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를 만나러 가기 전 <심야의 FM> 홍보실장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혹시 인터뷰 도중 유지태씨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스스로 짜증이 났거나 맘에 안 드는 상황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요. 절대 상대방에게 짜증내는 거 아니에요.” 유지태는 솔직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솔직해서 오해를 사는 일이 많다. “아무리 착한 척, 정의로운 척, 예쁜 척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까발려지게 돼 있어요.” 유지태는 ‘척’하는 대신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열정을 작품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며 달려왔다. <동감>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그에게 인기는 물론 ‘믿음직스런 배우’라는 수식어를 가져다주었다. <야수> <가을로> <황진이> <비밀애> 등 최근작들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그의 연기가 엉망이었던 적은 없다. 그리고 선택한 <심야의 FM>. 이번 영화에서 유지태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한동수 역을 맡았다. 악역이 새삼스럽진 않지만, 에너지를 안으로 모으지 않고 밖으로 뿜어내는 그의 연기는 꽤 신선하다. <심야의 FM> 개봉을 앞두고 유지태를 만났다. 흥행에 대한 걱정보다 작품에 대한 믿음이 더 큰 것 같았다.
-<심야의 FM>을 막 보고 오는 길이다.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말해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런데 깔끔한 스릴러영화더라. 재밌었다.
=사람들이 기대 많이 안 했을 거다. 기대 안 하지. 흙 속의 진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 모험하기 싫어하니까. 영화는 감독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통해서 김상만 감독이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 다재다능한 감독님이다.
-매번 도전할 여지가 많은 작품을 선택하는 것 같다. <심야의 FM>을 선택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심야의 FM>은 온전히 한동수가 게임을 제안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영화다. 처음엔 한동수가 지금보다 더 절제된 인물이었고, 쉽게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사이코패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재미없으니까. 감독님이 원하는 모습도 그런 게 아니고, 의상팀장도 옷을 화려하게 준비했다.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면서 <택시 드라이버> 후반부의 로버트 드 니로, <샤이닝> 후반부의 잭 니콜슨 모습을 생각했는데, 한동수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야 하니까 고민이 됐다. 그래서 조금 더 희화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캐릭터의 묘미를 살리고 싶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한동수는 트레일러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오타쿠 같은 캐릭터다. 그런데 한동수의 겉만 연기하면 연기하는 티가 확 난다. 리얼리티를 먼저 품어야 해서 나를 고립시키기로 했다. 실제의 나를 고립시키는 거다. 그러면 사람들 만날 때 굉장히 힘들다. 정서적 고통들이 좀 있었다.
-캐릭터가 실제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편인가보다.
=예전에도 맡은 역할의 존재감은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뭐가 날 힘들게 하는지 몰랐다면 이제는 캐릭터가 내 삶에 영향을 많이 주고, 그게 실제적으로 다가온다는 걸 안다. 캐릭터 때문에 내 느낌 자체가 이상하게 변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못하게 된다. 그런데 유지태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여자친구도 만나야 하는데, 눈빛이 변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 그러면 유지태가 변했다고 사람들이 숙덕대고. 다음에 이런 역할 맡으면 사람들 안 만나려고 한다. ‘지금 연기 중. 연락하지 마시오. 작품 들어가 있으니 연락 안돼도 이상한 거 아님’ 이렇게 해야겠다. 배우들은 조금만 달라져도 이상한 루머가 생긴다. 환장한다, 환장해.
-캐릭터는 캐릭터고 일상은 일상인 배우들도 있지 않나.
=스스로 연기를 컨트롤하는 건데, 그건 어느 정도까지만 연기하는 거다. 완전히 몰입하지 않는 거지. 힘드니까, 다치니까 선을 그어버리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거다. 물론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배우 유지태와 인간 유지태를 구분하려고 한다. 그런데 작품에 몰두하게 되면 그게 점점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드라마는 그날그날 대본이 나와서 쉴새가 없지만 영화는 작품이기 때문에 인물을 품어야 한다. 그러니 정신적으로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무당이 신을 거부하면 죽잖아. 이런 말이 좀 과격하고 엉뚱한 것 같긴 한데, 연기하는 사람도 신 내림 같은 걸 받는 거다. 계속해서 연기 연습하는 게 마치 ‘신 내려라, 신 내려라’ 이러는 거 아닐까.
-<심야의 FM>에선 몸집도 불렸고, 삭발도 했다.
=요즘은 영화를 통해 판타지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많아졌지만 난 영화 속 인물에 리얼리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살찌우는 일은 이제 그만 하고 싶다. 힘들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 102kg까지 찌웠고, 이번엔 그보단 조금 찌웠지만 전 작품인 <비밀애> 때 너무 말랐었으니 힘들었다. 삭발한 모습은 그냥 귀여웠지. 사람들이 까까중 같다고도 했고.
