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을 만났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지난 1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일체 인터뷰를 거절해왔다. 긴 시간 동안 자숙과 반성, 그리고 오해와 억측 속에 시간을 보내면서 그저 가까운 영화인들의 제의가 있을 때마다 가끔 스크린에 모습을 비쳤을 뿐이다. 최근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로 등장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파주>, 주인공 사이를 오가는 마음씨 넓은 형사로 출연한 <무적자> 등이 있었고, ‘노동해방’을 외치는 해고노동자로 출연한 <죽이러 갑니다>가 오는 1월20일 개봉할 예정이며 현재는 <모비딕>을 촬영 중이다. 여전히 스크린을 떠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를 보면서 만남을 청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뤄졌다.
이경영과의 만남은 갑작스레 이뤄졌다. 그의 출연작들이 개봉할 때마다 인터뷰 요청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매번 이뤄지지 않았고 늘 ‘아쉽지만 예상했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지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죽이러 갑니다>가 1월20일 개봉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우연히 만나게 된 박수영 감독을 통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작전’을 모의했다. 의외로 그가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마 박수영 감독과의 깊은 친분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으리라. ‘편한 자리’라는 것에 그는 동의했고 일대일 인터뷰는 너무 형식을 갖춘 것 같으니 박수영 감독과 주연배우 김병춘 등 <죽이러 갑니다>의 몇몇 스탭, 배우들과 만날 때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 일산으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치 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90년대를 호령한 대표적인 남자 배우
“내가 <씨네21> 표지를 마지막으로 했던 게 언제였더라?” 마치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웃는 얼굴로 기억을 더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당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낼 것도 없이 지금의 송강호, 이병헌, 강동원이 그러하듯 당연히 표지 촬영을 했던 배우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 <있잖아요 비밀이에요>(1991), <사의 찬미>(1992) 등을 시작으로 충무로의 대표 남자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뒤 <하얀 전쟁>(1993), <게임의 법칙>(1995), <세상 밖으로>(1995), <코르셋>(1996), <삼인조>(1998) 등 쉽게 말하면 1990년대는 그의 주연영화들이 매해 3∼5편씩 나오던 시절이었다. 이런 얘기를 꺼내니 한참 쑥스러워하던 그는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이경영이 복수를 꿈꾸는 해고노동자로 출연한 <죽이러 갑니다>는 지난해 김태우, 이정진 주연의 <돌이킬 수 없는>을 연출한 박수영 감독이 그보다 앞서 만든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이경영을 꼭 캐스팅하고 싶었던 그가 이경영의 한양대 동문이기도 한 한지승 감독을 찾아가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결국 출연까지 이르게 됐다. 무려 띠동갑이 넘게 나이차가 나는데도 이제는 종종 깊은 영화 얘기를 나누는 허물없는 형, 동생 사이가 됐다. 박수영 감독이 “선배님하고는 너무 통화하기가 힘들어요. 전화 좀 받으세요”라고 핀잔을 주자 “난 원래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받을 상황이 아니면 잘 안 받게 돼”라는 뭔가 이상하지만 왠지 그다운 답이 돌아왔다. 김병춘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이경영이 자신보다 젊어 보인다는 사실이 못마땅해 보이는 것 같고, 이경영은 그런 그를 ‘정말 최고의 연기자’라 치켜세운다. <죽이러 갑니다>에서 해고노동자 이경영은 사장(김병춘) 가족이 휴가를 떠난 별장까지 찾아가 복수를 감행한다. 극단 목화 출신의 김병춘은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교련선생 ‘괴뢰군’, <바람의 전설>(2004)에서 댄스 스승 ‘박 노인’, <극락도 살인사건>(2007)에서 스님 등으로 출연해 익히 얼굴을 알린 개성파 배우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영화에 대한 얘기를 더 펼쳐놓기 시작했다. 이경영이 “늘 100m를 달리는 배우에게 200m에 도전하라고 하는 건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인데 갑자기 허들 경기에 나서라고 하는 건 힘에 부친다. <죽이러 갑니다>는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었다”고 말하자, 박수영 감독은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이 아는 이경영이라는 사람을 까뒤집어보고 싶었어요. 남들이 안 어울리는 캐스팅이라고 말할 때 오히려 더 기뻤죠”고 말한다.