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이별
2011-03-08
글 : 이화정
이윤기 감독의 105분간의 심리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속 사랑과 이별의 한 풍경

거두절미하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별부터 통고한다. 출장 가는 ‘여자’(임수정)를 공항으로 배웅하는 10여분의 시간. 이윤기 감독은 짓궂은 롱테이크로, 여자에게 이별 통보를 받는 ‘남자’(현빈)를 지켜보기로 한다.

남자의 반응은 무척 이상하다. 딴 남자를 만나고 있으니,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하는 상대 앞에서 별다른 질문도, 딱히 논쟁을 하자고 덤비지도, 불같이 화를 내지도 않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따져 물을 의지를 잃어버린 걸까. 그러나 이후 진행되는 95분의 러닝타임. 그러니까 전반 10여분 동안의 여자의 이별통지를 빼고 난 뒤에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이제 그로부터 며칠쯤 지난, 부부의 주거공간으로 침투한다. 건축 일을 하는 남자의 작업실이 있는 지하실, 부엌과 거실이 있는 1층 공간, 그리고 여자의 공간임이 분명한 서재가 있는 2층을 부지런하고 정갈하게 오간다. 곧 집을 나가기 위해 짐을 싸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위해 ‘뭐 도와줄 것 없냐’며 연방 상냥한 친절을 베푸는 남자. 늘 잘 닫히지 않아 말썽인 2층 베란다 창문을 닫느라 여자가 애쓰는 일상의 시간, 뽁뽁이로 싸놓은 여자의 찻잔을 쓰려고 남자가 테이프를 떼어내는 별스럽지 않은 시간,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부부가 야채를 정성스레 볶고 면을 삶는 동안의 익숙한 시간,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5년차 부부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오후는 그렇게 흘러간다. 카메라는 그 디테일한 동작 속, 남녀의 감정의 변화를 한톨이라도 놓칠까 조심스레 실시간 생중계에 전념한다. 미니멀한 구성 속, 이 영화가 시간을 운용하는 방식은 이토록 고요하고 느릿하기만 하다.

이윤기 감독의 작품을 보기 위해 숨죽이는 건 관객으로선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 예의야말로, 오도카니 소파에 앉아 과거를 삭여야 했던 <여자, 정혜>의 ‘정혜’에게 다가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니 핸드드립 커피를 끝내주게 잘 내리는 남자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남자가 끓여준 커피를 받아들고, ‘역시!’라는 감탄사로 응수하는 여자가 갈라서기까지의 사정을 알려면 그들의 행동을 조용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둘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 혹은 종합하게 해줄 별다른 수식은 없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의 소음이 배경음의 전부. 부부는 오롯이 자신들의 과거를 추억할 집 안의 소품에 연연하고, 서로의 기호나 취향을 대신해서 대화로 실어나르기에 바쁘다. 그 과정에서 좀체 서로를 불평하거나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 탓에 커플의 ‘이별식’은 주거공간이 아니라면 마치 둘의 서먹한 만남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정도의 미련이라면, 지금부터 다시 상황을 역전시켜 잘해보자 싶은 마음이 아닐까 혼란스러울 여지도 없지 않다.

모호함에서 모호함으로

구성상으로 따져본다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헤어진 연인이 다시 하루 동안 만나고, 새로운 시작을 예고했던 전작 <멋진 하루>와도 비슷하게 닮아 있다. 공항 가는 장면을 ‘이별’로, 이후 집 안에서의 한나절을 ‘다시 화해할’ 구실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멋진 하루>의 ‘희수’(전도연)와 남에게 유독 헤픈 남자 ‘병운’(하정우)은 제법 명확한 문제를 지닌 커플이었다. 한계를 파악했기 때문에 다시 만날, 혹은 사랑할 에너지도 좀더 명확해지고 희망적이 될 수 있다. 반면 아마도 이윤기 감독의 영화 속 캐릭터 중 가장 소극적임에 분명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남녀에게 이 모든 건 모호함에서 비롯되고, 모호함으로 남겨진다. 현재는, 둘 사이의 치열했던 과거를 유추할 빌미를 쉽사리 내주지 않는다. 관객은 그들의 비극을, 그들이 이 이별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함께했던 행복했던 한때를 지레짐작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파국을 걱정해주긴 힘들다. 부부의 공간에 갑작스럽게 들어와 집 안 구석에 숨어버린 젖은 새끼고양이는 그래서 두 남녀의 미래처럼 애처롭고 불안하다. 마지막 장면, 불안과 희망, 회한과 기대를 모두 그러담은 ‘괜찮아, 괜찮을 거야’라는 여자의 되새김질은 그래서 더없이 공허하다. 손을 쓰기도 전 이미 곪아버린 마음의 상처. 더이상 이 사랑은 반복해선 안될 금기로 볼 여지가 다분히 더 크다. 어떤 사랑은 미련이 남더라도 끝내야 할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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