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재곤] <서울의 달>의 홍식이가 살았다면, 창인 같지 않을까
2010-11-29
글 : 이화정
사진 : 백종헌
<이층의 악당>의 손재곤 감독

2006년 <달콤, 살벌한 연인>을 발표할 당시를, 손재곤 감독은 이렇게 회상한다. “‘이게 영화야? 극장에 걸리는 거야?’라는 질문을 스탭들끼리도 할 정도였다.” 당시 10억원이라는 저예산으로 만든 이 ‘정체불명’의 영화는 4월 비수기, 스타파워가 크지 않은 배우 캐스팅이라는 약점에도 코믹, 멜로, 추리가 혼합된 특이한 영화로 입소문을 타며 230만 관객을 모은 화제작이 됐다. 반짝반짝한 감독의 재기가 무르익기까지 4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층의 악당>은 손재곤 감독이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신작이다. 집주인 연주(김혜수)와 그녀의 딸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세입자. 소설가를 사칭하고 있지만, 창인(한석규)은 20억원 가치를 가진 백자 잔을 찾기 위한 꿍꿍이를 가진 골동품 밀매범이다. 영화는 물건만 찾으면 끝날 것 같은 밀매범의 애초의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연속 해프닝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해프닝은 상황을 추스르다 결국 웃음이 되고, 웃음은 다시 멜로를 양산하고, 멜로는 다시 드라마를 풍성하게 해준다. 영화의 다채로운 결들은 손재곤 감독이 즐겨 본 추리소설과 캠프 무비와 스페인, 이탈리아산 호러물, 히치콕 영화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단출하고 소박한 재료가 전부지만 코믹과 멜로, 스릴러를 넘나드는 감독의 재주는 한층 세련되고 안정되어졌다.

-4년 만의 신작이다. 당시 김기덕 감독 같은 채산성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는데, 텀이 길어졌다.
=두 번째 영화로 준비 중인 작품이 있었는데 뜻대로 안됐다. <이층의 악당>은 그전에 써둔 것이었는데, 다시 보니 괜찮더라. 개봉 뒤 1~2년 정도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여유롭다가, 한 3년 되면 통장잔고가 보인다. 그럼 ‘너도 일 좀 해야 하지 않니?’라는 생각이 든다. 벼락치기하듯 그때부터 매달리게 되는 거다. (웃음)

-<이층의 악당>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초고에선 코믹이 덜한 영화를 생각했다. 그런데 대본에 대한 평이 좋질 않았다. 장면을 따로 보면 재밌는데 전체적인 이야기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었다. 뚜렷하게 고집하는 게 있는 건 아니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영화를 보고 나면 강원도 밀림 가서 그런 예술영화를 한번 만들어볼까, 코믹영화를 보면 또 그런 걸 한번 해볼까 이런 사람이다. 투자를 받으려면 코믹한 부분을 살려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설정도 간단하고, 재료가 많지 않은 편이라 풀어나가기가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전작은 설정 자체가 특이한 구석이 있어서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밋밋해지기 십상이더라.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할 거리를 던져줘야 했다.

-그 보완책인가? 전작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번 경우도 굉장히 전개가 빠르다. 컷수를 많이 두고, 순발력있는 진행을 고수한다.
=빠르게 가지 않으면 영화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겠더라. 그래서 촬영 때도 편집 때도 계획을 많이 세웠다. 물론 신민경 편집기사의 영향도 컸다. 전작도 같이 했는데 그분이 워낙 호흡이 빠른 편집 스타일 아닌가. 좀 빠르게, 서로 충돌하는 쪽으로 방향을 가자고 의논했다.

-밀매범이 주인공이다. 도덕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을 내세우는 모험을 감행했다.
=엘러리 퀸이나 셜록 홈스 같은 문고판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항상 이야기의 시작은 범죄. 누군가가 죽거나 사건이 있어야 시작이 된다. 그 이유인 것 같다. 범인이 누군가보다 범인의 심정으로 들어가서 악당이 곤란을 겪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 때도 최강희씨 캐릭터는 <탐정을 찾아라>란 소설에 등장한 여주인공에서 가져왔다. <이층의 악당>도 악당이 자꾸 곤란을 겪는 영국 추리소설 <악인은 프로페셔널>을 보고 구상했다.

