로 기능할 때만 이끼의 평온한 공동체는 건설될 수 있다. 류목형이 자신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나, 천용덕이 만천하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자신들의 종말을 앞당길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끼 같은 삶을 이야기하는 강우석의 현실 인식은 무엇일까? 이러한 이끼 같은 삶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가, 아니면 류목형이 상징적인 죽음(천용덕을 해치려다 실패한 사건은 그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상징적 죽음의 장면이다)을 맞이한 이후, 천용덕으로 대변되는 불문율이 류목형의 자리를 대체한 채 자신의 지위를 고집하는 전도된 세계가 문제라는 것일까? 엔딩 전까지로 한정한다면, 강우석은 이끼로서의 삶 자체를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류해국의 격정적인 토로를 기억하자. 나는 이끼처럼 살 수가 없어요, 라는. (원작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면) 류해국이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문율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방인을 분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성문법은 잘 안다 하더라도 불문율까지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지식하게 군다. 류해국이 딱 그 짝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끼처럼 살 수 없다는 그의 토로는 나는 도무지 불문율을 따를 수가 없어요, 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박민욱이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면죄부를 줄 때, 그럼으로써 불문율을 거부한 채 나름의 승리를 거둔 류해국을 격려할 때, 강우석은 이러한 이끼 같은 삶의 위선은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류해국을 도우며 사건을 함께 해결했던 박민욱 역시 (검사 세계에서는) 이끼처럼 살다가 불문율을 깨트리며 개과천선한 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그 엔딩에서 뒤집혀버린다.

아버지(들)의 부활

<이끼>의 엔딩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끄는 것은 류해국의 얼굴 전체를 감싸는 어떤 정념의 표출이다. 그런데 나는 그 표정이 과잉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박해일의 연기가 과잉이라는 뜻이 아니다. 지금까지 류해국이 관객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고려한다면, 정념이 표출되는 이 순간 관객과 류해국간에는 어떤 간극이 발생한다. 류해국은 어떤 실체적 진실을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데, 관객은 그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물론 관객 역시 영화에서 가장 큰 그림을 그린 이가 영지였음을 알게 되지만, 그 그림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류해국의 얼굴에 드러난 정념은 관객에게 재빨리 그 간극을 채우라는 일종의 명령인 셈이다. 강우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관객과의 싸움”이다. 강우석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엔딩에 등장하는 시선의 교환은 강우석의 영화에서 무수히 반복되었던 그 특유의 직접화법에 상응하는 숏의 구성이며, 이는 그가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야 하는가? 그러니까 강우석은 어떤 그림을 그려놓고 관객과 싸우고 있는가? <이끼>에서 가장 큰 그림을 그린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지임에 분명하다. 남다은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씨네21> 765호), “영지는 큰 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남다은과 내가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그 다음 문장에 있다. 남다은은 영지가 “구원=복수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는 류목형으로 대변되는 선한 아버지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것을 지켜냈다고 이야기한다(남다은은 그 싸움을 통해 일궈낸 새로운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하지만 영지가 이끼처럼 살면서 느낀 삶의 진실은 구원과 복수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이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영지는 두 사람의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 아버지에 내재된 두 가지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었을까? 영지가 가장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깨달음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영지가 ‘천용덕의 방식’으로 ‘류목형이 꿈꿨던 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싶다. 영지에게 구원을 준 이가 류목형이고. 영지를 위해 복수한 이가 천용덕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말한다면, 이는 복수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가능하다. 류목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내세워 영지를 강간한 자들과 천용덕을 처벌하려 했던 것은 복수가 아닌가? 그러니까 영지가 천용덕에게 복수하는 것 역시 류목형의 방식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하지만 류목형이 ‘심판’이라 부른 것을 영지는 ‘복수’라 부른다. 신이 되려 했던 류목형이 ‘천용덕을 통해’ 영지를 강간한 자를 심판하려 했다면, 영지는 ‘류해국을 통해’ 자신을 강간한 자에게 복수한다. 그것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영지가 그린 그림이다. 류해국이 아버지의 분신이고, (남다은의 지적처럼) 그를 통해 죽었던 아버지가 더 강력한 이름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영지에게 있어 류해국이 어느덧 천용덕의 자리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영지는 (류목형의 가르침처럼)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단지 과거를 청산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실현시키는 중이다. 하지만 영지로부터 도래할 세계는 두 인물에게 구현되었던 아버지의 원칙이 영지라는 인물 하나로 통합되었을 뿐, 궁극적으로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영지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법이자 그것의 위반이기도 한 존재’로서 위치해 있다. 영지를 통해 아버지(들)는 더 강력한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다. 만약 영지가 이러한 결합체로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끼로서의 삶 이상의 그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결국 최종 승자는 이끼로서의 현실적인 삶의 원리이다. 이끼로서의 삶은 나쁘지만, 그것이 전도된 형태, 그러니까 류목형이 자신의 실재성을 주장하거나, 천용덕이 자신의 존재를 표면 위로 고집하는 것은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우리는 ‘더 나쁜 것’을 피해 ‘나쁜 것’을 택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이끼>는 이상을 지향하지만 숨통을 옥죄는 아버지와, 외설적이지만 우리의 숨통을 열어주는 아버지 중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영화가 아니다. <이끼>는 이러한 아버지의 양극단의 공존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존립 기반이라면, 당신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물론 영지의 시선 속에는 그 질문과 응답이 함께 존재한다.

그 질문의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반전이 불편하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엔딩 이전에 자신이 내렸던 결론을 일거에 무효화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반전은 류해국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해결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원상태로 다시 뒤집는 것(애써 뒤집었던 것을 다시 뒤집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엔딩 이전까지 승자였던 자가 패자로 몰락하는 순간이며, 지금까지 관객이 따라가며 응원했던 모든 것을 부질없이 흩날리게 된다. 자신이 부정했던 그 세계가 다시 재건되는 것을 바라볼 때의 허망함이야말로 류해국의 얼굴을 감싸는 정념의 원인이다. <이끼> 엔딩의 반전은 내용을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론과 주제, 그리고 그와 관련된 현실적 삶에 대한 태도까지도 단숨에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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