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은 김병춘이나 다름없는데 이경영은 “아무래도 내가 최고 연장자라서 포스터 상단에 이름이 꽂힌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어쨌건 박수영 감독과 김병춘은 ‘너무 아까운 연기자’라며 제발 자주 좀 보자고 보챈다. 심지어 박수영 감독은 “지금 이경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과거 존 보이트의 중년을 보는 것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져요”고 띄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경영은 최근 어쩌다보니 출연했다고 하는 작품들의 리스트를 조심스레 읊기 시작한다. 이현승 감독의 <푸른 소금>에는 전국 폭력조직 전체의 보스, 황정민이 기자로 출연해 음모론을 파헤치는 <모비딕>에서는 그 음모론 속의 주요 인물로 나온다. 그리고 <과속스캔들>을 만든 강형철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써니>에도 잠깐 출연했단다. 이처럼 <죽이러 갑니다>를 비롯해 올해 상반기에 보게 될 그의 영화가 벌써 4편 이상이다. 김병춘은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입을 뗀다. “거의 뭐 옛날 명계남 선배 수준으로 나오시네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필요 이상의 죄인과 진실을 정정할 마음이 없는 언론
이경영을 보며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단지 그 재능이 아깝고 그 연기가 보고 싶다는 욕구, 10년이 지났으니 용서를 해야 한다는 걱정과 심려도 있지만,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진실’을 두고 그의 억울함을 이해하는 시선도 많다. 아니 그는 정말 필요 이상의 죄인으로 살아왔다. 이런 얘기는 그의 얘기를 옮겨 적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해 황인뢰 PD의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 출연이 좌절됐을 때 자신의 미니홈피에 글을 남긴 것 외에는 일체 구구절절 말한 적이 없다. 충분히 항의하고 스스로를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옛날 사람’이다. 막내아들인 자신의 일로 홀어머니가 엄청난 상처를 받고(오십이 다 된 나이에 그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왔고 결국 어머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엄마님’은 지난 2006년 아들의 복귀다운 복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미 촬영 중인 영화에 더이상의 피해를 주기 싫었으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말하자면 그는 별것도 아닌 일로 기자간담회를 여는 ‘요즘 연예인’이 아닌 거다.
<돌아온 일지매>처럼 ‘돌아온 이경영’이 되고 싶었다가 좌절한 그 심경은 자신이 미니홈피에 남긴 글과 같다. “때론 내 지난 시간에 분노한 이들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난 성범죄자가 아니라고. (중략) 때론 지난 시간에 항소를 했더라면 부끄러움은 씻지 못하겠지만 범죄자의 오명은 씻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했다. 엄마님께 불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맘 아프게 하고, 사람들에게 실망시킨 죄로 받겠다고 했던 게…. (후략)” 이후 실제로 그것이 원조교제가 아니고 성매매가 아니었음은 충분한 정황과 증거들로 밝혀질 일이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 상대 여성이 이경영에게 사과를 전한 일도 있었지만 그것은 딱히 기사화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은 기정사실로 굳어졌고 신나게 기사를 써댔던 기자들은 이미 지난 일을 딱히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랑 관계없는 일이니까’.
가장 쉽게는 지난해 있었던 이른바 ‘최민수 노인 폭행 사건’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을 다룬 <MBC 스페셜>을 통해 본 것처럼 최민수가 최종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입증됐음에도 여전히 최초의 기사, 그러니까 ‘최민수가 70대 노인의 얼굴을 수차례 주먹으로 폭행하고, 차에 매달고 질주했다’는 한쪽의 거짓된 일방적 얘기가 그대로 기사화되면서 그는 희대의 패륜 배우로 낙인찍혔다. 정말 모두가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다른 많은 제보자들의 증언이 새로 더해지면서 점차 사실은 교정돼갔다. 하지만 이미 찍힌 ‘낙인’의 힘은 무서웠다. 게다가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배우 개인의 특성상 그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인터넷을 잘 모르는 ‘옛날 사람’이니까. 게다가 사건을 겪으며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고 있었다. 어쨌건 최민수는 상대가 노인이었기에, 이경영은 상대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말문을 더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더 자신을 항변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음에도 ‘공인’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회계층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라는 정서에 비춰 더이상 ‘몹쓸 놈’이 되기 싫었던 거다. 이처럼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 불분명한 소문과 기사로 확산되면서 어떻게 한 개인이 파탄에 이르는지를 이미 우리는 수차례 보아왔다.
