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샤룩 칸 그가 곧 인도영화다
2011-03-29
글 : 배명훈 (SF작가)
라이벌 없는 인도영화계의 슈퍼스타, 샤룩 칸 스토리

1965년생, 한국 나이로 40대 중반을 넘긴 샤룩 칸은 여전히 인도영화 최고의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80년대부터 활동한 샤룩 칸은 대부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연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남성을 연기해왔으며, 그 이미지는 감독 카란 조하르와의 6번째 협업인 <내 이름은 칸>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남자 칸의 눈물겨운 여정은, 인도영화 역사상 해외에서 가장 큰 수익을 벌어들이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인도영화의 열렬한 팬인 SF작가 배명훈이 샤룩 칸을 향한 애정을 고백한다.

배명훈 SF작가 <타워> <안녕, 인공존재!>

2009년 8월 어느 날, 미국으로 향하던 인도인 한 사람이 테러리스트로 의심받아 미국 공항에서 두 시간 동안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성인 칸(Khan)이 모슬렘 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의 상 황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일어나는 흔한 일이었겠지만, 이 일은 인도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칸이라는 성이 모슬렘 세계에서는 우리의 김씨만큼 흔한 성이라는 점이었고, 무엇보다 인도인을 놀라게 했던 이유는 그 칸이 바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칸, 인도영화계의 슈퍼스타 샤룩 칸(Shah Rukh Khan)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샤룩 칸은 그냥 SRK라고만 검색해도 바로 자료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유명하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칸은 말할 것도 없이 칭기즈칸이다).

인도영화, 철저히 대중을 향한 종합예술

이 일은 영화 <내 이름은 칸>(My Name Is Khan)의 첫 장면과 대단히 비슷하지만, 영화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인도인이 느꼈던 분노를 요약하면 대강 이런 식이다. “샤룩 칸이 통과 못하면 대체 어 느 칸이 의심받지 않고 저 검색대를 통과할 수있단 말인가!” 그래서 발리우드는(현지인들은 힌디 영화권이라는 표현을 선호) 리즈반 칸을 미국에 급파했다. 발리우드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배우 샤룩 칸이 직접 연기하는 모슬렘 리즈반 칸을 통해 미국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다. 그게 <내 이름은 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들이 만든 <내 이름은 칸> 소개글에는 샤룩 칸 이야기가 뒤로 빠져 있다. 마치 신인배우를 다루듯 방어적인 태도로. 왜 그랬을까.

사실 인도영화를 별로 본 적이 없는 한국 사람들에게 샤룩 칸의 매력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건 사진 몇장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는 뜻인데, 적어도 우리 기준에서 샤룩 칸은 그게 가능할 만큼 깜짝 놀랄 미남은 아니다. 샤룩 칸의 매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무대인 인도영화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라라기보다는 세계라고 부르는 게 적합할 이 거대한 영화 세상에는 언어와 제작 환경과 스타들의 계보가 완전히 다른 몇개의 영화계가 있다.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뭄바이를 중심으로 한 힌디어 영화권, 발리우드다.

외국인이 봤을 때 인도영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춤과 노래다. 흔히 인도영화를 뮤지컬영화로 분류하게 만드는 대목이고 오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이 장면들이 유통되는 방식은 뮤지컬이라기보다는 뮤직비디오에 가깝다. <채널V> 같은 음악 채널에서 하루 종일 틀어주는 주요 콘텐츠들이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라는 점만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도영화는 영화 안에 전편이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음반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대중종합예술이다.

플레이백 싱어라는 분야가 아예 따로 있어서 노래를 직접 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퍼포먼스는 온전히 배우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영화배우는 영화배우이면서 동시에 팝스타여야 한다. 연기와 춤을 함께 소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뮤지컬과 비슷하지만 그 둘을 종합했을 때의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 인도식 ‘마살라(인도 향신료) 무비’의 지향점은 철저히 대중적이다. 그리고 그걸 제일 잘 소화하는 배우가 바로 샤룩 칸이다. 그것도 벌써 10년이 넘도록 라이벌조차 없이 최고의 자리에 군림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내 이름은 칸>

