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백진희] 사랑하고 싶어요
2010-11-23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페스티발>의 백진희

어린 게 아주 발라당 까졌다. <페스티발>의 여고생 자혜(백진희)는 자신의 팬티를 팔아 용돈을 마련하고, 운동장을 뛰던 중 걸려온 담임선생님(오달수)의 호출전화에 “아~아~아~”와 같은 숨찬 소리 반, 신음 반을 내며 선생님을 당황스럽게 한다. “자신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짝사랑하는 남자 상두(류승범)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를 넘어오게 하기 위해 자혜는 음료수에 발정을 유도하는 약을 타거나, “나 맛있겠지?”와 같은 노골적인 멘트를 날리는 등 섹시미를 뻔뻔하게 발산한다. 대담하거나 혹은 당돌하거나.

그런데 이 모습, 낯설지 않다.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2009)에서 엄마의 남자친구(박혁권)에게 “아빠? 웃기고 있네. 넌 우리 엄마의 섹스 파트너일 뿐이야”라는 독설을 날리고, 외국인 노동자 카림(마붑 알엄)의 월급을 떼먹은 악덕 사장의 뺨을 후려갈기는 여고생 ‘민서’(백진희)의 기운을 떠올리게 한다. 연약한 체구에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 당돌한 여고생, 자혜와 민서 모두 신예 백진희가 연기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여성 캐릭터’라는 평가가 과장은 아닌 듯하다. “<반두비>의 민서와 <페스티발>의 자혜는 당돌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다만 두 아이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다. 민서가 감정을 가슴속으로 삼키려는 의지가 강한 반면, 자혜는 상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첫 상업영화 현장, 마라톤 시합 하듯

자혜는 ‘민서’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페스티발>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백진희가 출연을 결심한 이유다. 시나리오에 묘사된 다소 높은 수위의 성적 대사와 행동은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남들은 자혜가 날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자혜는 아무에게나 몸과 마음을 주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상두만 좋아하고 따라다닌다. 다만 표현이 너무 적극적인 것일 뿐이다. 그게 매력적이라 출연하고 싶었고, (성적 표현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이는 “자혜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여야 한다”는 이해영 감독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카림의 자위행위를 대신 해주는 연기와 차 안에서 카림과 키스를 하는 연기를 유독 힘들어한, <반두비> 촬영 때와 사뭇 다른 자신감이다. <반두비>를 비롯해 <호야> <어쿠스틱>에서 단련된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자혜라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팬티를 사는 아저씨들에게 줄 편지를 직접 쓰는 등, 이해영 감독이 내준 숙제를 하나하나 하면서 캐릭터의 틀을 잡아갔다. ‘목소리 톤’에 신경을 쓴 것도 민서와 달라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민서가 ‘진짜’ 고등학생이라면 자혜는 상두 앞에서만큼은 여자가 되고 싶은 조숙한 소녀다. “민서가 약간 무뚝뚝하게 내뱉었다면 자혜는 코맹맹이 소리를 한다거나 ‘아저씨~’할 때 길게 끌어서 말하려 했다.”

확실히 첫 상업영화 현장은 혹독했다. 혼자서 작업했던 프리 프로덕션과 달리 촬영현장은 마라톤 시합을 뛰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작업 과정이 길게 느껴졌고,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할 수 있었다. 차이라면 신하균, 엄지원, 류승범, 심혜진 등, 언제든지 그를 도와줄 든든한 페이스메이커들이 옆에 있다는 것. 그러나 처음에는 선배 배우들이 부담스러웠다. “혹시나 선배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한참 위축되어 있는 그에게 선배 오달수의 한마디는 큰 힘이 됐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해.” 상대역인 류승범 역시 “위축되어 있던” 그에게 촬영 내내 친오빠처럼 배려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백진희는 성적 수위가 높은 연기도 즐겁게 하는 등, 조금씩 스퍼트를 낼 수 있었다. 영화의 초반부, 제법 듣기 민망한 신음을 내는 장면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운동장을 열심히 뛰다보니 저절로 나온 소리다. 그런데 나중에 녹음실에서 그 소리만 다시 녹음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신음을 냈다. 감독님께서는 얼굴 빨개지시고. (웃음) 외려 재미있었다.” 반면 상두에게 뺏은 곰인형을 팬티 속에 집어넣고 자는 장면은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촬영 당일 좀 두렵더라.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은 나보다 더 긴장해서 카메라 앞에 못 오시고.” 민망한 장면일수록 씩씩하게 촬영해야겠다고 생각한 백진희는 촬영장 밖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해영 감독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감독님! 왜 안 오시냐고요?! 빨리 찍어야죠. (웃음)”

성적으로 민망한 장면보다 겨우 20살이라는 어린 나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다. 영화의 후반부, 자혜가 어떤 일(?)로 경찰서에 출두한 엄마(심혜진)를 찾아와 볼펜을 툭툭 치며 “뭐가 이래 전부”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상황 자체가 낯선 백진희는 짧은 대사가 “입에 붙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감독님께 “어렵다”고 말씀드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선생님과 엄마는 경찰서에 잡혀갔고, 상두는 자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전부 이런 거’라고 말하는데 뭐가 어렵나”고. 5번의 NG 끝에 겨우 “오케이” 사인이 났지만, 감독님은 썩 만족스러워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따라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했고, 성년의 날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극중 자혜처럼 씩씩하게 마음을 잡고, 시나리오와 콘티를 읽으면서 페이스를 되찾았다.

평범한, 씩씩한, 당돌한

공교롭게도 백진희가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는 전부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서 자랐다. <반두비>와 <페스티발>에서는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여고생을(물론 <반두비>에서 엄마의 남자친구가 함께 살지만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지 않는다), <호야>에서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집안에서 친오빠 호야를 아버지 삼아 자라는 서야를, <어쿠스틱>에서는 가족이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한 소녀를 맡았다. 어쩌면 영화 속 그의 모습이 또래 나이답지 않게 당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씩씩한 캐릭터를 맡아서라기보다 엄마의 남편,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 역할을 동시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이를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많은 감독들이 배우 백진희에게 당돌한 이미지를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다른 배우들에 비해 작고 평범하게 보여서 그런 역할들을 주로 했던 것 같다. 나처럼 체구가 작은 아이가 사회나 상대방을 향해 큰 소리를 낼 때 더 효과가 커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항상 사랑을 갈망하는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일까. 백진희는 앞으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다. “특히, 사랑을 나누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실제로 사랑도 하고 싶고. 이번 크리스마스도 외롭게 보내야 할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다. 혼자서 사랑하고 싶다고 하면 뭐하나. 주변에 남자가 없는데. (웃음)” 혹시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그 남자가 <페스티발>의 상두처럼 사람이 아닌 인형을 좋아한다면 실제 백진희는 어떻게 할까. “삼자대면해야지. 인형을 앞에 앉혀놓고 남자한테 ‘(인형과 하는 것을) 난 다 봤다고 얘기할 거다. (웃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