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복원된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을 보다. 개안(開眼)!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전부인 극히 검소한 타이틀 화면부터 찬물로 눈을 씻는 기분이더니, 영화가 흐르자 그 물이 온몸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산자락을 더듬는 구름의 그림자는 예전엔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한 영화와 두 번째 사랑에 빠진 날.
5월30일
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는 ‘우여곡절’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며칠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을 방문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인터뷰를 마쳤다. 앞서 열린 공개 대담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 연출을 가리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관객이 인물의 절망을 견디기 힘든 상태 그대로 느끼게 된다”고 명확하게 지적했는데, 그녀 역시 체류하는 동안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으로 우리에게 곤혹을 안겼다. 돌발 상황에 대응하느라 최초에 품었던 결의를 얼마간 잃은 채 시작한 그녀와의 인터뷰는 그러나, 3분 안에 등을 곧추세우게 만들었고 10분 이후 내내 즐거웠으며 종내는 교육적이었다. 그리고, 냉정히 말하면 그외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어떤 독자가 기자가 취재원을 얼마 동안 기다렸는지, 약속장소가 언제 바뀌었는지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정시에 시작해 깍듯한 배려 속에 계획한 바와 한치 틀림없이 진행된, 결국은 지루한 인터뷰가 누구에게 쓸모가 있단 말인가? 스스로 다짐하거니와 이 일에 종사하는 자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술가의 주변을 맴도는 직업을 원한 것은 우리다. 소심한 가슴팍에 난 생채기 따위는 마데카솔 바르고 하룻밤 자면 아문다. 불평해선 안된다. 예술가들에게 의무가 있다면 흥미로운 존재여야 할 의무밖에 없다.
뛰어난 배우에 관해 적절한 글을 써내는 일은 닥칠 때마다 능력에 부쳐 허덕이는 과제지만 냉정히 저울질해보면 그만큼 비범하지 않은 배우에 관해 적절한 글을 쓰는 것보다는 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비범한 배우는 모든 좋은 예술가가 그렇듯, 그에 관해 문장을 쓰려는 자에게 적어도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받은 불씨를 얼마나 잘 건사해서 먹을 만한 밥을 짓느냐는 순전히 쓰는 사람의 소관이겠지만. 잠깐, 이건 혹시 긍정의 힘?
6월1일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이하 <화이트>)는 감전의 공포를 그린다. 스포트라이트에 홀린 듯 투신하지만 정작 거기 닿으면 백열에 감전돼 토사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소녀들의 이미지가 영화를 지배한다. <화이트>가 김곡, 김선 감독의 인장(印章)이 없는 영화라는 여러 평자의 아쉬움에는 말을 얹고 싶지 않으며, 그럴 만큼 곡사를 잘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작가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의도했는가는 어림짐작의 영역에 속하며, 찍히지 않은 영화에 대해 불평하는 일은 허망한 노릇이다. 다만 <화이트>를 (감독의 전작을 모르는 대다수 관객과 마찬가지 자세로) 여름 극장가를 목표한 상업 호러영화로서 관람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몇 차례 지나간 중얼거림은 “나도 좀 같이 깨닫자!”였다. 불길한 비디오테이프의 비밀을 캐는 과정에서 주인공 은주(함은정)와 그녀의 멘토 순예(황우슬혜)는 영상과 오디오 트랙을 분석하며 여러 차례 ‘유레카’를 외치는데 그때마다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허둥지둥 전개를 따라가야 했다. 정확히 뭘 발견했는지 알아야 함께 놀라고, 다음 시퀀스에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 알 것 아닌가 투덜거리며. <화이트>가 염두에 둔 주요 관객층에 속하지 않는 내가 ‘움짤’ 과 오디오 편집의 노하우에 무지한 탓도 있겠으나 유령의 출처에 한 계단 한 계단 접근하는 과정에 영화가 좀더 나를 끼워주었더라면, 절정마다 감독들이 매설해둔 노이즈로 가득 찬 인상적 공포 이미지는 훨씬 파장 긴 전율을 남겼을 것이다.
