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시나리오스쿨 출신 작가들이 ‘시나리오픽션’을 내놓았다. <악마>는 <다섯은 너무 많아>(2005), <나의 노래는>(2007), <지구에서 사는 법>(2008)을 만든 안슬기(왼쪽) 감독의 작품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한 가장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대안가족’을 다뤘던 <다섯은 너무 많아>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가족의 이야기다. <내가 죽였다>는 <전설의 고향>(2006)을 쓴 안민정 작가의 작품으로, 무죄가 아니라 독특하게도 자신의 유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직 형사의 이야기다. 그들이 얘기하는 시나리오픽션이란 ‘애초 작가의 시나리오에다 의도가 명확한 세부 묘사를 더해 소설화한 것’으로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두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최근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처우 개선, 진로 모색 등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졌던 분위기에 비춰볼 때 무척 참신한 시도로 여겨진다. 그들에게서 시나리오가 아닌 시나리오픽션을 쓰게 된 이유, 그리고 이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시나리오픽션’이란 이름으로 두권의 책이 나왔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안슬기_ 2009년 가을쯤 역시 심산스쿨 출신이자 <아치와 씨팍>(2006)을 쓴 강상균 작가가 ‘바이람’ 출판사와 심산스쿨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다. 시나리오픽션이라는 형태의 프로젝트로 여러 권 내보면 어떨까, 흥미로운 시도가 될 것 같다는 얘기였다.
안민정_ 심산스쿨 출신들 중에 장편영화를 한편 이상 한 사람들끼리 모인 ‘크레딧 클럽’이라는 모임이 있다.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의견도 주고받고 하는 작가 모임인데, 2009년 그때가 장르문학이 대세이던 때였다. 관련 세미나도 열면서 출판사와 접촉해보자는 얘기가 그때 나왔다. 다행히 신생출판사인 바이람북스에서 이런 프로젝트로 얼마간 손해를 보더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안슬기_ 크레딧 클럽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장르문학은 물론 당시 뮤지컬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때라 그쪽으로도 스토리나 플롯을 공부해보자,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자는 얘기도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스토리텔링 등 시나리오픽션 역시 작가로서의 활로를 찾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책으로 나오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나.
안슬기_ 2009년 12월까지 쓰기로 하고 다시 3개월 정도 연기해서 2010년 2월 말까지 쓴 거다. 시나리오는 이야기를 짜고 쭉 디테일로 들어가면 되는데 소설은 문장 그 자체의 완성도나 곁가지도 중요했다. 힘들게 쓰고 나니까 딱 보기 싫을 정도로 징글징글했다. 그런데 출판 작업이 미뤄지면서 편집자 분께서 많이 미안해했다. 우리는 또 힘들게 쓴 시나리오의 영화가 엎어지는 것처럼 출판 역시 그런 거구나, 하고 상심하기도 했다. (웃음) 그래도 뭐 작가로서 너무 흔하게 겪는 일이라 마음을 비우고 거의 1년 넘게 오타 수정을 꼼꼼히 한 셈이다.
안민정_ <전설의 고향>을 작업하던 중에 김지환 감독님이 얘기를 꺼내셔서 함께 아이템을 개발했다. 이후 소설화 작업은 혼자 했다. 사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걸 그대로 글로 옮겨놓으면 소설 한권 분량에서 턱없이 모자란다. 결국 배경 설명이나 캐릭터 등 작가의 상상력과 구성력이 깊이 발휘돼야 한다. 그런 점들이 힘들었다. 그래도 끝나고 보니 후련하기도 하면서 다시 또 하나 써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 하여간 복잡한 기분이었다. (웃음)
-작품 얘기로 들어가 보자. <악마>는 기존 안슬기 감독 영화와 비교할 때 상당히 다른 톤의 작품이고, <내가 죽였다>는 전형적인 스릴러 장르다.
