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10-09-2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한국 개봉하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엉클 분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감독은 누구인가? 그 질문에 타이의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이름은 수없이 불렸고 늘 상위권에 있었다. <열대병>과 <징후의 세기>는 21세기 최고작을 뽑는 어떤 자리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 <씨네21>의 1998년에서 2008년까지의 베스트10 목록에도 있었다. 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엉클 분미>가 그의 영화 중 처음으로 국내 개봉한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과연 <엉클 분미>는 어떤 영화일까. 그 내용과 감상을 전한다. <씨네21>이 칸에서 그와 나눈 대화(756호), 다시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개막작 감독으로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나눈 대화(769호) 등과 함께 읽는다면 더 흥미로운 첫 번째 만남의 자리가 될 것 같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라는 낯설고도 신기한 감독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2000년에 그의 첫 장편 <정오의 신비한 물체>와 함께 출현했다. 이 영화에서 극이 시작되지 않고 아직 다큐일 때 생선장수 아주머니의 슬픈 과거사를 듣고 있던 카메라 뒤의 아핏차퐁은 “우리에게 들려줄 다른 이야기는 또 없나요”라고 묻는다. 아주머니가 뭔가 생각난 듯 말하려 할 때 컷. 휠체어에 앉은 소년과 가정교사가 있는 집 안이 보이고 영화는 이제부터 종잡을 수 없이 흐른다. 정말 종잡을 수 없다.

한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하면 아핏차퐁이 그걸 영화로 반영하고,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를 보태면 또 영화의 내용으로 반영해 수십명의 이야기로 한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그러니 영화는 말 그대로 산으로 가는데 그 과정이 놀랍게도 생기 있다. 서구의 한 평론가는 그걸 초현실적 기법 안에서 해명하려고도 했지만 실은 그건 집단적 서사 구전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명석하게 시도한 것에 더 가깝다. 그때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꼬리 무느냐에 따라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평등하게 혹은 상상적 공동체의 이야기로서 울려퍼진다.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의 운명 혹은 환생하는 이야기 그것이 <정오의 신비한 물체>가 다루고자 한 것 중 하나였고, 환생이란 아핏차퐁의 지속적인 영화적 관심사이며 여섯 번째 장편 <엉클 분미>에서는 환생하는 생물체, 환생하는 영화로 다시 돌아와 있다. 타이의 한 평론가는 아핏차퐁의 영화를 “환생의 시네마”라고도 불렀다.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를 본다는 관점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감독 중에는 자신의 작품에 달라붙으려는 개념들을 최대한 밀쳐내고자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알아서 매우 명석하게 자기 개념들을 도출하고 정렬해내는 쪽도 있다. 아핏차퐁은 철저하게 후자에 속한다. 그가 자기 영화를 설명할 때마다 참고하는 은밀한 자신만의 개념어 사전이라도 하나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걸 다 나열할 순 없다. 정글, 질병, 기억, 전생, 시간성, 움직이는 이미지, 연출(directing)이 아니라 고안(conceiving) 등등. 환생은 그중 하나에 속할 뿐이다. 하지만 “<엉클 분미>는 영화와 환생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영화는 대안적인 우주와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을 창조하는 인간만의 방법이다”, “이 영화는 나의 고향과 내가 자라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라고 그가 말할 때 이 말이 이상하게 지금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엉클 분미>는 사람의 환생에 관한 것이되 영화의 환생에 관한 것이고 동시에 그 환생을 보는 관객이라는 유령을 의식하고 만든 것이다. 관객이라는 유령이라니. 이 점은 아핏차퐁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론 혹은 영화의 유령론에서 나온 말이다. 아핏차퐁은 자신의 에세이 <어둠 속의 유령들>에서 “관객 유령들”(the audience ghosts)이라고 표현한다. “영화(film)를 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지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그들의 행동이 마치 앞에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유령들 같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영화(cinema)는 그 자체로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앉아 있는 육체가 담긴 관과 같다.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카메라 기록이다; 그것들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일제히 엮어냄으로써 영화(film)로 불린다. 이 어둠의 넓은 방 안에서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아핏차퐁은 환생의 가능성과 유령의 존재가 영화적 재현과정에 매우 유사하고 또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유령적 상태와도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엉클 분미>의 내용은 이렇다. 신장병으로 죽음이 가까워온 것을 아는 분미 아저씨는 도회지에 사는 처제 젠에게 자신의 농장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들 옆에는 정확한 관계는 알기 어렵지만 충복으로 보이는 통이라는 착한 젊은이가 늘 있다. 그들 셋이 어느 날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19년 전에 죽은 아내와 원숭이 인간에 홀려 그들과 성교한 다음 자신도 원숭이 인간이 되어 집을 떠나버린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과거와 내세에 대해 대화한다. 그러다 영화는 얼마간 지났을 무렵 예고도 없이 우화 속 한 공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한탄하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메기와 성교를 한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분미 아저씨가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고 그의 장례식이 있는 날 무슨 이유에선지 통은 스님이 되어 있다. 사원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무섭다며 젠과 그녀의 딸이 머무르는 숙소에 와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들이 일어섰을 때 똑같은 그들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은 이제 두개로 흐르며 마무리된다. 야식을 먹으러 간 사람들의 시간과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의 시간. 이것만 듣고 전모를 알기란 좀 어렵긴 하다.

