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문이 충분히 예상된다. 겨우 이것뿐인가,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네 토막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면 앞의 이야기를 좀 느슨하게 들은 것일 수 있다. <옥희의 영화>는 옴니버스 구조를 띠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옴니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내용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는 영화감독이라더니 ‘키스왕’에서는 영화과 학생이라 하고 ‘키스왕’에서 송 선생은 정교수인 것 같았는데 ‘폭설 후’에서는 시간강사라 하고, 그러면서도 앞의 남진구와 뒤의 진구는 전부 이선균이, 앞의 송 선생과 뒤의 송 선생은 문성근이 연기한다고 하고, 그렇다고 각장이 같은 인물의 현재와 과거로 나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거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이게 뭐냐, 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문제제기가 맞다.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알아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알아차린 다음에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립을 보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들은 누구인가. 결국 그 누구도 아니며 아무도 아니라는 느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느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오는 감흥은 말로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이라는 동일한 배우가 (남)진구, (정)옥희, 송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주문을 외울 날’에서 ‘옥희의 영화’까지 네 차례나 연기하는데 장마다 그들이 사실 전부 다른 존재들인 것 같다가도 다 이어놓고 보면 또 무언가 연관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여간에 애매하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서 일인이역 또는 그런 착각을 주는 이미지를 본 적은 있으나 이건 뭔가 이상해도 훨씬 더 이상하다.
이때 두 가지를 환기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1장, 2장하는 식으로 차례대로 나누는 대신 각장의 소제목을 차례대로 표기했는데 그건 홍상수의 방식이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를 본 날, 문득 영화사의 오래된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프랑스 감독 장 뤽 고다르가 전통적 이야기 기법(기승전결)을 벗어난 영화를 만들어 이목을 끌고 있던 초창기에 유명한 선배 감독 조르주 프랑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고다르씨, 당신도 당신이 만드는 영화에 처음과 중간과 끝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다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조르주 프랑주의 질문은 옳은데 고다르의 대답은 더 옳다. 고다르와 홍상수는 서로 다른 예술가이지만 배열의 자기 순서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것 같다. 유심히 본다면 <옥희의 영화>에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홍상수가 이 영화를 <옥희의 영화>라니까 따라서 <옥희의 영화>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홍상수는 마지막에 놓은 ‘옥희의 영화’라는 소제목을 지금 이 영화의 전체 제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부터 시작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끝난 부분이 전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어디가 시작이고 중간이고 끝인지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하하하>의 한 토막을 환기하는 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하하>에서 시인 정호(김강우)가 성옥(문소리)에게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이대며 이게 뭘로 보이냐고 성질을 냈을 때 성옥이 꽃이라고 하자 정호는 꽃이 아니라며 뭐냐고 다시 묻는다. 성옥은 그때 현명하게도 다른 대답을 찾는다. “이름도 아니고 예쁜 색깔도 있고 모양도 있고 자기가 살려고 하는 그런 것도 보이고 그런데 꽃의 마음은 안 보이네요. 내가 사랑하는 거지요. 꽃을”이라고 한다. 꽃이라는 ‘존재’를 보는 정호와 성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정호는 이 사물이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고 성옥은 아예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서 이 사물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아닌가로 대답하고 있다. 성옥식으로 <옥희의 영화>를 보는 게 좋겠다. <하하하>의 이순신(김영호)은 더 간명하게 물었다. 그는 나뭇잎을 흔들며 문경(김상경)에게 묻지 않았던가. 넌 이게 뭘로 보이니. 문경이 나뭇잎이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나뭇잎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뭔지 아는 건 또 중요한 게 아니라고도 했다. 홍상수는 지금 우리 눈앞에 대고 이선균, 정유미, 문성근을 흔들며, <옥희의 영화>를 흔들며 이렇게 묻고 있다. 여러분 <옥희의 영화>가 뭘로 보이시나요. 역시나 우린 몰라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원래 모르는 거다. 그냥 다르게 좀 느끼고, 그리고 감사하면 그게 끝이다”(<하하하>의 이순신”, 아니 “원래 이 세상에 중요한 것들 중에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다”(‘폭설 후’의 문성근).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홍상수, 門을 제작하는 사람
느껴야 할 것은 <옥희의 영화>에서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중요한 무언가라는 점이다. <옥희의 영화>가 어떤 잊지 못할 오롯한 느낌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건 규정할 수 없는 그 활동성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명사형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다가도 동사형으로 접근하고자 할 때 무언가 훅 하고 느낌상 다가올 때가 많은데, 앞서 초현실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실은 그의 영화는 활동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초활동적이라고 불러야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홍상수 영화의 그 활동이 얼마나 첩첩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에 관한 활동의 모형을 한 가지만 말했으면 싶다. 나는 ‘도형인’ 홍상수의 영화에 관하여 기하학적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고 있다(“비평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대수학이라기보다는 기하학의 구도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정성일). 하지만 그의 기하학이 유클리드적인 기하학에만 관여되는가에 대해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인물들 사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유클리드적인 방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정성일).