안슬기_ 석규라는 남자는 회사에서 그 누구보다 유능한 남자인데 가족 내에서도 회사에서도 딱히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고교 동창 민혁을 만나게 되는데 이제 더이상 민혁의 ‘꼬붕’ 노릇을 하던 과거의 그가 아닌 상황이다. 그렇게 민혁과 재회하면서 석규 내면의 숨겨진 악마성이 드러나고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뭐랄까, 내가 점점 더 위악적으로 되는 거 같다. (웃음) 기존 내 작품들과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2008년부터 아이디어를 잡은 작품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악마로 변했으면 좋겠다, 좀 독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리게 됐다. 꾸준히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고 이제 영화를 안 찍게 된 지 만 3년이 돼가는데 뭔가 갈수록 박해진다는 느낌이 있었다. 위악적으로 변하고 싶은 마음,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 그런 게 다 담겼다.
안민정_ ‘내가 만약 3개월 뒤에 죽는다면, 가장 나쁜 놈 한놈만 죽이고 죽으면 어떨까?’라는 발상해서 시작한 이야기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형사 손기철은 바로 그런 놈을 골라 살인을 저지르고 완전범죄를 꿈꾸지만 엉뚱하게도 잊고 지내왔던 자신의 아들이 범인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다. 죽인 건 내가 죽였는데, 왜 내 아들이 범인이라는 걸까? 그때부터 손기철은 아버지 손기철이 되어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유죄를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김지환 감독님과 얘기한 건 스릴러의 탈을 쓴 휴머니즘 드라마였다. 뭔가 유유히 털고 떠나려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잡히는 광경을 보고 더한 마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미스터리한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쨌건 어떤 형태의 작품이건 영화화가 최종적인 목적일 것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기대하는 효과 같은 게 있다면.
안슬기_ 물론 영화사와 계약을 맺고 영화화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이런 기사가 나가고 홍보가 되면서 좀 그런 접촉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웃음)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작가로서 저작권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출판사는 출판권만 있고 판권은 직접 쓴 우리가 갖고 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사에서 자기 권리 없이 계속 2고, 3고 매만지기만 하다가 그냥 튕겨져 나오는 일이 얼마나 많나. 심산 선생님께서도 이번 작업에 대해 했던 얘기가, 이런 형태의 출간이 작가로서 저작권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셨다. 극단적으로 영화사와 함께 작품을 진행하다가 자기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영화화되지 못했을 때 그걸 제대로 갖고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적당히 1천만, 2천만원으로 ‘퉁’ 치고 영화사를 나온 작가들이 무척 많을 것이다. 작업하고도 나중에 크레딧에 이름 못 올리는 경우도 많은데 적어도 ‘원작’ 크레딧은 남는다. 이번 작업이 그런 좋은 선례로 남았으면 한다.
안민정_ 일단 내가 이 작품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리고 영화사와 접촉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파일이나 프린트물 형태가 아니라 이렇게 책으로 건네줄 때 확실히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느낌이 다르다. 뭔가 이미 검증받은 작품을 주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웃음)
-현재 또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안슬기_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나 <중앙역> 혹은 <벌집의 정령>처럼 아이들이 겪는 여러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ACF)의 ‘인큐베이팅 펀드’ 지원작으로 뽑혔던 <파우와우>를 <영주의 여름방학>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개발비를 받은 게 있다. 그건 좀 예산이 필요한 영화라 투자 등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있다. <영주의 여름방학>에서 <다섯은 너무 많아> 분위기가 난다고 하더라.
안민정_ 딱히 호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전설의 고향>과 <내가 죽였다>를 쓰게 됐다. (웃음) 어쨌건 영화화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전설의 고향>인데 뭔가 두 번째 작품을 내놓아야 하지 싶다. 현재 구상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걸 현실같이 보이게 하는, 판타지라 하기도 그렇고 판타지가 아니라고 하기도 그런 청춘물을 해보고 싶다. 좀 막연한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