-현장에서 상황 변수까지 고려해서 연기하는 치밀하고 분석적인 스타일인가.
=프레임은 대충 보인다. 편집 포인트가 어디겠다, 이런 건 대충 알지. 영화를 19편 찍었으니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래도 연기하면서 그런 거 계산하면 안된다. 현장에서 찍히는 그림만큼은 계산할 수 없다. 난 매직 모먼트(magic moment)라고 부르는데, 순간순간의 기적들은 눈으로 직접 봐야지 안다. 19편 하면서 한번도 반복하려 했던 적 없다. 매 순간 떨리고, 매 순간 새롭고, 매 순간 집중한다. 쉽게쉽게 연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한동수는 사회적 악인을 처단해 영웅이 되려 하지만, 고선영(수애)과 그녀의 딸도 위험에 빠뜨린다. 여자와 아이들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해야 했는데.
=내가 아이들을 되게 좋아한다. 은수(이준하) 동생으로 나오는 최희원양이랑은 참 잘 통했다. 희원양이 날 무척 좋아했다. 연기할 때는 움찔했지. “삼촌 무섭지?” 그랬더니 “연기하는 거잖아” 그러더라. 난 아역들, 스치는 인연도 깊게 이어가는 경우가 있다. <내츄럴시티> 때 꼬마였던 은원재는 지금도 가끔 연락 온다. “형,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해요? 연기 계속해야 해요, 말아야 해요?” 전화로 물어온다. 그러면 “하다보면 돼” 그런다. 그게 정답 아닌가?
-지금 와서 데뷔 초기작들 보면 어떤가.
=창피해서 못 보지. 예전엔 내 연기만 봤는데, 지금은 영화 전체를 보게 되긴 하더라. 당시 내 모습 참 풋풋하고 귀엽다. 예전엔 <바이준> <동감>에서처럼 웃는 거 되게 싫었는데.
-나름 청춘스타였다.
=(웃음) 봉사활동 가서 ‘영화배우 유지태’라고 하면 “아저씨 누구예요?” 이런다. TV에 안 나오니까 잘 몰라. 각계각층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뭐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보니 유명한 사람이더라” 이런 얘기 자주 듣는다. 탤런트들이 짱이다.
-지금껏 드라마는 한편밖에 안 했다.
=영화에 올인하고 싶었고, 영화배우, 영화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옛날에는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0대 때는 더더욱 영화로 인정받고 싶었다.
-잘할 수 있는 것보다 하고 싶은 걸 하는 타입 같다.
=맞다. 내가 잘하는 거 하면 재미없으니까. 그런데 망한 작품이 많다. 이젠 이력이 났다. (웃음) 실패를 분석하는 단계까지 왔다. 물론 고심해서 고른 작품이 결과가 안 좋으면 속상하지. 내가 실패를 잘 감당해낸다고 단언했지만 당시엔 굉장히 힘들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꿈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힘들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내 인생이 흔들리거나 하진 않는다.
-꿈이 뭔가.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영화인 유지태, 배우 겸 감독 유지태가 되는 거다. 더 나아가서 존경받는 가장도 되고 싶다.
-얼마전 <무릎팍 도사> 녹화를 마쳤다. 무려 11년 만의 예능프로그램 출연이다.
=강호동씨가 “<무릎팍 도사>에 왜 나왔어요?” 물었는데, 난 좀 솔직한 편이거든. 영화 홍보하러 나왔다고 했다. 솔직해서 좋대. 처음엔 어떤 질문을 할까, 어떻게 집요하게 파고들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약간 긴장했는데, 찍으니까 재밌더라.
-준비 중인 장편영화는 어떤 작품인가.
=감독으로 데뷔한다면 성장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꾸준히 품고 있다. 언제 세상에 나올지는 모르겠다. 연출 제의를 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거 하면 1년은 올인해야 하니까, 좀 고민 중이다.
-아침에 굉장히 일찍 일어난다고 들었다.
=(영화 홍보 실장에게) 아침형 인간이라고 너무 홍보하는 거 아냐? (웃음) 보통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일어나서 운동하고, 학원 다니고, 시나리오나 영화 작업 꼭 4시간씩 하고 그런다.
-요즘은 학원에 뭐 배우러 다니나.
=영어 배우고 있다. 어느 정도 영어로 말하는 데 자신이 생기면 일본어도 공부하고 싶다. 어학은 계속 공부할 생각이다.
-빨리 결혼하고 싶지는 않나.
=결혼이야 항상 생각하고 있지. 어머니도 계시고, (김)효진이도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 서운하지 않게 잘 준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