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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가즈히로] 도약과 즉흥의 즐거움을 아시나요
2010-09-2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제2회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 <피스>의 소다 가즈히로 감독

올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개막작 <피스>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독거노인이 담배를 입에 물며 문득 전쟁 때의 기억을 꺼내는 순간이다. 그는 사람 목숨이 엽서 한장 값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때 그가 입에 문 담배의 이름이 ‘피스’(평화)다. 감독 소다 가즈히로는 사회복지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장인어른을 좇다가 문득 이 독거노인을 만나고 이 장면을 찍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그런 것이 아니다. 소다 가즈히로의 다큐에는 어떻게 이런 장면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찍어냈을까 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그 과정에 관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리는 파주출판단지에서 그를 만나 들었다.

-<피스>는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DMZ다큐멘터리영화제쪽에서 평화와 공존에 대한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처음에는 세명의 감독이 같은 주제로 옴니버스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중 한편으로 기획된 거라 알고 있다. 하지만 만들다 보니 장편이 됐다. 너무 큰 주제라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좀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일본의 일상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평화와 공존 혹은 거대한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옳은 주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투적인 영화가 될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도둑고양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을 보고 나서 일상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시작할 수 있었다. 장애인 복지사를 하는 장인어른을 카메라로 따라가다 보니 하시모토 시로라는 노인도 만나게 됐다.

-그 장면이 놀랍다. 하시모토가 피우는 담뱃갑에 ‘피스’(PEACE)라고 쓰여 있었는데, 뭔가 그때 이 영화의 주제가 구체적인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그 담배를 봤을 때 나도 정말 놀랐다. 그 담배는 2차대전 뒤에 대중에게 가장 먼저 보급된 담배라고 한다. 일본인은 전쟁에 너무 질려버렸기 때문에 전후 시기에 평화에 대해 희망을 가졌고 그런 뜻에서 이 담배가 나온 것이다. 하시모토도 전쟁 이후에 계속 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지금도 계속 그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점은 이번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지도가 없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시모토를 찍고 나서 아, 이제 영화가 되겠구나 확신하게 됐다.

-좋은 의미에서 이번 영화는 즉흥연출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영화연출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나는 촬영 시작 전에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주제도 정해놓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절대로 미리 정해진 촬영 대본을 갖추지 않는다. 단지 촬영하는 동안 일어나는 도약과 즉흥적인 일들을 즐길 뿐이다. 물론 이번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니만큼 주제는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촬영과 편집을 한 다음 그 안에서 주제를 발견하는 쪽이다. 처음부터 주제에 잠기면 너무 예상 가능한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를 처음 봤을 때도 그가 내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테니 찍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한없이 찍어보자 했고, 마침내 그가 과거 전쟁 때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을 만났다.

-언제부터 즉흥성을 선호했는가.
=그런 게 내게 제일 중요하고 또 다큐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상황을 다큐를 통해 영화적 현실로 재생하여 만들 때 그 즉흥성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다수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수없는 조사와 정보와 시나리오와 내레이션을 미리 준비해야 했고, 답답했을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을 <피스>에 썼다면,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인상적인 장면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듣는 와중에 다시 궁금해진 것인데, 처음 DMZ다큐영화제쪽에서 주제가 정해진 작품의 제안을 받았을 때 당신의 심정이 궁금하다. 왜 이걸 내게 맡기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혹시 있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았고, 다만 내가 이런 주제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는 했다. 데뷔작 <캠페인>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주제를 갖고 시작하는 방식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거절할 뻔했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일상을 내 식대로 찍다보니 문득 이게 DMZ쪽이 원하는 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난 지금, 마음은 어떤가.
=너무 기쁘다.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평화와 공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화란 뭐지, 평화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깨지는 거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차기작 또는 요즘 관심사가 있다면.
=음, 너무 많은데? (웃음) 20개 정도의 주제가 있다. 지금 작업 중인 것도 있다. 히라타 오리자라는 도쿄에 근거를 둔 연극연출가, 그의 극단과 그의 예술에 관한 다큐다. 300시간 넘게 찍었고 지금 편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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