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식료품을 주문했을 뿐인데, 엄청난 상자가 배달되었다. “행복을 보장합니다”라니. 이렇게 용감무쌍할 데가!
3월22일
이건 농약 같은 이야기다. 소년 A는 어떻게든 유명해져서 엄마에게 인정받으려고 아무나 살해하기로 한다. 소년 B는 그런 A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살인을 거든다. 가르치는 학생 손에 어린 딸을 잃은 교사(마쓰 다카코)는 복수를 추진한다. 그것도 아주 차디차게 식은 복수를. 이지메를 소재로 취한 일본영화는 <재팬 타임스>의 평론가 마크 실링의 비유에 따르면 “우에노 공원의 벚나무만큼” 흔하다. 그럼에도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고백>이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건 자국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칼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눈에 <고백>은, 앞서 10대의 잔혹함을 그렸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성취한 시정(詩情)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청소년들의 생존 투쟁을 표현하는 필치는 <배틀 로얄>만큼 생생하지 않았다. 비극의 근원으로 전형적인 모성 콤플렉스를 지목하는 대목에 이르면 <고백>은, 컬럼바인 총기 난사사건을 일체의 인과를 삭제한 채 제시한 <엘리펀트>와 상극의 윤리적 태도를 지닌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고백>의 백미는 교사 모리구치 유코가 종업식날 교실에서 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공표하며 사실상 A와 B를 ‘인민재판’에 회부하는 초반 30분에 몰려 있다. 이 시퀀스는 소음과 감정의 역동적 오케스트레이션이다. 처음에는 ‘고백’이라는 제목이 무안하리만큼 교사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는 아이들의 소란이 교실을 지배하지만, 이내 듣건 말건 유유히 계속되는 교사의 싸늘한 진술이 반격한다. 술렁임은 충격적 선언에 얼어붙었다가 속삭임과 웅성거림으로 녹아 내리고, 다시 휴대폰 메시지와 블로그로 무섭게 번져나간다. 인상적인 1부 이후 <고백>은 (매정하게 말하면) 내레이션이 깔린 뮤직비디오와 점점 비슷해진다. 전체 영화에서 첫 시퀀스가 차지하는 무게는 형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고백>에서 생동하는 긴급한 정서는 도입부에 함축된, 10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경멸과 공포, 누적된 피해 의식이다. 이에 비하면 이어지는 위악적 플롯은 스릴을 위해 증축된 구조물처럼 보인다. <고백>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고발’을 듣는다.
“파렴치한 인간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파렴치한 거야. ‘나는 고작 열세살이잖아요’라고 말할 참이니? 나는 지금 일곱살이건 일흔살이건 마찬가지인 사악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부모와 선생이 고루하다고? 너희는 그들의 편견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잖아. 게다가 너는 어리다는 핑계로 편협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조차 않지. 개성을 존중하라고? 싫은 일은 무작정 회피하는 습관, 약자를 보면 괴롭히는 버릇도 개성이라고 주장하는 거니? 삶이 무의미해서 죽고 싶다고? 왜? 아이돌과 사귈 수 없어서?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칭얼거리는 만큼 노력한 적이 있니? 너희 엄살은 반으로 꺾어 듣는 편이 건강에 이로워. 걸핏하면 부모 자격이 없다고, 담임교사로서 실격이라고 쉽게 비난하는 넌 얼마나네 행동을 책임질 준비가 돼있지?”
3월23일
그들은 어째서 하루의 명성만 꿈꾸고 그 이튿날은 상상하지 않았을까? 모든 행위는 결과를 낳고 결과는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현실을 외면한 <고백>의 소년들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부터 배울게 있다. 단순한 타임 슬립 모험담이었다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처럼 여러 차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춘기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처음으로 그리워하게 되는 계절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뭔가를 누릴 때는 어딘가에 반드시 그만큼 잃는 이가 있다는 섭리를 일러주는 원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니구치 마사아키 감독의 2010년작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보다 <백 투 더 퓨처>와 가까운 혈연의 영화다. 여기서 시간여행 모티브는 다른 함의 없이 굵직한 서사적 트릭으로 이용되며, 극적 재미의 대부분은 부모의 청춘과 조우하는 감회 및 과거와 현재의 문화 충돌 코미디에서 나온다. 연전 개봉된 동명 애니메이션과 다니구치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차이를 가늠케 하는 예 하나.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생겼다는 조카의 말에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이모는 미소 짓는다.“네 또래 여자애들에게는 가끔 있는 일이란다.” 이 허황된 말은 뜻밖에 신비한 설득력을 발휘해 우리를 끄덕이게 한다. 반면 2010년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인물은 약학과에 진학해 과거로 가는 물약을 조제한다. 얼마나 산문적인 발상인가.
