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드>가 새롭고 독창적인 영화라는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땅속에 묻힌 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단 한명의 인물로 95분을 버티는 설정, 그리고 그것이 결핍이 아닌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보인다는 점이 그런 평가의 근거들이다. 이미 몇몇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유사한 영화들의 계보를 나열하면서 이런 시도가 얼마나 신선한지에 대해 묻고 증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아이디어에 대한 찬사에 가려진 지점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그래서 더욱 말해지지 않는) 물음을 마주하는 일이 시급해보인다. 우리가 <베리드>에서 보고 있는 건, 정확히 말해 체험하는 건 무엇인가. 혹은, 이 미스터리 스릴러는 관객에게 무엇으로 호소하고 있는가.
이 영화, 기대보다 답답하지 않은걸
이 영화가 안기는 폐소공포증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좁은 관 안에서 영화를 진행시키는 이 단순한 설정의 영화가 관객과 벌이는 유일한 게임은 어쩌면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베리드>를 보고 폐소공포증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고 토로(실은 감탄)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엄살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 안에서만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영화와 관객이 동의하는 전제가 폐소공포증을 불러오는 것이지, 그 전제의 영화적 현시에서 그런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지는 않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사방이 꽉 막힌 관 안에서는 이 영화의 촬영이 성립될 수 없다. 실제라면 불가능한 앵글들의 자유로 하나의 공간, 한명의 인물이라는 한계를 상쇄하고 있고, 영화는 그걸 그다지 숨길 생각이 없다. 이를테면 관 천장이 균열되면서 모래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인공은 그걸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천장 위로 쭉 올라가서 주인공을 내려다본다. 혹은 누워 있는 주인공에게는 불가능해보이는 시점 숏도 종종 등장한다. 영화 자신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지지하는 자들도 그걸 이 영화의 결함이 아닌, 제한적 환경을 돌파하는 영리한 영화적 전략으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기대보다 답답하지 않다. <베리드>가 유사한 장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주인공의 손에 직접 카메라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점, 혹은 그의 모습을 고정된 앵글의 폐쇄회로 화면들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불평하는 평을 읽은 기억은 없다. 당연하다. <베리드>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주인공과 폐소공포증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겪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위치로 더 기울어져 있다. 다만, <베리드>가 그 극한의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감흥, 그리고 우리가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매달리게 되는 긴장감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다뤄질 때 생긴다는 사실만큼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허구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려는 비틀린 욕망이 여기 작동한다. 즉 누군가 이 영화를 즐긴다는 건, 이 영화의 ‘현장감’을 믿고 즐기려고 필사적으로 버틴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것이 실시간 현장이 아님에도 실시간 중계처럼 착각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에게 있고, 그런 우리의 욕망을 그럴듯한 현장감으로 자극하려는 욕망이 이 영화에 있다.
여기에 없는 적의 육체
많이 알려진 것처럼, <베리드>는 주인공의 과거를 설명하는 플래시백이나 땅 위의 스펙터클을 단 한차례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 대한 찬사는 영화가 공포를 불러오는 방식, 즉 희박한 구성요소로 포화상태의 감정을 양산해내는 매우 경제적인 발상의 전환에 맞춰져 있다. 9. 11 테러의 트라우마를 닳고 닳은 방식으로 스펙터클화하는 데 몰두했던 할리우드의 지난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이 영화의 방식이 다르기는 하다. 한 남자가 눈을 뜨니 땅속의 관 안이고 옆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다. 그 핸드폰으로 납치범에게서 전화가 오고, 납치범은 돈을 요구한다. 남자는 핸드폰으로 가족, 911, 국방부, 회사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이 상황에 책임질 의지가 없거나 관료주의적이거나 무력하다. <베리드>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한 공간 안에 갇힌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놓여진 상황은 9.11 이후의 미국이다, 혹은 이라크다. 그런 사건들의 영화적 현시를 생략했다 뿐이지, 이 어두운 땅속의 상황은 굳이 이 영화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포스트 9.11과 관련된 여러 이미지들에 기대고 있다. 이 극한의 장르영화가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 않으면서 현실정치의 징후를 환기하는 방식이 신선하다는 일련의 견해에 동의하기 위해서 이 말을 꺼낸 건 아니다.