실제로 이경영은 물론이고 자리를 함께한 박수영, 김병춘을 비롯해 제작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벌써부터 ‘이경영, 주연 복귀?’, ‘활동 재개?’라는 식의 인터넷 기사들이 양산되고 있다. 여전히 그의 행보는 특정한(?) 종류의 사건과 기사를 파파라치처럼 좇는 일부 인터넷 매체의 시선 안에 있다. 무턱대고 찾아오는 기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가십’과 ‘흥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옛정으로 출연하게 된 영화들
<파주>에서 잠깐이지만 이경영이 보여준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를 어서 다른 영화에서 만나고 싶다는 욕구를 불타게 했다. 그 불길한 표정과 애매모호한 웃음은 영화 전체를 감싸고 도는 그 무엇이나 다름없다. 박찬옥 감독에게 보스 역할로 그를 추천한 심재명 대표는 과거 영화 홍보를 하던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사람이다. 명필름의 창립작인 <코르셋>의 주인공이 바로 이경영이기도 했다. <사의 찬미>를 준비하던 김호선 감독에게 홍난파 역할로 이경영을 추천한 사람도 바로 그다. “<파주>에서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을 보여줬다”고 말하는 그는 “이경영에게는 이전 한국 남자배우들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당대 동료 남자배우들이 하나같이 영화를 장악하고자 애쓰는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처럼 되고 싶어 할 때 그는 휴 그랜트나 존 쿠색 같은 자연스럽고 다감한 스타일로 다가오는 남자배우였던 것. <세상 밖으로>나 <할렐루야>, <하얀 전쟁>이나 <게임의 법칙>에서 그는 주연이나 다름없음에도 맛깔나게 또 다른 상대 주연배우 속으로 스며들어 든든하게 받쳐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남자배우들을 찾기 힘들다.
<파주> 출연 제의를 하러 찾아온 심재명 대표, 박찬옥 감독에게 이경영이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냥 계셔주시기만 하면 돼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돼요.” 말하자면 최근 출연작들이 꽤 되지만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기보다 대부분 자기를 잊지 못해 찾아온 ‘옛정’으로 응하게 된 경우가 많다. <죽이러 갑니다>는 박수영 감독의 삼고초려가 있었고 <무적자>는 역시 한양대 동문인 송해성 감독이 “형, 할 일 없으면 부산 와서 술이나 먹고 가”라는 부탁에 응하다가 출연하게 된 경우다. <푸른 소금>도 <시월애>(2000) 이후 거의 10년 만에 영화 찍는 동생 이현승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망설이지 않고 응했다.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고자 했던 것도 제작사 대표인 강석현(배우 신성일의 아들이자 <비오는 날의 수채화>부터 시작된 오랜 인연의 배우)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일지매(정일우)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는 고수이자 달이(윤진서)의 아버지로 출연해 촬영까지 다 끝낸 시점에 ‘출연 불가’ 방침으로 인해 그 역할은 동갑내기 배우 강신일로 교체돼 부랴부랴 재촬영을 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형, 안된대. 정말 미안해”라는 강석현 대표의 전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드라마 <불꽃> 등을 함께한 김수현 작가도 그의 복귀를 끝까지 도운 사람 중 하나다. 지난 2008년 ‘서울 드라마 페스티벌 2008'에 참석한 김수현은 “이 자리에 나오며 문득 이경영이 너무 오래 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용서하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해 너무 잔혹하게 매도한다”고도 했다. 이후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이경영을 복귀시키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공고한 금지 규정에 묶여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이제 드라마는 꿈도 안 꿔요. 김수현 선생님한테도 다른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데 선생님께서 왜 그러시냐고 그랬죠. (웃음) 그랬더니 선생님이 ‘경영씨는 가만히 있어.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러셨어요. 그렇게 선생님께서 계속 밀고 나갔지만 잘 안됐나봐요”라는 게 그의 얘기다.
좋은 배우로 많은 영화와 만나고 싶은 욕심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경영은 1960년생으로 어느덧 쉰살이 지났다. 이른바 주연급 남자배우로 안성기가 1952년생으로 최고참이라면 1953년생 문성근, 1962년생 최민식, 1964년생 한석규, 1966년생 박중훈, 1967년생 송강호, 1968년생 설경구와 비교해도 선배다. 사실 이경영을 포함해 그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한국영화의 계보가 그려지는 것 같은 뿌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의 빈자리가 더욱 아쉽기도 하고.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가 맹활약하던 시기에 저 후배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을 보면서 ‘다른 배우들 어쩌라고 저러나’ 하는 생각에 정말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 이제 최민식이나 송강호 같은 친구들하고 경쟁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주변에서 도움 주는 캐릭터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웃음) 그들이 내가 활동 많이 할 때 안 나타난 게 나로서는 너무 고맙죠.”
