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8일 서울 목동 빗물펌프장 _ <27년 후> 현장
빗물펌프장 지하에 이르니 뿌연 안개 너머로 당당히 서 있는 타임머신이 보였다. 타임머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색안경을 낀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익숙한 언어임에도 왠지 한번에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원숭이 동네에 놀러간 침팬지가 된 기분이랄까. 누군가가 색안경을 건넸다. 두대의 커다란 모니터를 바라보니 놀라운 3D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입체영상보다 신기했던 건 입체영상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제2회 서울국제초단편영상축제 3D입체영화 사전제작지원작 중 하나인 신태라 감독의 <27년 후> 촬영현장에는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카메라와 모니터는 사이좋게 쌍으로 걸려 있고, 두대의 카메라에서 들어온 영상을 하나로 합치는 기계, 입체 정도를 가늠하는 기계 등 생소한 장비가 모니터 아래서 반짝였다. 두눈을 크게 뜨고 찬찬히 뜯어보니 타임머신도 어딘지 수상하다. 모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샤워부스를 개조하다니! 신태라 감독은 “창의력을 짜내 만든 타임머신”이라고 자랑한다.
<27년 후>는 딱 한번만 이용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개발한 심 박사(김정식)가 복권 당첨을 노리고 1년 전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괴한의 침입으로 1년 전이 아닌 27년 전 북한으로 가게 된다는 내용의 SF영화다. 러닝타임 5분 안에 기막힌 반전도 숨어 있다(초단편영상축제는 ‘3분, 영화의 발견’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데, 3D는 5분의 러닝타임까지 허용한다). 사실 <27년 후>는 신태라 감독이 준비 중인 3D장편영화 <AM 11:00>의 여러 기술적 과제를 시험하기 위한 파일럿 필름이다. 마침 이날 <AM 11:00>의 시나리오 컨설팅을 맡은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출국하기 직전에 <27년 후>의 현장을 방문했다.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할리우드의 손꼽히는 시나리오 컨설턴트로, <파이트 클럽> <사선에서> 등이 그의 상담을 거쳐 완성됐다. <AM 11:00>는 보글러가 시나리오 컨설팅을 맡은 첫 번째 한국영화다.
올해 초단편영상축제는 3D 사전제작지원 프로그램을 신설해, 신태라 감독의 <27년 후>를 비롯해 이도영 감독의 <햄스터>, 김홍익 감독의 <수배전단>, 이상 3편을 3D 사전제작지원작으로 선정했다. 세 영화는 각기 다른 3D 장비를 사용했다. <햄스터>는 캐논 DSLR 카메라와 레드원 카메라까지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리그(3D업체 ‘NOON’에서 자체 개발한 장비)를 사용했고, <수배전단>은 파나소닉의 양안카메라 AG-3DA1으로 찍었다. <27년 후>는 <아바타>에 쓰인 소니 HDCT-1500 카메라와 3얼리티 리그를 사용했는데, 세 작품 중 가장 고가의 장비(억단위라 한다)가 동원된 ‘초단편계의 블록버스터’다. 고가의 장비는 모두 협찬. 신태라 감독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이유를 알겠다.
#10월11일 서울 용산의 한 가정집 _ <자백> 현장
“여기 뭐하는 거예요?” “영화 찍어요.” “무슨 영환데?” “단편이에요.” “얼마짜리?” “3분요.” “보려고 하면 끝나겠네.” 초단편영화 <자백>의 촬영이 진행된 한 가정집 대문 앞에서 영화 스탭과 동네 주민이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맞는 말씀. 3분 자장, 3분 카레를 요리하는 동안 영화 한편이 끝난다. 동네 주민이 현관에 들어섰다면 더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마룻바닥을 흥건히 적신 붉은 피. 칼에 찔려 쓰러진 할아버지. 할아버지 위에 올라타 확인 사살하듯 목을 조르는 할머니(김지영). 이 끔찍한 광경을 담고 있는 앙증맞은 DSLR카메라. 대체 이들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김태균 감독의 <자백>은 정지우 감독의 <자, 찍습니다>, 윤성호·박재민 감독의 <두근두근 영춘권>, 윤태호 감독의 <Breakfast>와 함께 초단편영상축제 DSLR 사전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다. 김태균 감독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지 않고 촬영감독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포커스 맞아?” “포커스 나갔어?” “포커스 괜찮아?”라는 말을 매컷 반복했다. DSLR은 카메라가 작고 가벼워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지만 심도가 얕아 포커스 아웃되기 쉬운 단점도 가지고 있다. 김태균 감독은 DSLR이 충분히 가능성있는 기기라면서도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상업영화와 똑같은 조건에서 DSLR로 카메라만 바꿔 찍는 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제작비 절감 때문이 아니라면 ‘나는 왜 DSLR로 찍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27년 후>의 현장을 찾아 스탭들에게 설렁탕 한 그릇씩을 대접한 초단편영상축제 서명수 집행위원장은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새로운 기술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영화제의 역할이자 지향점”이라고 말했다. 신태라 감독이 3D영화를 찍으며 시도한 실험의 결과물, 김태균 감독이 DSLR로 영화를 찍으며 했던 고민의 결과물은 11월5일부터 11일까지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열리는 초단편영상축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www.sesiff.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