-전작에서 주연 캐릭터를 살인마로 설정하면서 일정 부분 대중성을 상실한 전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위험이 다분하다.
=그래서 캐스팅에 주의하게 되는 거다. 대우(박용우)는 있을 법한 캐릭터지만 미나(최강희)는 다르다. 그래서 최강희라는, 살인을 저질러도 관객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중화시켜주는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선택한 거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연주는 처한 현실, 과거가 확연한 반면에 창인은 지금 처한 상황을 제외하곤 전체적으로 불안정하다. 따라서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모습이 달라질 여지가 큰 역할이다. 연기를 통해서 배우가 살아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야 했다.

-따로따로의 캐스팅보다는 두 배우의 조합을 가져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스필버그 감독이나 되면 모를까, 둘의 조합을 놓고 선택한다는 건 캐스팅 여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내가 한석규 선배님의 초기작을 많이 좋아한다. <서울의 달>의 ‘홍식’이란 캐릭터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다시 나타난다면, 창인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캐릭터를 설정했다. 김혜수씨는 일상과는 거리가 먼 스타의 이미지다. 아이가 있고 우울증을 겪고, 과부라는 김혜수에겐 가장 안 어울리는 상황을 주면 재밌겠다 싶었다. 무리하게 이미지를 바꾸는 것보다 그 자체로 히스테릭한 연기를 보여주는 거다.

-<닥터봉>에서 두 배우의 스크루볼코미디의 장점이 이 작품에서도 다시 재연된다. 말하자면 ‘대사발’이 좋다고 할까.
=평가와 달리, 난 의식적으로 통제하려는 편이다. 대사가 그 자체만으로 아무리 재밌어도 캐릭터나 상황에 맞지 않으면 걸러내는 게 맞다. 이야기의 중심, 캐릭터의 감정 지속 이런 것들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데, 대사로 초점이 모아지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 조심을 한다고 하는데도 아직 필요하지 않은 대사들이 많다. 촬영 때도, 편집 때도 많이 잘라냈다. 아까워서 한번에 확 자르지는 못하고 두고두고 생각했다가 빼는 식이다. (웃음)

-창인이 다른 밀매범에게 백자에 대해 설명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처럼 끊이지 않는 대사로 장면을 구성하는 건 본인 작품의 뚜렷한 색깔이기도 하다.
=내가 확실히 의도적으로 대사를 많이 쓰는 편이긴 하다. 영화에서 남녀가 블라인드 데이트를 한다고 치자. 프랑스영화에서는 10분여, 미국영화에서는 6분을 떠든다.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다. 반면 한국영화는 굉장히 간략하다. 엉뚱한 대사를 주고받고 바로 장면이 전환된다. 속도감을 주기엔 좋지만 인물 전달이 잘 안된 상태에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다보니 캐릭터들의 감정변화가 관객보다 두 단계 앞서게 된다. 이번에도 술집에서나 문 앞에서의 대화 등 몇몇 과정의 대화를 거치고 나서야 둘이 잠자리에 드는 걸 보고, ‘너무 반복이다’ ‘빼야 한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끝까지 한번 가봤다.

-이층집이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실내 촬영을 선호한다고 들었는데, 그 성향을 잘 반영한 작품이 됐다.
=난 취재를 잘 안 한다. 범죄자가 나온다고 실제 범죄자를 만나 과거 경험담을 듣고 이런 걸 잘 못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고, 이런 성격 때문에 대본에 실내가 많이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도 집 외경과 뜰, 외부계단을 제외하곤 모두 실내에서 촬영했다.

-창인이 지하창고에 갇혀 겪는 고초를 그린 장면은 그 성향 때문에 탄생한 명장면이다. 공간을 십분 활용한 코믹한 장면들이 더 나올 수도 있었겠다 싶은 아쉬움도 있다.
=세트 지을 때부터 아예 설계를 그 장면에 맞췄다. 근데 부담이 컸다. 관객은 한번 웃기 시작하면 계속 코믹을 원한다. 다시 이야기를 본래의 궤도에 올려놓는 데 방해가 될 여지가 큰 장면이었다. 사실 대본 때부터 이 장면이 독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도 무리해서 집어넣은 측면이 있다. 코믹 시퀀스가 확실히 들어가야 제작이 들어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서였다.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이 좋아해서 다행이다.

