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칠검>을 끝으로 근 5년간이나 돌아오지 않았으니 서극은 잠시 잊었던 이름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스필버그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장르인 무협의 세계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사관인 적인걸이 주인공이다.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은 과연 어떤 영화인가. 그 흥분되는 세계로 들어가본다. 그리고 감독 서극에게서 이 영화의 단초가 될 만한 생각도 직접 들었다.
무협에 요괴, 추리, 어드벤처, 팩션 등 가미
서극은 영화산업의 속성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소속감을 가진 채 제작자 겸 감독으로 활동해온 사람이다. 그는 우선 제작자다. 그의 영화제작과 한국의 영화문화는 따지고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함께 건넜다. 그 유명한 <영웅본색> <첩혈쌍웅> <황비홍> <천녀유혼> <동방불패> 시리즈 제작에는 누구보다 그가 중심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서극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그중에는 범작도 많지만 감탄이 절로 나는 괴작도 다수다. 5년 전 한국에서 개봉한 <칠검>은 범작에 속할 것이지만 그 이전 2000년 초반에 우리에게 선보인 <순류역류> <촉산전> 등은 괴작을 넘어 일종의 기념비적인 걸작 수준이다. 그의 걸작은 동시에 괴작이기 때문에 컬트이고 컬트이기 때문에 무관심의 대상이거나 숭배의 대상이다. 서극 영화가 비판도 많지만 지지도 많은 것은 그 때문인데 우린 지금 엄연히 후자다.
어딘가 다소 산만하고 약간 어수룩해 보이지만 또 어떤 부분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독기가 있을 때 그게 서극적이라고 느껴왔다. 그의 미학은 대체로 불균질 혹은 불균형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이하 <적인걸>)은 그 불균질, 불균형을 의식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균형감을 중요시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 점에서라면 <적인걸>은 의도치 않게 불균형의 도주선을 달리며 기념비적인 걸작이 되어버린 <순류역류>나 <촉산전>보다는 확실히 덜 뛰어난 작품 같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무협물에 요괴, SF, 추리, 어드벤처, 팩션(가공된 역사물) 등을 야심차게 어우르며 또 다른 종합의 불균질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매우 비상한 장면들을 다수 섭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인걸>을 뛰어난 오락물이라고 칭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당나라 시대에 재상을 지냈고 작자미상의 고전소설, 심지어는 중국에 주재했던 외교관에 의해 근대소설로도 쓰여진, 그리고 숱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적인걸이라는 인물은 중국인에게 익숙한 이름이라고 한다. 서극은 이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었다. 전해져오는 대로라면 적인걸은 통통한 호인이었던 것 같은데 서극은 날렵한 무술인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애초에는 유덕화보다 홍금보가 더 어울렸을 법하지만 여전히 맹수의 눈빛과 몸놀림을 잃지 않은 유덕화가 서극의 적인걸이 됐고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적인걸에게는 사연이 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유가령)가 즉위식을 올리기 직전 그녀의 신하 두 사람이 여황제의 즉위식에 맞춰 지어지고 있는 거대 불탑의 비밀에 얽혀 불에 타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불은 그들이 햇빛을 받자 그들 몸속에서 일어났다. 이 초자연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난 수사관이 필요해졌고, 여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섭정을 반대한 이유로 감옥에 수감시켰던 명민한 수사관 적인걸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게 된다. 적인걸은 여황제의 수하인 정인(이빙빙)과 또 다른 수사관 배동래(등초)와 함께 수사에 나선다.
<적인걸>이 꽤 그럴듯한 서사의 완결성을 지닌 것은 우선 놀랍다. 그런데 놀라운 이유는 다른 추리물 영화보다 이 영화의 추리력이 훨씬 더 정교해서가 아니라 다른 서극의 영화보다 이 영화의 서사가 더 내밀해서다. 서극 자신은 “돌이켜보면 내 영화들의 서사는 제법 탄탄했다고 생각한다”(이번 인터뷰 내용 중 제외된 부분)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의 말과 다르게 그는 서사에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비상한 비주얼을 촉발하는 원초적 소재로서의 서사를 예민하게 전개해온 것은 사실이다. <촉산> <청사> <신용문객잔> 등 서극을 유명하게 만든 판타지 무협물이 그런 서사 위에서 힘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적인걸>과 유사한 판타지 무협물에 비한다면 <적인걸>의 추리력은 서극 영화에서 예외적으로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이 각본가의 능력에 힘입은 바 큰 것이라 해도 영화를 이끄는 중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럴듯한 서사의 완결성과 녹슬지 않는 액션 비주얼
하지만 범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해도 <적인걸>의 영화적 호쾌함이 훼손될 것 같진 않다. 이것이 놀라움의 두 번째 이유다. 추리극으로서 완성도를 향해가는 동시에 서극 고유의 힘을 자랑했던 액션의 활동성도 기죽지 않고 본능처럼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극 영화에서 서사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성실한 이행으로 느껴진다면 액션이나 비주얼 세계의 활극적 창조는 숨겨지지 않는 그의 욕망의 분출처럼 느껴진다. 서극의 영화는 서사의 샛길로 빠지기 일쑤다. 그러고 나서 거기 샛길로 접어들면 활극의 장관이 펼쳐지고 갑자기 서사의 순리를 잊어버린 것처럼 거기서 활극을 무한정 벌이다가 어영부영 해결지점을 맞는다. <적인걸>이 이렇게까지 나아갔다고 말하긴 물론 어렵지만 적어도 균형을 의식하고 만들어진 영화에서 할당된 어떤 액션 시퀀스들에서 그 호방함과 호쾌함은 마음껏 펼쳐진다. 서극은 아름다운 허황됨을 잃지 않는다.