<옥희의 영화>에 관한 한 홍상수의 기하학은 유클리드적이지 않고 프랙탈(Fractal)적인 것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아마 당신도) 과학적 개념에 유능하진 않으니 프랙탈이라는 용어를 더 섬세하게 말하고 치밀하게 쓰기보다 자연의 활동하는 모형에 대한 일단의 인상으로서 받아들여 말하고 싶다(그러므로 그림3 참조). 가령 삼각형 안의 중첩된 삼각형들, 눈꽃송이, 난류, 동양회화의 어떤 붓놀림, 그러니까 닮은꼴 도형이나 이미지가 끝없이 연쇄를 만드는 것인데, 이때 프랙탈한 것의 성질로서 중요한 건 이 유사한 도형이나 이미지들이 접고 펴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무한정으로 자기를 새로 조직하고 자기 발생적인 비정형적 활동이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어렵다. 그럼, 우린 홍상수식으로 이해하면 된다.‘첩첩심상’(疊疊心象). 이선균들, 정유미들, 문성근들은 말하자면 겹치고 펴지며 전개되는 프랙탈적인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라는 첩첩심상에 해당할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 프랙탈한 초활동성 또는 첩첩심상의 어떤 핵심적 모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칫 딱딱한 개념설명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고 자세히 풀어내자면 별도의 장이 필요하고 또 그럴 능력에도 못 미치니 우린 이쯤에서 본래 궤도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낯선 용어를 꺼낸 데 절실한 이유가 있음은 말하고 싶다. 홍상수의 영화가 프랙탈적인 초활동성을 지녔다면, 이때 그의 영화가 다름 아니라 영화의 생태라는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만들어지고 있음은 말해두고 싶다. 영화의 생태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말 그대로 생태,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다. 프랙탈은 이론적 의미보다는 유기체가 살아가는 새로운 무한 환경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말할 때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은데,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는 자기 영화의 지평을 “살아 있는 무언가와 닮은 영화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홍상수 영화와 공유되는 바가 있다. 살아 있는 무언가와 닮은 영화를 유기체적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옥희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그 유기체적 자기 조직성으로 전망을 모색할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지금과 같은 영화 생태계(‘주문을 외울 날’의 송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돈, 돈, 돈 하며 썩어 빠진” 영화 생태계)에서 유기체로서의 영화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순결에 가까운 자기 모험적 정신이 극한에까지 서려 있는 것 같다. 홍상수의 영화가 윤리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면 실로 이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옥희의 영화>에 밴 저 뜻모를 쓸쓸함과 고독함은 그러니까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필시 이런 영화 생태계 안에서 그의 영화적 생존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물론 이것이 이 글의 요점은 될 수 없겠으나 주의 깊게 생각해볼 만한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지금은 <옥희의 영화>의 어떤 구체적 활동에 관한 부분으로 돌아가야겠다.