오히려 <베리드>의 관에서 남자가 벌이는 사투를 영화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9.11 이후의 상황들을 보여주지는 않으면서도 명백히 관 밖에 배치한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타협처럼, 도피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저예산 영화의 경제적인 선택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이 쉽게 신선하다고 판단하는 그 지점은 다시 질문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그걸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무엇인가.
아무리 한 공간, 한 인물만으로 구성되는 영화라도 이런 장르에는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있는데, 그건 안타고니스트의 존재다. 일반적인 경우,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형상이나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이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베리드>에서 적의 존재는 의외로 너무 알기 쉽다. 그 적이 주인공을 납치한 이라크인이든, 그를 배신하는 미국 회사든, 혹은 사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미국 정부든, 그들은 전화 속 음성의 억양만으로도 그 정체를 쉽게 짐작 가능한 존재들이다. 혹은 그들이 주인공에게 왜 그러는지는 영화적으로 딱히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하다(그런데도 영화는 시선의 균형을 의식한 듯, 미국 구조대원의 입을 통해 납치범들의 입장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베리드>는 현실정치를 상투적인 이미지로 가시화하지 않을 뿐이지, 상투적인 대사들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사실, 여기에 내용적으로 새로운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주인공을 땅속에 가두고 죽게 내버려두는 진짜 적은 누구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베리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우리가 적의 정체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적의 실체를 볼 수 없다는 점, 즉 여기에 적의 육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9. 11 이후의 세계라는 사건과 타자로서의 적의 육체성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 이 영화가 경제적 이유에서건 뭐건 그걸 자신의 특이성으로 밀어붙이며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전형적인 형상으로 반복 재생되는 것만큼, 아니 이제는 그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볼 문제다.
희망 아닌 호기심으로
이 영화에서 사건과 타자는 모두 목소리로만 등장하고,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기계에 녹음된 텅 빈 음성으로만 존재하는데, 그때 이들의 존재는 땅속에서 몸만으로 벌어지는 상황의 현장감에 비한다면 가상으로 느껴질 정도다. 관 속 주체의 시간과 관 밖 타자의 시간은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긋나거나 분리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타자의 육체, 사건의 실체가 사라진 자리는 이제 오로지 주체의 몸뚱이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그 몸은 산소와 핸드폰 배터리의 고갈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는 주체의 육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실재이다. 혹은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만이 실재이다.
내 생각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주인공이 언젠가 살아서 관 밖으로 나갈 거라는 희망 때문에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것 같다. 95분간의 처절한 싸움 뒤에 그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베리드>에서 주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단 하나, 죽음 그 자체다. 차라리 그의 안타고니스트는 그에게 죽음의 시간을 알리고, 지연시키고, 때로는 죽음의 순간을 중계하고(동료가 처형당하는 장면), 다시 재생하고, 마침내 그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이미지화하는 핸드폰이 아닐까. 핸드폰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애초에 성립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핸드폰은 주인공에게 남겨진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후의 물리적 현존, 혹은 최소한의 육체성마저 추상화하는 죽음 기계다. 또한 관객인 우리에게 그것은 죽음과 접속하는 유혹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리드>에 대한 열광이 새로운 장르적 형식에 대한 것이라면, 그 새로운 형식의 다른 말은 죽어가는 육신을 전시하고 관찰하는 영화적 틀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즐기고 기대하는 현장감이란, 사건의 현장감(재현)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생생하게 구경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장감, 실은 사건과도, 타자와도 분리된 것이다. <베리드>를 보며 나는 이 시대, 영화가 사건과 타자의 육신을 지운 자리에서 무엇과 싸우는가, 혹은 어떻게, 무엇으로 이야기를 버티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등장인물의 구원(결국 주인공이 살아남는지, 죽는지의 여부)이 아니라 영화의 구원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근심하게 된다. 지금으로서 내게 <베리드>는 영화의 구원을 포기하는 데서 장르적 쾌감을 발견한 영화이며, 설사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일련의 평가처럼 참신함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참신함을 나는 즐기지 못하겠다.
남다은 빛나는 영화로 올해 마지막 객잔을 마감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관 속에서 마무리하게 되다니... 어쨌든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