칸은 관객의 마음을 춤추게 한다

그러니까 샤룩 칸은 연기파 배우가 아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연기하는 배우가 연기파 배우가 아니라니. 그런데도 극찬을 받을 만큼 잘 소화해낼 수 있다니. 여기에서 미국에 급파한 발리우드의 칸, <내 이름은 칸>의 전략 포인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다. 영화에는 9·11 이후 야만으로 변해버린 세상이 모슬렘에게 가하는 폭력에 굴복해 신념을 꺾는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하지만 리즈반 칸은 아니다. 그는 어렸을 때 현명한 어머니가 전해준 위로와 사랑의 메시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을 찾아 미국을 헤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비정상 취급을 받아왔으니까. 그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캐릭터를 바꾸지 않고 동화적인 순수를 간직한 채, 야만으로 변해버린 세계를 뚫고 갈 수 있게 만드는 보호막.

그런데 이 전략은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리는 발리우드영화라는 맥락에서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내 이름은 칸>은 마살라 무비가 아니다. 수백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군무도 안 나오고 결혼식 장면도 단출하고 상영시간도 고작 두 시간밖에 안되는 미국화된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부분이 이 영화의 두 번째 전략 포인트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인도영화이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려는 걸까.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샤룩 칸이다. 춤을 추지 않고도 마치 춤을 보여주듯 몸의 언어로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한 또 다른 인도영화 <블랙>의 전략과 동일하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 그 마음이 대신 춤을 추게 하는 것.

그런데 그걸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70년대의 슈퍼스타 아미타브 밧찬<블랙>과 현 세대의 슈퍼스타 샤룩 칸, 두 사람뿐이다. “내가 곧 인도영화입니다” 하고 말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신적인 존재. 어떻게 미국화하든 그들의 영화는 여전히 인도영화다. 그리고 샤룩 칸이 몸의 언어로 담아내는 메시지는 그가 발리우드의 지배자로 우뚝 서기까지 수십 년간 구축해왔던 바로 그 메시지다. 사랑, 위로, 자상함, 배려, 사람을 들뜨게 하고 마음의 춤을 추게 만드는 온갖 신나는 느낌들. 그게 바로 샤룩 칸이다.

하지만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변화가 인도영화의 성장으로 이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바꿨을 뿐, 미숙하던 인도영화가 이제 정신 차리고 성장해서 미국영화가 돼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이름은 칸>이 주는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변해야 할 것은 칸이 아니라 세상이다. 칸이 칸 그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전쟁 상태의 미국을 종횡으로 누비는 이 험난한 여정에 성공했을 때, 바뀐 것은 착하디착한 그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어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했던 세상이다. 샤룩 칸도 마찬가지다. 샤룩 칸이 성장해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다고? 그런 일은 없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누가 그를 신인으로 다루든 어쩌든 샤룩 칸은 이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슈퍼스타고, 그가 사는 세상에서는 세상의 흔들림없는 중심축이다.

<내 이름은 칸>

다문화의 아름다움을 끌어안으며

여기에서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칸이 통과하고자 했던 공항 검색대가 단지 미국에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근처에는 없을까? 있다. 분명히 있다. 최근 몇년간 ‘다문화’라는 표현을 들을 일이 많아졌다. 좋은 표현이다. ‘다인종, 다국적’ 같은 표현보다는 훨씬 중립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것 같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 훌륭하다는 다문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데 다음 세대에 그게 뭔지 설명할 필요가 생기는 순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 다문화라는 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명절에 트로트 부르는 거야” 하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솔직히 인정하자. 지금 우리에게 다문화는 한류보다 훨씬 열등한 소수자들의 하위문화 정도의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다문화 칸들이 자기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 사회에 쳐져 있는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 그들의 문화가 한류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존중받고 돈을 벌게 할 자신이 있을까?

그래서 그 칸들을 위해 큰형님이 오셨다. 고만고만한 미남 배우가 아니라 무려 샤룩 칸이다. 수많은 칸들을 대신해 검색대의 수난을 대신 당하기 위해, 그리고 이 고난의 땅을 순수 하나만 믿고 터벅터벅 걸어가기 위해. 그러나 그는 우리를 공격하거나 비난하려고 온 게 아니다. 단지 이런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My name is Khan. I am not the terrorist.(내 이름은 칸이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는 분명 폭탄을 안고 왔지만, 그가 터뜨리는 폭탄은 오로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만 폭발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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