<옥희의 영화>의 구체적 활동이라면 그건 통과하는 것이다. ‘통과한다’, <옥희의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인상이 이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통과하며 어떻게 통과한다는 말인가. 무수히 많은 문이 있고 그 문들을 통과한다. 그럼 어떤 문들인가. <생활의 발견>의 내용을 빌리자면 회전문(<생활의 발견>의 영어 제목)들이다. <옥희의 영화>에서 통과하는 활동은 회전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문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기필코 비유에 속할 수 없다. 그건 문이지 입구나 출구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문은 실외로 나가는 출구나 실내로 들어오는 입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문을 열면 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는 통로의 막에 해당한다. 제자리를 돌게 하는 문, 그러나 돌아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열면 결과가 달라지는 문, 그런 회전문이자 차이의 문이다. 홍상수는 “아차산이 왜 아차산인 줄 아나”라고 묻더니 “아름다운 차이가 있는 산이라서 아차산이다. 하하하” 했다. 아니 뭐 이런 썰렁한 농담이 다 있나 싶지만 사실이다. 아차산도 회전문이다. 그러고 보니 별안간 시 한줄이 떠오른다. “당신은 文을 제작하는 사람./나는 門을 제작하는 사람”(이민하의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중에서 ‘문제작’).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건 그 반대인 것 같다. <옥희의 영화>를 보니 더 확연하다. 당신은 門을 제작하는 사람. 나는 文을 제작하는 사람. 홍상수의 영화는 늘 “문제작”이다.
첫 번째 회전문은 전작 <첩첩산중>이다. <옥희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관계는 스승(문성근)과 애제자(이선균), 그 사이에 애제자이면서 여인(정유미)이라는 식의 유사 관계의 꼴로 전작 <첩첩산중>을 한번 통과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소설계가 아닌 영화계라는 점이다. 두 번째 회전문은 소문이다. <극장전>에서 배우 최영실에 대한 소문은 끝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여기서는 아예 떠도는 소문들 중 밝혀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송 선생은 돈을 받거나 안 받았을 것이고, 남 진구는 과거에 연애를 했거나 안 했을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소문이 회전문이 되어 서사를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장소도 회전문이 된다. 문자 그대로의 문이 있다. ‘주문을 외울 날’ 첫신에서 남진구가 아내와 함께 출근하는 파란 대문 집이 있는데, ‘키스왕’마지막 신에서는 옥희가 진구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집이 그 집 문 앞이다. 두 장면은 같은 곳에서 촬영됐다(이 영화는 각장이 이어질 때마다 매번 파란색 대문이 있다!). 네 번째는 배우의 육체 자체가 회전문이 되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이선균이라는, 정유미라는, 문성근이라는 배우의 육체를 문으로 놓고, (남)진구, (정)옥희, 송 선생이라는 인물들이 통과, 회전해 나간다. 도형으로 상상하자면 원(이선균) 하나를 두고 삼각형(진구1)이 통과하여 원-삼각형(진구2)이 되고, 다시 사각형이 통과하여 원-삼각-사각형(진구3)이 되고, 다시 별(진구4)이 통과하여, 원-삼각-사각-별(진구4)이 되는 그런 것이다. 물론 이중에서도 여인(옥희)이라는 존재는 더 결정적인 회전문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좀더 복잡할 수도 있는데, 가령 배우가 서로를 통과할 때가 그렇다. 가령 도형으로 칠 때, 이선균이라는 도형과 문성근이라는 도형이 서로를 통과할 때다. 그런 예는 많겠지만, 한 가지만 들어보자. ‘키스왕’에서 옥희의 친구는 “근데 그 나이 많은 남자는 누구니?” 하고 옥희의 연애 상대를 묻는데, 그때 친구가 의미상으로 가리키는 건 ‘키스왕’에서의 송 선생이다. 하지만 우린 동시에 그와 유사한 과거 소문으로 괴로워하던 ‘주문을 외울 날’에서의 남진구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남진구를 연기했던 이선균은 그런 대화가 오가는 그 시각에 옥희의 집 앞에 지금 앉아 있는 또 다른 진구도 연기한다. 옥희의 친구가 의미상 송 선생을 가리킬 때 우린 문성근의 육체를 떠올리지만, 의미상으로 진구도 환기되기 때문에, 떠올려진 문성근의 육체를 이선균이라는 육체가 또 통과한다. 이런 상황들을 거치면서 네개의 장의 인물들은 누가 누구라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옥희의 영화’다. <옥희의 영화>를 단순히 1인4역의 각각 별도의 네 이야기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홍상수는 미리 주어진 정보와 인상을 전제로 존재와 배우의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뇌의 활동을, 무언가 동시 다발적 비논리의 질서로 묶어내고 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주목하라
