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에는 아내인 채령 여사를 비롯해 큰아들 임동준, 막내아들 권현상까지 가족 모두가 총출동했다. 어쩌면 영화 카메라로 찍은 가족사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얘기에 따르면 계획적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공방 주인으로 나온 채령 여사의 경우 “연출부가 처음부터 농간을 부린 건진 모르겠는데, 출연하기로 한 사람이 안 왔다며 무조건 아내에게 잠깐 출연해달라고 떼를 썼어요. 아무리 남편이라도 내가 그런 걸 강제로 시키고 그러진 않거든요”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채령 여사가 “이번 영화를 하면서는 제가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제가 원래 배우를 하던 사람인데 아무 준비도 없이 그렇게 출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연출부들이 자꾸 ‘사모님 살려주세요!’ 하면서 내가 꼭 해야 한다고 해야 하니까…”라고 약간은 원망스런 말투로 얘기를 잇는다. “옷도 몸에 딱 맞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하게 됐다”고도 덧붙인다.
<고死: 피의 중간고사>(2008)와 <고死 두 번째 이야기: 교생실습>(이하 <고사2>, 2010)에 출연한 권현상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는 신인배우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도움 없이 혼자서 배우의 길을 걷고 싶었던 그는 성까지 바꿔 가명을 쓰고 있다. 임권택 감독은 막내아들이 영화과에 입학한다고 해도 달가워하지 않았고 연기자를 꿈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별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다. 그러다 영화과에 들어간 지 딱 1년째 되던 날, 단둘만 있던 차 안에서 처음으로 ‘정말 배우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 적 있다. “사실 꽃미남처럼 반반하게 생기면 주변에서 부추기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카리스마있는 악역을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봐도 애가 눈빛이 굉장히 세거든. 그러면서도 아비가 도와줄 건 없다고 했죠. 자기도 조금도 아버지 덕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나중에 이름까지 바꾸는 걸 보고는 의지가 대단하구나, 한번 믿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어떤지 약간은 확인하고 점검해보고 싶은 생각에 <달빛 길어올리기>에 출연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권현상은 그렇게 출연하는 것도 싫어했다. 하지만 형이 ‘아버지 영화에 출연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임권택 감독 영화에 출연하는 걸로 생각하라’며 마음을 돌리게 했다. 하지만 라스트신에 이르러 <고사2>와 스케줄이 겹치게 됐고, 당연히 대감독의 영화를 위해 <고사2>에서 일정을 양보할 생각이 있었지만 임권택 감독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후배 감독을 위해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동생과 외모도 체격도 비슷한’ 형이 아버지 영화에 출연한다는 생각으로 긴급 투입됐다. 그러다보니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남았다. 찍고 싶었던 장면을 어쩔 수 없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종이를 뜨다가 힘이 부치니까 아버지가 아들한테 ‘이제 네가 와서 떠라’ 하고 넘겨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늘 아버지를 증오하던 아들이 가문에 내려오던 종이 기술을 이어받으며 화해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종이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젊은 사람이 이어받아 뜨게 하면 젊은 기운을 받아 종이가 질겨진다고 하는 속설도 있거든요. 그 장면을 구체적으로 못 찍게 됐지만 어쩔 수 없죠”라는 게 임권택 감독의 얘기다. 어쨌건 <달빛 길어올리기> 가족 총출동의 내막은 전혀 계획적인 게 아니었다는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