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니아 연대기] 바다를 지나 어른이 되다
2010-12-21
글 : 김용언
3D로 돌아온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3편, <새벽출정호의 항해> 런던 프리미어

지난 11월30일 밤,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은 뜨거웠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치기는커녕 사나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로 돌변했지만, 가뜩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나니아 연대기: 새벽출정호의 항해>(이하 <새벽출정호>) 대형 포스터가 광장을 빙 둘러싸고 내걸렸고 주연배우 조지 헨리, 스캔다 케이니스, 윌 폴터 등이 차례로 야외 무대에 올라 팬들에게 인사를 건넬 때마다 어린 팬들의 함성은 떠나갈 듯했다. 리무진을 타고 오데온 극장 앞에 도착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에 이르러 관객의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엘리자베스 2세 참석으로 시사회 열기 뜨거워

극장에 먼저 들어와 화면으로 중계 방송을 지켜보던 꼬장꼬장한 기자와 평론가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나왔다. 사실 좀 놀랍긴 하다.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 해도 어린 관객층의 눈높이에 맞춘 가족 판타지 블록버스터 시사회에 일국의 지도자 부부가 참석하다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원작자 C. S. 루이스가 20세기 최고의 영문학자로 꼽히는 인사이며, 가상의 판타지 국가 ‘나니아’가 영국의 이상향과 쏙 빼닮은 위엄있고 건강한 왕권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한 세계이기 때문에 일종의 홍보 마스크로서도 성공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일까?

에드먼드와 루시 페번시 남매의 골칫거리는 현재 이들이 머무르고 있는 친척집의 말썽쟁이 사촌 유스터스(윌 폴터)다. 어느 날 방 안에 걸려 있던 낡은 그림 속 바다에 낯선 배가 등장하고, 깜짝 놀란 에드먼드와 루시, 유스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림 바깥으로 바닷물이 넘치고…. 세 아이들은 어느새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커다란 보라색 돛이 걸린 금색 용 얼굴이 달린 뱃머리가 위용을 자랑하는 배 한척이 다가와 그들을 구조한다. “날 대체 어디로 데려온 거야?!” 유스터스가 울부짖자 사티로스가 나선다. “넌 나니아 왕국의 새벽출정호에 승선했다.” 나니아의 용감한 왕 캐스피언(벤 반스)은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들이었지만 지금은 실종된 7명의 영주들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사자 아슬란(목소리 연기 리암 니슨)에게 받은 마법의 검을 각각 소지한 7명의 영주가 실종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 녹색 연기가 피어올라 나니아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 루시, 에드먼드, 캐스피언, 유스터스는 이제 5개의 신비한 섬을 떠돌며 신비롭고 사악한 적들과 맞서 실종의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심리적 갈등 부각

<새벽출정호>의 원작 소설, 즉 <나니아 연대기>의 출간 순서상 3권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1952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원작 소설은 출간 당시의 시대상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니아를 중심으로 한 씩씩하고 용감한 소년 소녀들의 모험담이자 종교적 믿음의 알레고리이며, 현실 세계와의 접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 <새벽출정호>는 의외로 2차 세계대전 무렵의 시대배경을 명시한다. 에드먼드(스캔다 케이니스)는 징집 행렬에 끼어들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퇴짜맞는다. 주변의 성인 남성들은 킬킬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에드먼드는 “난 (나니아의) 왕인데 말이야!”라며 굴욕감을 감추지 못한다. 성인 남성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에드먼드의 욕망에는 ‘나니아의 위대한 제왕’으로 불리던 형 피터(윌리엄 모즐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한편 사춘기 소녀로 성장한 루시(조지 헨리)는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아름다운 언니 수잔(안나 팝플웰)을 부러워한다. 영화 첫머리부터 과감하게 시도된 스토리상의 변화는 <새벽출정호> 전편에 걸쳐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번시가의 손위 아이들, 피터와 수잔이 전편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말미에 너무 나이가 많기 때문에 더이상 나니아로 돌아올 수 없다는 비보를 들은 것처럼, 에드먼드와 루시 역시 더이상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을 전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는, 현 세상에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사춘기에 접어들었음을 명시한다(실제로 소설상 4편 <은의자>에서 나니아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은 사촌 유스터스다). 이들의 흔들리는 심리는 <새벽출정호> 전편에 걸쳐 주요한 갈등의 원인으로 제공된다.