서극은 <적인걸>에서 중화영웅의 이야기를 순순히 따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런 이야기는 허투루 들어도 괜찮다. 그걸 내세우고 나머지 자기식의 허황된 미학적 비주얼을 성취하려 할 때 우리도 이 영화에 대해 즐거움을 나눠 갖기 때문이다. 판타지 무협물 혹은 거기서 뻗어나온 또 다른 변종을 연출하는 서극에게 중국적인 것은 소재이거나 산업 내에 머무르는 감독으로서 협상의 테이블에서 취해야 할 달콤한 빌미 그 이상이 아닌 것 같다. 비교컨대 장이모가 중국적인 것의 개념을 무협의 비주얼화로 공고하게 성립시키려 하는 것이라면 서극은 중국적인 것으로서의 서사를 순응한 다음 잠들지 않는 비주얼의 자기 개별의 욕망을 표출한다. 서극의 그 비주얼은 허황되며 근본이 없다. 그런데 그 허황됨과 근본없음에 흥이 난다. 그러므로 이건 서극 영화에 대한 우리의 최선의 호의적 표현이다. 물론 이것이 서극의 상업적 의도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우린 계속 오해하고 싶다. 서극의 의도보다는 서극의 본능 때문에 우리가 더 즐겁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괴이한 흥분을 자아내는 서극의 CG
세트와 CG를 눈여겨보는 것은 그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세트의 존재감은 실은 대개의 경우 원색적인 광선의 특수효과와 보자기의 움직이는 펄럭거림, 그것과 함께 온다. 서극 영화의 신기원인 <촉산전>이 예컨대 이 빛과 보자기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적인걸>에서도 적인걸을 위시한 주인공 일행이 지하의 귀도시로 내려갔을 때 국사로 변장한 괴물이 그들을 덮치는데, 그때 그 괴물의 ‘보자기 무술’은 물로 가득한 인공적 공간 안에서 허공을 가르는 것 같은 펄럭거림으로 괴이한 흥분을 자아내며 또 현란하다.
한편으로 서극의 CG를 말할 때 CG의 기술력이 놀랍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말해두고 싶다. CG의 기술이 아니라 CG의 정서다. 물론 CG의 사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표현 가능하게 하는 데 기능이 있겠지만 그보다 서극 영화에서 종종 흥미로운 건 CG가 마치 인물의 혹은 세계의 정신적 심상을 표면화하는 것처럼 보일 때다. 이상하게도 서극의 CG가 주는 정서는 거칠어도 순수하고 울림이 있다. 종종 그 CG에서 정신적 심상까지 느껴진다. 서극은 CG를 단순히 특수효과라는 기술적 효과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장센으로 끌어올리는 거의 유일한 감독에 속할 것이다. 예컨대 서극의 무협영화에서 종종 인물의 형상이 거대하고 기이한 불상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는데 <적인걸>에서는 여황제를 본뜬 거대 불상 그 자체가 이미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묘사되어 있다. <적인걸>은 CG로 완성된 그 가상의 중심추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이다.
귀도시, 무극관, 통천부도의 활극 백미
그리하여 <적인걸>의 명장면을 꼽자면 귀도시, 무극관, 통천부도에서의 액션장면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적인걸 일행이 사건조사를 위해 지하세계인 귀도시로 내려갔을 때 그들은 물에서 솟구쳐 나와 허공을 뚫고 올라가는 통나무들 사이로 물길과 뱃머리를 뛰어다니며 보자기 괴물과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이 괴도시를 빠져나와 무극관의 숲으로 착지할 때에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광활한 숲으로 빠져나오는 순간을 단숨에 포착해내어 보는 사람의 숨을 헉 하고 멈추게 한다. 그리고 무언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법사가 수련하고 있는 무극관을 적인걸이 찾았을 때 법사는 그의 법력을 이용하여 지축을 흔들고 환상으로 적인걸을 포박하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통천부도 대불탑, 말하자면 거대한 마천루, 그 끝에서부터 수직 하강으로 떨어지면서 적인걸은 마지막 활극의 쾌감을 선사한다. 이 세개의 활극 시퀀스는 <적인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며 이 장면들만으로도 <적인걸>은 보는 동안 숨가쁘다.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영화란 오락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서극에게 가장 이상적인 오락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역시나 그렇게 간명하게 답해왔다. 질문도 답도 말 그대로 지나치게 원론적인 것 같아 그 문답을 제외했는데 빠트리고 보니 별안간 이런 질문은 든다. 서극의 어떤 영화들은 실제로 경외심을 낳는데 그 이유는 그의 영화가 오락은 오락이되 아름다운 예술품을 볼 때의 찬탄도 함께 낳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구체적인 더 많은 말이 필요하다. 다만 오락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둘은 다른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서극 영화에서 무용한 것 같다. 서극은 그 구분이 무의미함을 증명하는 오락물의 대가이며 서극이 그렇게 오락할 때 그의 작품은 예술과 교집합을 이루어내고 그가 의도치 않게 은연중 예술을 할 때 우리의 쾌감이 최대치에 이른다. 서극의 <적인걸>은 이 방면의 아류와 하수들에게 진짜 질펀하고 대책없이 유희하는 법을 한수 가르쳐주는 호방한 오락물이며 그로써 뛰어난 예술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