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藝人)에 관한 세간의 낭만적 짐작은 아랑곳없이, 배우 고현정은 웬만해선 도취되지 않는 사람이다. 촬영 한복판에서도 본인의 연기에 만족해 고양되는 일이 거의 없는 건 물론이고, 대부분의 세상사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담담하다. 요컨대 ‘별일’이 없는 것이다. 이 권태의 이면으로서, 그녀는 누군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라면 눈을 빛낸다. 이를테면 짜릿한 “서프라이즈!”의 찰나를 위해서라면 벽장 속에 그 길쭉한 몸을 구겨넣고 한두 시간쯤 숨어 있는 수고도 마다않을 인사가 고현정이다. 또한 여전히 그녀의 귀를 순식간에 쫑긋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흥미로운 개인이다.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고현정이 읊조린 대사대로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을 통해 얻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지금까진 그러니까, 배우 고현정이 <씨네21>의 비상근 게릴라(?) 인터뷰어가 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다. 인터뷰어로서 고현정에게 없는 것과 고현정한테만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아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하고 무모한 질문자가 될 것이다. 맞은편에서 귀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대를 이야기에 몰두하게 만드는 자력(磁力)도 그녀의 인터뷰를 유별나게 만들 터다. 말하자면 신중하고 숙련된, 무색무취한 기자의 반대말.
그리하여 고현정이 대화를 청한 첫 번째 상대는 음악인 장기하였다. 6월9일 2집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개를 앞두고 밴드 멤버들과 함께 송파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봄날을 다 새우고 있던 장기하는, 빠듯한 일정을 쪼개기로 용단을 내렸다. 자신의 난데없는 인터뷰어에 대해 장기하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를 봐도 분명히 주인공인데 잘 안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슥 눈에 들어오는 분들이 있잖아요? TV를 보고 인터넷 뉴스를 읽고 트위터를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제 삶에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고현정씨는 스윽하고 보이는 사람에 속했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의 음악이 발산하는 멋의 큰 몫은 리듬의 단단한 장악에서 나온다. 말을 노래처럼, 노래를 말처럼 하는 태연자약함이, 일상의 주저리가 물 흐르듯 시가 되고 노래로 피어나고 급기야 춤사위로 확장되는 흥겨운 장관이 그로 인해 가능하다. 리듬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편안해야 할 것이다. 목표를 위해 이지러지거나 억지로 잡아 늘리는 구석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음악에도 성공에도 목숨을 걸진 않지만 좋아하는 일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한다는 태도, 자본의 뜻에 휘둘리지 않은 채 지속 가능한 방식의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장얼’의 다운시프트족(族)적인 전략도 그들의 음악 스타일과 착 달라붙는다. 동시대 젊은 음악이란 모름지기 여사여사한 게 아니겠는가라는 통념을 깨고 종종 신중현, 산울림이 격세유전된 결과처럼 들리는 ‘장얼’의 음악이 암시하는 대로, 장기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시계와 메트로놈을 내장한 사람이었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했고, 부러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상대를 만족시키려고 과도하게 애쓰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 반면 무리하게 겸손도 떨지 않는 표정은, 그와 고현정의 큰 공통점으로 보였다. 변박으로 밀려드는 인터뷰어의 질문에도 장기하의 대답은 똑, 딱, 똑, 딱 정박을 찍었다. 흰 돌과 검은 돌을 느릿느릿 또박또박 바둑판에 채워가는 것 같은 대화였다. 아주 가끔 인 미세한 동요는, 활짝 열어둔 창을 통해 휴일의 거리로부터 불어들어온 미지근한 봄바람 탓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