또한 원작 소설 <새벽출정호>는 신비로운 섬을 떠도는 일행의 이야기를 담다보니 유독 에피소드적으로 분절된 형식을 취한다. 감독 마이클 앱티드(<넬> <이너프> <007 언리미티드>)는 처음부터 이 원작을 고스란히 영화화하기는 힘들 것이라 예상했다. “상업영화라면 A단계에서 B로, 그 다음 C로 차근차근 넘어가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원작 <새벽출정호>에선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추동력이 부족했다.” 마이클 앱티드와 각본가들은 3편의 줄거리에 최대한 충실하되, 루시와 에드먼드에게 좀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면모를 부여했으며 더불어 4권 <은의자>의 주요 장치인 위협적인 녹색 안개, 영주들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는 안개를 극의 절정에 배치함으로써 클라이맥스를 강조하는 방향을 택했다 “사실 C. S. 루이스 재단에선 이야기를 이만큼 바꾸는 것에 다소 불안해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준 스크립트와 함께 소설 <새벽출정호>를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옮긴 스크립트도 함께 보여주었다. 아마 결국 재단쪽에서도 후자의 스크립트가 긴장감이 떨어지고 느슨해진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에 동의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 합류한 악동 유스터스 생기 불어넣어

<새벽출정호>의 장점이자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전작들과의 일관성 문제다. 1, 2편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던 페번시가의 맏이 피터와 수잔이 빠지고(이들은 회상과 환상신에서만 아주 잠깐 등장한다), 나머지 에드먼드와 루시와 함께 새로 합류한 유스터스의 화학작용이 어떻게 두 사람의 빈자리를 메울 것인가가 중요해진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다섯개의 섬을 방문하면서 만나는 새로운 종족과 마법의 세계 역시 전편과 더불어 너무 튀지 않게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먼저 전자의 경우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인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의 주인공 악동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윌 폴터는 심술 궂은 불평분자 소년에서부터 뜻하지 않게 ‘황금의 섬’에서 겪은 저주로 용으로 변신하는 크나큰 경험을 하게 되는데, 원작의 짧은 에피소드와 달리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클라이맥스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모두 싫어하던 유스터스가 역시 모두 두려워하는 존재인 용으로 변신한 다음, 그때까지 앙숙이던 용감한 생쥐 리치리프(<뜨거운 녀석들> <하우 투 루즈 프렌드>의 사이먼 페그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변화해가는 과정은 영화 전편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변화를 담당한다. 용이 된 걸 서러워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유스터스에게 리치리프가 “울지 마, 넌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운명을 갖고 있는지도 몰라”라고 위로를 건네는 장면은 따뜻한 감동을 전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조금씩 의견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10대 초반까지를 타깃으로 한 가족판타지영화다운 설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은 아무래도 ‘마법사의 정원’일 것이다. 마법사 코리아킨의 마법에 걸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외다리 난쟁이 종족 더플퍼드가 ‘쿵쿵’ 하는 소리만으로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루시를 납치하는 장면, 그리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마법사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스르륵 열리는 장면, 루시가 코리아킨의 저택에 들어가 이들을 마법에서 깨어나게 해줄 주문을 찾는 장면에서 보이는 신비로운 특수효과들은 행복한 판타지의 현현이다. 혹은 ‘어둠의 섬’에서 겪는 거대한 물뱀과의 사투는 다소 심심하게 진행되던 전반부의 분위기에서 해양 모험담이면 으레 상상하게 되는 스펙터클을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전반부 노예상인의 섬이나 결말부의 아슬란의 섬 부분은 높아진 기대치에 다소 미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나니아 연대기> 1, 2편을 모두 연출한 앤드루 애덤슨이 프로듀서로 물러나고 새로이 연출직을 맡은 마이클 앱티드가 지금까지 성인 취향의 장르물에서 장기를 보여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3편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영화로 접한 <새벽출정호>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판타지영화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무려 ‘본드’ 시리즈에 참여했던 앱티드 감독의 성숙한 시선이 그리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버전이니 안심해도 좋다. 2D로 촬영한 다음 1년 동안 3D 컨버팅을 마친 <새벽출정호>는 두 가지 버전으로 각기 극장에서 상영된다.

사진제공 이십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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