그런데 <옥희의 영화>에서 새롭게 주목할 만한 회전문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다음과 같은 문이다. 사물이나 육체가 아니라 목소리, 회전음(回轉音)이라고 부를 만한,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옥희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가장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사용된 것은 <극장전>의 상원(이기우)이 처음인데 <옥희의 영화>는 지금까지의 영화 중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가장 많이 쓰인 영화다. 물론 <옥희의 영화>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쓰임은 때에 따라 다르다. 심리를 설명할 때가 있고, 단순하게 시간 경과를 알릴 때가 있고, 눈앞의 이미지의 사실과 거기에 덧입혀진 목소리의 사실을 서로 불일치시켜 기이한 운율을 일으킬 때(‘옥희의 영화’에서 정자 앞의 장면)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건 앞신에서 퇴장한 인물이 시간을 생략한 채 바로 뒤의 신에서 등장할 때다. 대개는 그 사이에 짧은 인서트가 하나 있거나 아예 숏과 숏으로 붙는다. 이때 앞과 뒤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한 가지, 홍상수 영화에서 화면 밖 사람의 목소리는 어떤 사람의 퇴장이나 재등장에서 중요한 정서를 담당할 때가 있다. ‘화면 밖 사람의 목소리’라고 말한 이유는 그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비디제시스 사운드(서사 공간 바깥의 사운드)로서 사람의 목소리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후자의 경우는 대개 전화 음성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육체보다 전화 음성으로 먼저 등장하는 춘천의 선배 성우를 생각하자. 화면 바깥의 음성이 그렇게 있을 때 거기엔 인간관계의 새 출발 또는 종식과 재정리라는 문제가 끼어 있다. 말하자면 화면 바깥의 목소리가 일종의 서로 다른 계를 잇는, 관계의 접속지대 혹은 통과지대라고 할 만한 것을 마련하는 데 꾸준히 이용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이후에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마치 우리가 필름 룩과 디지털 룩이 좀 다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필름 보이스와 디지털 보이스가 다소 다르다. 후자는 확실히 화면 전체를 뒤덮는 그러나 덤덤하고 편평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물론 그것은 분명 기술적인 상황 때문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주는 정서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하하하>에서 몇몇 필자가 이 영화에서 죽음을 본 것에 대해, 실은 나는 온전히 영화에 의존하여 말하자면 흑백의 스틸 사진 때문이 아니라 그 위로 입혀진, 아니 화면을 뒤덮은 마치 다른 ‘계’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목소리의 편평한 느낌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허공에서 들리는 무심하고 흔들림 없는 독백.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시제, 시간성을 한순간에 흔드는 건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일 수도 있고, <옥희의 영화>에 그와 같은 감탄할 만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옥희의 영화>의 ‘옥희의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활동에 대해서 아직은 이 장면의 감흥을 고백할 뿐 어떤 장면이라 설명해서는 안될 것 같다(<옥희의 영화>의 기이한 포스터는 이 장면의 감흥에서 제작됐다). 마치 <극장전>의 후반부에서 감독 이형수의 존재가 밝혀졌던 놀라움에 버금간다는 것만 말해두자. 다만 그때의 장면이 무서움을 가져왔다면 지금 이 장면은 쓸쓸함 그리고 그 쓸쓸함 너머의 감정으로 가득하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갑자기 한 쇼트안에서 시간의 블랙홀을 만든 다음 어떤 인물의 퇴장과 재등장을 일순간에 이루는데, 이 비밀은 앞으로 제출될 평문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하고 나는 단지 이때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새로운 회전문이자 회전음이며 우주의 선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 감탄할 뿐이다.