말하자면 이경영은 안성기, 문성근, 박중훈과 함께 90년대 한국영화를 지탱해온 배우였다. 그래서 한때는 그의 퇴장이 마치 운명적인 시대와 세대의 변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느끼는 감회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다. 그는 전에 안성기 선배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90년대에 충무로에서 연기의 메디치 가문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금 후배들이 나올 때까지 징검다리 정도는 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으로도 좋고 충분해요”라고. 그래서 그는 요즘 신인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오히려 편안하다고 한다. “연기를 잘하기보다 철든 배우가 되고 싶다. 내 나이에 맞는 주름을 잘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 그의 퇴장이 안타까웠던 데는 그가 연기는 물론 당시 감독의 꿈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으로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못다한 감독의 꿈도 있다. ‘외팔이 왕우’에 흠뻑 빠져 살았고 지금도 무협만화 한권 정도는 읽어야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는 엄청난 무협영화 마니아다. 최근작 중에서는 <검우강호>를 보며 모처럼 가슴이 설렜다. <귀천도>(1996)로 감독 데뷔한 것도 바로 그 무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연출작 <몽중인>(2001) 역시 애초에는 영화의 전반과 후반을 나눠 주인공인 무협 시나리오작가 윤호(이경영)가 써내려가는 인물들이 현재로 넘어오는 구조였다. 그러고보니 최근 '폭풍 성장'이라는 검색어로 화제가 된 <살인의 추억>과 <카페 느와르>의 정인선이 바로 <몽중인>에서 그의 딸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그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우선이고 여전히 더 많은 영화와 만나고픈 욕심이 있다. 그는 지금도 영화현장에 나가면 생소함과 낯섦을 함께 느낀다. 그건 수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하던 젊은 날의 자신이나 지금의 자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안성기, 이경영과 <하얀 전쟁>을 함께했던 정지영 감독의 얘기를 들려준다. “안성기 형은 캐릭터에서 기대하는 100%의 가능성을 거의 준비해와서 어떤 상황과 대사를 맡겨도 안전하대요. 그런데 이경영은 왠지 불안하대. (웃음) 얼굴을 보고 있으면 뭘 준비해왔은지 알 수도 없고 애초에 100%는 기대도 안 한대. 한 70~80% 정도 해주면 다행이겠거니 생각하는데 아주 가끔 120%를 할 때가 있어서 깜짝 놀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생소함과 낯섦이 지금껏 그가 영화를 해온 힘이기도 하지만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더 절실하게 그렇게 느낀다. 그리고 “배우는 원래 가지고 있는 노력과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결국 좋은 작품을 만나야 트이게 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오랜 생각이다. 그렇게 그는 영화배우로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지금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고 있다.
<씨네21>에서 회고록을 연재한 적 있는 박중훈은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에서 이경영을 처음 만났고 그 인연은 <게임의 법칙>과 <할렐루야>는 물론 모 정유업체 CF까지 이어졌다. 박중훈은 이경영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내는 한국영화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배우다. 그의 진실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다. 여전히 오랜 고통을 겪고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며 “경영이 형을 현장에서 배우로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2011년, 더 많은 영화에서 그를 만나고 싶고 실제 그렇게 될 것 같다. 새해부터 뭔가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PS. 아마도 이경영의 영화계 최고 ‘절친’으로 김민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문자나 통화는 ‘지랄’로 시작해 ‘지랄’로 끝난다. 이경영이 영화계를 떠난 것이나 다름없을 때 <종려나무숲>(2005)에 출연하도록 도운 것도 바로 그다. 그는 여전히 이경영을 ‘따거’라 칭한다.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마스이브에 김민종과의 통화는 이뤄졌다. 그날 자리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에서 ‘북한의 오렌지족’이자 남한에 귀순해 완벽하게 적응한 전직 북한 첩보요원 ‘김기수’역의 김민종의 연기에 대해 극찬을 늘어놓았다. 그는 정말 이전과는 다른 헐렁한 모습으로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북한 사투리가 서툴다며 “기존에 없던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잘해도 칭찬받기 힘드니 더 깊이 돌파해야 한다”는 게 김민종에게 건넨 그의 조언이었다. ‘배우는 칭찬받기 좋아하는 애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그이기에 동생에게 모두의 칭찬을 들려주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 자리의 모두는 김민종과 의무적으로 통화해 ‘잘 보고 있어요’, ‘최고예요!’라는 인사를 건네야 했다. 물론 본격적인 통화를 시작하기 전에 “민종아, 다들 <아테네…> 잘 봤대!”라는 이경영의 첫마디에 “따거야 지랄, <아테나…>야”라는 구박을 피할수는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