6월3일
성실한 월급쟁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될 일 중 하나, 스즈에 미우치의 대작 <유리가면>의 복습에 착수했다. 동료 김용언 기자가 전권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도저히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이 만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최고의 배우를 가려내줄 궁극의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전제다. 연재가 워낙 장기화되다 보니 혹시 맥거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돋기도 하지만 <홍천녀>라는 환상의 명작은 ‘인간이기를 망각해야만 가능한’ 지고의 연기를 요하며, 게다가 그것이 무대 위에 현실화되면 만인이 즉시 알아보고 환호할 거라고 <유리가면>은 단언하고 있다. 이쯤 되면 <홍천녀>는 헤르만 헤세가 말한 ‘유리알 유희’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6월5일
최근 들어 접한 몇몇 국내외 다큐멘터리는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스트의 무기고에 속하지 않는 기법들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엄연히 픽션이 아닌 사실을 다루되, 정서적 측면을 대폭 끌어들이는가 하면 비디오아트에서나 보던 미학적 야심을 실현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라는 하위 장르도 등장했다. 정확한 비교 사례는 아니겠으나 스트레이트한 기사체와 에세이체가 공존하는 저널리즘의 현황이 떠오른다. 다큐멘터리 <트루맛쇼>는 대상의 치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덫을 공들여 만들어넣은 경우다. 제작진은 공중파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보조출연을 체험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유령식당을 차려 “대박 식당이 되기 위한 미디어 이용법”을 실증한다. <트루맛쇼>가 굳이 영화여야 하는 이유 하나는 명확하다. 방송을 탈 수 없으니까. <트루맛쇼>가 폭로하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음식점과 외주제작사 및 방송사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이뤄지는 ‘부당거래’ 즉, 경제 정의와 미디어 윤리의 문제다. 두 번째는 몰취향과 게으름, 무능의 문제다. <트루맛쇼>에 비친 방송 제작진은 주어진 정보를 검증하려 들지 않는 것은 물론 안타깝게도 재료, 조리법, 맛, 역사 등등 음식과 관련된 무한한 재미의 금광을 건드리려는 의욕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맛 프로그램을 만드는 당사자들이 음식에 철저히 무관심한 셈인데, 이는 사회 전체의 식문화 수준과 연결돼 있다(“시청자들은 비비고 자르면 제일 좋아해”). 두 번째 문제가 첫 번째 문제보다 해결에 더 긴 시간을 요하는 고질(痼疾)이 아닌가 싶다.
6월6일
더 나은 화질이 범용한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영화의 위대한 모멘트 위에 덮인 더께를 걷어낼 수는 있다. 대만에서 디지털 복원한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을 보러 갔다. 자, 그래서 기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첫 장면의 기차가 터널로 들어갈 때 객차 안에 수묵처럼 번지는 어둠, 그것이 걷혔을 때 드러난 소녀의 얼굴에 눈물이 만들어놓은 얼룩, 소년 소녀들의 몸무게를 실은 구름다리의 미세한 출렁임. 때로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부다. 거장들의 영화를 볼 때 종종 나는 혼란에 빠진다. 저런 이미지는 우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옳은 방향을 알고 있다면 기적조차 그 감독을 돕는 것일까. 아마 기적은 모두에게 공평히 만연돼 있으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찍을 수 있는 유연한 손, 찍힌 것 중 중요한 것과 불요한 것을 가려내는 지성은 선택된 자만의 몫이리라.
<연연풍진>의 시간은 그 흔한 ‘몇년 후’라는 자막도 없이 뭉텅뭉텅 흘러간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구멍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결단한 대목이 그 단층을 메우기에 충분한 감흥을 머금고 있느냐다. 같은 시간의 토막 안에서도 허우샤오시엔이 보여주는 신의 밀도는 불균질하다. 어떤 장면은 술렁술렁이고 어떤 장면은 집요하다. 중요한 것은, 균일한 밀도가 아니라 밀도가 다른 숏을 배열하는 리듬이다. 이것이 시간을 상식적으로 복제하려다가 실패한 영화가 노출하는 불균질함과 차이를 만든다. 허우샤오시엔은 입대하는 손자와 전송하는 할아버지의 작별을 멀리서 찍었다. 철로 끝에 선 할아버지가 뭔가 손자에게 이야기하지만 관객에겐 들리지 않는다. 손자가 멀어지자 할아버지는 폭죽을 몇방 터뜨린다. 순간 나는 이 무심한 원거리 숏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짜 삶을 엿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클로즈업은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까지 잊게 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런 다짐. 극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