-의외다. 오히려 막판의 카체이싱 장면에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굳이 실내극을 바깥으로 끌고나와 스펙터클함을 보여주려 한 게 규모를 의식한, 어색한 시도로 읽혔다.
=감독이 됐으니 카체이싱 장면은 한번 찍어봐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웃음) 실은 이 영화가 세트와 실내 장면이 많기 때문에 작품으로 봐서 완결성이 깨지더라도 관객에게 외부 장면을 한번쯤 체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다. 카체이싱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주어진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도출이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당시 제작상황에선 특이한 성공사례다. 이번 작품은 투자에서 좀 자유로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첫 작품의 반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제작비가 당시로서는 굉장히 저예산이었지만 나로선 가장 큰 예산을 가지고 한 작품이었다. 지금은 정상적인 규모가 된 거다. 4년 전과 조목조목 비교해서 더 잘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축적해온 경험을 조금 더 활용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대중을 의식하는 듯하지만 화해를 모색하지 않는 결말로 고집을 보여준다.
=혼자 작품을 쓸 때는 대중은 1%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다 제작사와 만나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최대한 관객 입장을 의식하고 반영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최종적인 부분에 도달하면 결국 나의 재미를 찾게 된다. 결말은 내가 작품을 구상할 때 받은 인상을 전달하는 걸 택한다. 그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다. 이것만 명쾌하게 해주면 50만명은 더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도 잘 안된다. 결국 관객이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느냐 아니냐와는 동떨어진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층의 악당>은 사진작가 제프 월의 <인섬니아>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중년의 남자가 집기로 꽉 들어찬 주방 테이블 밑에 누워 잠이 들려 애를 쓰는 한장의 사진인데, 창인에 대한 논리적이지 않은 걸 심어놓으려고 했다. 작품 만들면서 이 한장의 사진을 몇년 동안 끄집어내고 또 끄집어냈다. 어쩌면 <달콤, 살벌한 연인>처럼 눈에 띄는 아이디어가 없는데도 이 작품을 하게 된 원동력도 그 이미지 때문이었다.

-다음 작품 계획은.
=아직 확실히 없다. 이 영화의 결과를 봐야 결정될 것 같다.

-결과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 건가.
=결과가 좋으면 이대로 밀고 나가고, 아니면 ‘이번엔 관객을 위한 영화를 하겠습니다’ 하고 방향을 바꾸는 거다. (웃음) 영화는 하고 싶다고 해서 다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꼭 하고 싶은 거 안 해도 된다. 대본 받아서 내 식대로 고치면 되니까. (웃음) 사실 저번 작품도 입소문으로 흥행을 했는데 내 영화는 왜 입소문에만 기대하는 걸까? 라는 생각은 한다. 어느 정도 장르 선호층이 있으면 투자하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만드는 입장에서도 좀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전작이 청소년 관람불가를 받으면서 흥행에 있어서나 심적으로나 타격이 컸다. 이번엔 15세 관람가인데, 부러 의식한 듯, 수위가 센 장면이 없다. 어쨌든 흥행엔 유리하다.
=물론이다. 이번엔 노력 많이 했다. 한석규 선배에게 욕설도 몇 가지 테두리 내에서만 하라고 하고, 신체 특정 부위는 담지 않았다. 15세 관람가가 나와서 대단히 감사하나, 심의 기준엔 불만이 많다. 노출이나 폭력에 대한 기준도 폐수오염에 대한 기준 정하듯 객관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위원들 개인의 윤리적 잣대를 매번 다른 기준으로 적용하는 식이다. 특정한 세대, 특정한 교양층의 가치관이 전 국민의 가치관이 되긴 힘들다. 무미건조한 기준이 적용된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말 했다고 내 영화 15세 관람가 물리는 건 아니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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