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한석규] 그때 그 악당, 돌아오다
2010-11-26
글 : 강병진
사진 : 최성열
<이층의 악당> 한석규

한석규는 최근 극장에서 앞자리에 앉은 관객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거, 옛날에 한석규가 나왔던 CF 아니야?” 스크린에는 한석규가 아닌 엄기준이 등장해 있었다. 모 이동통신사 광고였다. 스님과 대나무숲을 걷던 도중 그의 스마트폰에 트위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엄기준은 ‘한석규의 목소리’로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에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약 12년 전, 한석규가 출연했던 같은 이동통신사 CF의 리메이크다.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의 대화에서 한석규는 ‘사람들이 광고를 통해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999년에 <쉬리>를 촬영할 때 찍었어요. 제가 출연한 CF 중에서 베스트를 꼽자면 그거죠. 1탄은 ‘스님’편이었고, 2탄은 ‘연인’편이었는데 그때 장진영이 파트너였어요. 내가 진영이를 바라보면 진영이가 웃는 그런 장면이었는데…. 저한테는 그런 추억이 있었네요. (웃음)” 한석규는 그동안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가 관객의 추억이 되길 바란다고 했었다. 그리고 관객은 그가 3년의 공백기를 끝내고 출연한 <이중간첩> 이후의 작품보다 <쉬리> 이전의 작품, 그리고 CF를 통해 더 많은 한석규를 떠올린다. 지금 한석규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현재진행형의 배우로 관객과 만나는 중이다.

<서울의 달> 복습의 중요한 이유

그의 18번째 영화인 <이층의 악당> 또한 ‘그때의 한석규’를 상기시킬 만한 작품일 것이다. 한석규가 연기한 창인은 세련되고 매너 좋은 도굴범이다. 창인은 조금 무리하면 편하게 할 일도, 시간을 들여 시끄럽지 않게 마무리하려는 습성의 남자다. <이층의 악당>은 그의 습성이 그의 발목을 잡는 상황을 그린다. 두 모녀가 사는 집에 숨겨진 20억원짜리 유물을 찾기 위해 창인은 그들의 이층집에 세를 든다. 자신을 작가라 속이고,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여자의 이야기를 쓴다”고 거짓말하고, 결국 집주인 연주(김혜수)의 마음을 유창한 언변과 좋은 목소리로 흔들어놓는다. “창인은 뭐, 내가 예전에 했던 인물을 섞어놓은 거죠. <그때 그사람들>이나 <서울의 달>에서 했던 캐릭터의 복습 같은 거예요. (웃음)” 하지만 복습의 효과는 상당히 큰 편이다. 무엇보다 <서울의 달>을 복습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 1994년에 방영된 이 드라마에서 그는 성공을 꿈꾸고 상경한 홍식을 연기했다. 언제나 ‘보이스 비 앰비셔스!’를 외치던 홍식은 돈 많은 이혼녀를 유혹하기 위해 춤과 사기를 배워 ‘제비’로 나선다. 그리고 성공에 다다른 순간, 서울의 뒷골목에서 죽는다. 당시 한석규는 비열하고 얍삽하기 짝이 없는 홍식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냈다. 카바레에서는 거짓된 표정과 화술을 일삼지만 앞집 여자 영숙(채시라)만큼은 진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번듯해 보이는 사기꾼인 동시에 꽃뱀에게 걸려 속옷만 입은 채 거리를 뛰어야 했던 애처로운 남자였다. <이층의 악당>을 연출한 손재곤 감독은 “그때의 홍식이 만약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다시 나타났다면?”을 가정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청년 한석규의 진화된 재등장. 한석규는 또한 감독의 이야기에서 어떤 창인을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홍식은 톡 건드리면 확 치고 올라오는 에너지를 가진 캐릭터였어요. 손재곤 감독도 그런 모습을 더 생생하게 담았으면 한다고 했죠. 그렇다고 창인을 근사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다만 창인은 홍식처럼 진폭이 넓은 인물이었던 거죠. 배우로서는 그런 인물을 할 때가 신날 수밖에 없어요.”

한석규 스스로 복습에 가깝다고 말하는 창인을 새롭지 않은 한석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층의 악당>에서 한석규가 일으키는 감흥은 관객이 배우에게 일방적으로 안기는 ‘변신’이라는 숙제를 무색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에 특화된 대사들, 진심과 거짓을 오가는 능청스러운 표정들, 몇몇 장면에서 던지는 애드리브는 딱 적정선 안에서 창인을 생동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애드리브를 하니까, 통 안 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게 신기했나봐요. (웃음)” 한석규가 변신을 시도했던 최근의 몇몇 작품과 비교해도 창인은 오히려 더 강한 공력을 전하는 캐릭터다.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의 한동수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백성찬처럼 장르에 귀속된 거친 형사들은 분명 한석규의 새로운 얼굴이었지만, 정작 신선함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이층의 악당>을 선택했던 이유에도 자신이 해온 변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있었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동안 완성시키고 싶은 건, 연기를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예요. 하지만 그 인물들은 연기를 안 하고 싶어도 결국 해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다른 것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캐릭터를 찾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하면서 평생숙제를 풀어보려고 고민하는 중이에요.”

평범한 도시 남자의 감정

한석규는 자신이 “서울 토박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만 7대가 살던 집안이에요. 그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도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도시의 정서를 잘 알기 때문에 도시에 사는 평범한 남자를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돌이켜보면 그는 한번도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사극인 <음란서생>의 윤서도 한양에 살고 있는 사대부였고, 고립무원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 <구타유발자들>에서도 그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사투리를 훈련해서 구사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지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 정서를 모르죠. 나도 어색하고, 관객도 어색할 거예요. 하지만 그분들이 도시인을 연기할 때는 나보다 불리하겠죠.”

그가 잘할 수 있다는 도시 남자는 <접속>의 동현 같은 말 그대로의 도시인이 아니다. 한석규는 과거 인터뷰에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던 작품”으로 <음란서생>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넘버.3>를 꼽았다. 각 작품의 정서적 키워드를 찾자면 본능, 좌절, 그리움, 그리고 욕망이다. 한석규는 도시의 삶에서 겪을 법한 모든 감정을 탐한다. “<꿈>의 조신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었죠. 비겁하고 겁쟁이고, 욕심과 유혹에 치여 살면서 피폐해지는 인물이잖아요? 이제 나는 중년의 나이를 갖게 됐어요.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이 도시에서 겪는 혼란과 아픔, 말하자면 희로애락의 감정들…. 그런 걸 잘 표현할 자신이 있다는 거죠.” 바꿔 말하면, 평범한 서울 남자를 연기할 때, 그가 원하는 연기를 안 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이층의 악당>을 선택한 이유 중 한 가지 또한 코미디라는 외피 안에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쓸쓸한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객이 <이층의 악당>의 창인에게서 감흥을 느낀다면, 그건 과거의 한석규를 추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석규의 본질적인 활력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잠시 웃고, 여전히 흥미롭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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