<엉클 분미>
<열대병>

<엉클 분미>, 아핏차퐁의 첫 범작

<엉클 분미>는 알려진 것처럼 아핏차퐁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업 ‘프리미티프 프로젝트’와 연을 맺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의 우연한 첫 시작은 <열대병>을 찍을 당시 알게 된 한 스님이 건네준 책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한 남자(프라 스리파비야티&#50939;)가 쓴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거기서 아핏차퐁은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책은 아핏차퐁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지 원작이 된 것은 아니다. 아핏차퐁은 작업을 준비하는 중에 타이 북동부로 향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마침내 나부아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에야 윤곽을 잡았다. 그는 60년대 이곳에서 정부와 공산당 게릴라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시민과 타이 정부 사이에 있었던 대치 국면도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환생하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 유년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코믹북이나 영화의 면모를 함께 넣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인간 원숭이나 박색 공주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 과정 중의 그런 경험이나 계획이 어떤 방식으로 담겼을까. 영화에서 분미 아저씨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을 때 “내가 옛날에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업보”라고 말한다. 그때 그는 지나간 타이의 역사를 은밀하게 불러내고 있다. 여기에 아핏차퐁은 별안간 우화 한 토막을 삽입해 영화의 결을 풍부하게 하려 한다.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공주 신은 일종의 환생에 관한 우화인데, 추함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어 하는 공주의 이야기를 데이 포 나이트(특정 필터를 사용하여 낮에 촬영했으나 밤장면의 효과를 내는 촬영기법)로 촬영한 것은 고전적 B급영화의 촬영술을 모색한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 영화의 정점이라 할 만한 장면.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분미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성스럽게 펼쳐진다. 세상을 떠나는 분미 아저씨가 목소리만으로 “난 전생에 이 동굴에서 태어난 적이 있어… 어젯밤 다음 생에 대한 꿈을 꿨어”라며 전생과 다음 생을 말할 때 그의 죽은 아내가 해준 “유령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나 생명체에 머물러요”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다. 분미는 또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다름 아니라 동굴인 건, 그러니까 아핏차퐁이 극장에 비유한 적이 있는 동굴이었던 건, 그가 영화의 장소로 들어가 영화적으로 죽었으니 그가 또 영화적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예고일 것이다.

<엉클 분미>는 일단 소재나 내용에서 아무나 손댈 수 있을 만한 영화가 아니다. 눈에 잡히지 않는 것들, 미지의 것들,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깊은 명상적 탐구가 몸에 배어 있는 아핏차퐁 정도만이 형상화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 관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좀 다른 면모도 이제는 함께 말해야 할 것 같다. <엉클 분미>는 여전히 연결이 쉽지 않은 내용이 있지만, 전체적인 감상에서 보자면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동시에 좀 무뎌진 면도 있다는 점이다. 또는 아핏차퐁이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해낸 나부아에서의 역사적 운명성이 이 영화 자체만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흠도 있다. 그 때문에 <엉클 분미>는 보통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현저히 뛰어나겠지만 아핏차퐁의 작품 중에서 볼 때는 그가 첫 번째 양산한 범작이자 첫 번째로 멈추어선 창작의 발걸음인 것 같다.