시간여행 영화를 볼 때마다 인간이란 이 세계의 세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살다 떠난 방에 입주했다가 다시 짐을 챙겨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이란, 방구석을 구르는 머리카락이나 뜯겨나간 벽지, 그리고 새벽녘 문을 두드리고 황망히 멀어져가는 발자국 소리 같은 단서들을 통해 이 집에 먼저 살았던 사람의 초상을 더듬어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3월25일
하다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팬들이 두고두고 부끄러워할 영화”라는 평까지 나왔다. 아마도 <히어애프터>는 뒷날 <미스틱 리버>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감독의 대표작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80대에 접어들어 마음이 약해진 노감독이 사후를 근심하는 영화”라거나 “사후세계 묘사가 뻔하다”라는 평에는 이견이 있다. 우선, 사후세계 묘사가 얼마나 독창적인가는 <히어애프터>를 논하는 데에 적절한 의제가 아니다. 피터 잭슨의 <러블 리 본즈>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관심사는 ‘저 너머’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것이 림보나 천국의 풍경인지, 정신이 ‘로그오프’ 되기 직전 뇌에 영사되는 상인지 영화는 단언하지 않는다. 초능력을 가진 조지 로네건(맷 데이먼)이 망자(亡者)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접촉해 듣는 메시지 역시 죽은 이의 목소리라고는 하나, 그가 읽어낸 것의 정체는 의뢰인의 심중에 엉겨붙은 미련일 수도 있다. “형은 어디로 간 거죠?” 쌍둥이를 잃은 소년의 물음에 로네건은 답한다. “미안하다. 나도 모르겠구나.” 나는 소년에게 로네건이 전한 메시지의 마지막 조각은 그가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가 산 자에게 보내는 위로가 아닐까 상상한다. <히어애프터>는 대다수의 교령자들이 사기꾼임을 보여주는 데에 상당 시간을 할애하는데, 영매들의 모습을 이어붙인 몽타주 시퀀스에는 그 모든 시도를- 비웃는 게 아니라- 가련히 여기는 선율이 흐른다. <히어애프터>가 정작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고자 하는 대상은, 내세를 둘러싼 종교의 약속이다. “그리스도만 믿으면 두려워할 게 없다.”“신은 당신을 꼭 찾아내 징벌한다.”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냉랭해지는건 그 선지자들을 쳐다볼 때다. 노감독의 근심거리는 여전히 현생이다. 그것이 죽음을 본, 죽음에 인접한 사람들의 생일 따름이다.
3월27일
1세대 엑스맨들의 과거를 되짚는 매튜 본 감독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예고편을 보고 피가 끓어올랐다. 매그니토를 향해 쏠리는 몸속의 철분을 제어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엑스맨>의 팬이며 특히 매그니토와 미스틱을 편애한다. 일단 그들은 악당과 영웅을 겸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프리미엄을 누린다. 자고로 히어로의 행동방식은 정해져 있다. 즉, 영웅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악당은 뭐든 할 수 있다. 악당을 저지함으로써 비로소 영웅이 될 기회를 얻는 영웅들과 달리 악당은 영웅이 없어도 멀쩡히 악당일 수 있다. 요컨대 악당은 제1동력(mover)이다. 우주 정복처럼 사적 만족과 멀리 떨어진 목표와 명분을 추구할수록 악당은 지루해진다. 악당은 예측 불허할수록 동기가 개인적일수록 매력적이다. 맥베스와 메데이아가 그랬고, 매그니토와 미스틱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