<옥희의 영화>가 영화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자신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현재를 지탱하기 위해서 기필코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짙게 준다. 전작 <하하하>가 녹음이 짙게 우거진 풍성한 숲이었다면 <옥희의 영화>는 처연한 겨울 눈밭 한가운데 정중하게 서 있는 잘생긴 겨울나무 한 그루다. 음악적으로 <하하하>가 아름다운 협주곡이라면 <옥희의 영화>는 강렬한 독주곡이다. <하하하>가 풍요로운 마음의 영화라면 <옥희의 영화>는 간절한 뇌의 영화다. <하하하>가 타자를 향해 고개를 드는 영화라면 <옥희의 영화>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영화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 솔직한 나의 감정을 말하며 이 고백을 마치고 싶어진다.
정성일은 홍상수와의 기념비적인 대담에서 <옥희의 영화>에 관하여 “맹세코 장담할 수 있는데 <옥희의 영화>는 너무 슬퍼서 보고 나면 누구라도 눈물을 닦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감정을 이해할 것 같다. 다만 나는 내가 느낀 다른 감정도 고백하고 싶다. <하하하>가 행복을 지향하지만 행복의 영화가 아니라 행복 직전의 영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옥희의 영화>는 내게 슬픔의 영화가 아니라 슬픔 너머의 영화인 것 같다. <하하하>가 행복을 기다리며 애쓰는 사람들의 영화인 것처럼 <옥희의 영화>는 슬픔에 지지 않고 잘 참는 사람들의 영화인 것 같다. 슬픈 것인가. 아니 감당할 수 없이 차오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는 그저 활동적 감동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홍상수 영화의 감정을 만드는 실체다. 무엇이 차오르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되풀이하자면 하여간 차오름이라는 그 활동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감동적인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나는 지금까지 관람차와 다다를, 홍상수 영화의 아무것도 아닌 것과 <옥희의 영화>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활동과 통과함을, 혹은 회전문들을 놓고 돌고 돌며 경험하길 원한 것이다.
순수하겠다고 이를 물고 마음으로만 버티면 질 수밖에 없다. 그 순수는 통하지 않는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남진구가 학생에게 호통을 칠 때 한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그는 인위 없이는 순수를 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홍상수의 것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옥희의 영화>가 마음만, 순수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영화가 결코 아닌 것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다. 인위에 대한 필요를 인정하고 그러나 거의 요체라고 해야 할 만큼 그것을 압축하여, 뇌의 동력을 모조리 다 활동하게 하여, 지탱하면서도 진전함으로써 우리에게 일으키는 깊은 감정적 동요가 <옥희의 영화>에 있다. 홍상수 영화의 날이 갈수록 더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일단의 감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의 반응으로서의 활동으로 영화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나는 <옥희의 영화>가 슬픔에 반응하는 영화라고 느낀다. 슬픔이 아닌 그에 대한 반응이라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애상에도 쓰러지지 않는 격조라고 생각한다. 격조라고 말하고 나니 기품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진다. 어, 이런 감정인가, 그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그런 반응. 그 반응을 더 선명하게 이름 짓지는 못하겠으나 그 행위는 용감하다. 용감함, 마침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슬픔에 반응하는 위풍당당함이다. 그 모든 소란스러움을 뒤로한 채로 빠르지 않지만 기품있게 활동하는 행위. 음악이 <위풍당당 행진곡>이어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리듬과 이 음악의 리듬이 동류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길고도 긴 고백은 여기가 끝이다. 영화 속 겨울나무는 아주 잘생겼고 <옥희의 영화>는 신비롭다. 아니, 나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영화란 신비다, 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가 얼마나 신비한 영화인가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옥희의 영화>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