<징후와 세기>
<친애하는 당신>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미술쪽에…

뛰어난 장면은 물론 있다. 사원에서 잠을 자다가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모녀의 방에 온 젊은이 통. 셋이 야식을 먹으러 가자는 둥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셋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이 꽂힌 채 굳은 표정을 짓는다. 거기 타이 시위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일어나 야식을 먹으러 간다. 그때 두개의 시간이 공존하게 된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전히 같은 인물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유체이탈과도 같은 분리가 일어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야식 먹는 사람들의 시간과 텔레비전 보는 사람들의 시간을 공존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뛰어나긴 해도 아핏차퐁에 걸었던 기대에 비한다면 예상 밖으로 좀 도식적이다. 다음과 같은 비범한 점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구전적 활력이 놀랄 만큼 이미지를 끌고 가서 결국 모두가 말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말하기의 혁신성(<정오의 신비한 물체>), 벌레소리와 새소리와 초록빛의 숲과 벌거벗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육체라는 엄청난 감각의 확장(<친애하는 당신>), 심장 박동처럼 음악이 들리는 순간 춤을 추듯 수풀을 헤치고 직진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활동(<열대병>), 저 밑에서 혹은 저 멀리서 왕의 동상이나 불상을 쳐다볼 때 또는 갑자기 검은 구멍이 스크린에 자리 잡을 때 일어나는 엄청난 시간적 혼미함(<세기와 징후>) 등이 <엉클 분미>의 대개의 장면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좀 당혹스러운 일이다. 어디에서 완만함이 생긴 것일까. 물론 지금까지 그의 발전의 보폭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겠지만 <엉클 분미>의 종종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배경들, 감각 대신 개념만으로 제시된 유령들, 시무룩해져 있는 카메라, 그 카메라의 약간 붕 떠 있는 것 같은 구도, 때때로 어색한 인물들, 그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우린 문득 궁금해진다.

그의 영화를 소개하는 이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영화 <엉클 분미>가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이 이 영화 자체에 장점이 된 것 같진 않다. 이 장편이 중심이고 나머지가 주변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영시간이 비록 짧아도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설치미술쪽에 쏟아져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프리미티브 비디오 미술 작품 중 단편 <나부아의 유령들>은 10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숨이 막힌다. 여기서 빛은 그냥 빛의 효과가 아니라 영혼이 담겨 날뛰는 혼불로 여겨지도록 만들어져 있고, 거기 뛰어노는 아이들은 잔인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본다는 것의 문제는 이중 삼중의 틀로 생각을 불러일으켜 10분 만에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당장에 이렇게 예측해볼 수는 있다. 아핏차퐁의 영화적 혁신 중 하나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에 있는데, 우리가 흔히 서사라고 말하는 것의 전통적 기능 대신 다른 무엇으로 서사적 느낌을 전개했던 것이고, 그때 그 다른 무엇이란 창의적인 비주얼 텔링이었다. 그런데 <엉클 분미>엔 그 비주얼 텔링의 놀라움이 줄어들었다. 왜일까?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에 다 흡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비유컨대 <엉클 분미>는 어떤 화가의 연작 중에서도 가장 대형의 화폭에 그려졌는데 듬성한 그림인 것 같다. 그간 비디오 설치미술의 어떤 무엇을 영화에 도입해 혁신을 이루었던 것에 반하여, 둘을 한 프로젝트 안에서 병행하자 갑자기 이번에는 영화쪽에서 힘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잠재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다 해도 아핏차퐁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당장 철회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21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영화감독과 그의 영화가 쉽게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아직 극장에서 정식으로 그의 나머지 다섯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것 아닌가. 아핏차퐁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말해져야 할지 모르겠다. 아핏차퐁은 언제라도 다시 변신을 시도할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이기 때문이다.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나부아의 60년대>
<나부아의 유령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총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과 2개의 단편영화가 포함된다. 2009년 5월17일,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첫 전시를 연 뒤 작품별로 각국의 전시장을 순회하고 있다(서울에서도 현재 미디어시티서울 행사에서 전시되고 있다).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프리미티브> <나부아> <우주선 만들기> <헌신하는 기계> <저녁 촬영> <뮤직비디오: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뮤직비디오: 나부아 송>이다. 처음 나부아라는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아핏차퐁은 남편 없는 미망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끌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됐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그들과의 공동작업 형태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 어울려 완성됐다. 대다수 작품은 2008년 9월 즈음 나부아에 머물면서 만들었다. 반면, 두개의 단편은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와 <나부아의 유령들>이다. 전자는 장편 <엉클 분미>를 완성하기 전 감독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 분미씨의 혼령에게 보내는 일종의 위령편지의 의미를 띠고 극화됐다. <나부아의 유령들>은 나부아의 아이들이 한밤에 공을 차고 뛰노는 설정으로 촬영했고, 과거 타이의 SF영화 방식으로 시작하여“빛들의 소통”(아핏차퐁)이라고 할 만한 초현실적 분위기를 흠씬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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