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_‘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에서 <별일 없이 산다>를 무척 좋아했어요. “내 이야기를 들으면 두 다리 쭉 못 뻗고 잘 거다. 난 별일 없이 산다”라고 노래하는 점이 좋았어요. 정말 별일 없이 사는 게 좋은가요?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를 싫어하는 편이에요? 아니면 즐기는 편이에요?
장기하_좋은 별일이냐 나쁜 별일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매사에 느려서 갑자기 새로운 상황이 닥치면 일단 당황하고 재빨리 적응을 못하는데 시간을 갖고 천천히 하다보면 다른 길이 열리고 새로운 방법이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고현정_<별일 없이 산다>를 듣다가 하루 종일 웃은 날도 있어요.
장기하_원래 어머니 말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곡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서로에게 안부를 묻잖아요. 진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보통 “별거 없어”라고 대답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사람 심리가 “이번에 우리 애가 수능을 못 봐서…” 뭐 이런 걱정거리가 나와야 안심도 하고 나만 안 풀리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게 된대요. 하지만 그건 곡을 만들 때 배경이었고 부르면서는 공연마다 의미가 달라졌어요. 무대에 따라 ‘별일’은 부정적인 일이 되기도 긍정적인 일이 되기도 했어요.
취미없는 남자, 장기하
고현정_(생각) 고현정은 왜 장기하를 만나고 싶었을까요?
장기하_잘 모르겠지만 좀 특이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 뭐, 음악 들었을 때 느낌이 괜찮아서 아닐까요?
고현정_맑아서요. 음(陰)의 기운이 있기는 한데 맑아 보여요. 저한테 궁금한 건 없었나요? (웃음)
장기하_그것이, 갑자기 물으시니 생각이 안 납니다.
고현정_(웃음) 장기하씨 머릿속에 고현정이란 사람은 전혀 없었죠?
장기하_그렇진 않죠. 어렸을 적 온 가족이 모여 <모래시계>를 봤습니다. 최근에는 영화 <여배우들>도 봤고요. 진짜라고 ‘뻥치는’ 컨셉의 영화였잖아요? 어색하지 않고 재미있었는데 좀더 독했으면 하는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후반에 갈등이 급히 봉합되는 느낌이 있어서 좀 이상했습니다. 저는 서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는 이야기면 더 재밌겠다 싶었어요.
고현정_그럼 장기하씨는 갈등이 생기면 갑자기 확, 억지로 풀리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문제가 있는 상태로 남는 쪽이 더 좋아요?
장기하_문제가 있는 상태로 남는 게 좋다기보다 내가 애정을 가진 상대면 근본적으로 해결하길 바라죠. 그런데 실제 갈등의 해소는 영화처럼 그렇게 금방 이뤄지지 않고 정교한 기승전결을 요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만약 애정이 별로 없는 상대라면 굳이 그런 노력을 할까 싶어요.
고현정_살면서 갈등과 오해가 자주 생기는 편인가요? 주로 어떤 경우에?
장기하_그런 일은 많지 않은 편입니다. 제가 성격이 둥글둥글합니다. 그리고 잘 안 맞을 거라는 예감이 들면 애초에 이야기를 많이 안 하죠.
고현정_처음 만난 누군가가 나랑 맞을지 어긋날지 무엇으로 감지해요?
장기하_첫인상에는 크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잠깐 본 느낌은 전부가 아닐 거라고 미리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참 대화를 해보거나 같이 활동을 해볼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한다고 할까….
고현정_그럼 다른 사람은 뭐라건 선입견 없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일도 하고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게 맞았다고 느껴질 경우 기분이 어때요?
장기하_그런 일은 별로 없었어요. 충분히 관찰한 다음 머릿속에 그에 대한 판단이 서면 첫인상은 잊어버려요. 세간의 평판도 제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고현정_요즘 특별히 관심 가는 일이나 사람은 없나요?
장기하_최근에는 음반 작업에 매달리는 중이라 그 밖의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고현정_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뭐가 궁금하다거나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다거나 하지 않아요?
장기하_지난해엔 음반도 안 내고 공연만 가끔 했는데, 남의 음악 듣는 것에 꽂혀서 혼자 맥주 마시면서 듣고 음악 들으러 여행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어느 순간에 이르니 그 모든 걸 싹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음반을 내야 할 때가 됐구나 깨달았죠. 다른 음악도 안 듣고, 책은 원래 안 보고, 좋아하는 여자도 안 생기고. 지난해엔 일부러 술을 두달 끊은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자연히 술도 덜 마시게 됐어요. 그나마 없는 취미가 더 없어졌죠.
고현정_장기하씨는 추억이 많은 사람인가요?
장기하_많다 적다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고현정_미안해요. 혹시 비밀스런 추억이나 기억이 있나요?
장기하_누가 물어봐도 숨기고픈 비밀은 없습니다. 아무한테나 말하지 않는 건 있지만 프라이버시 정도지 비밀이라고 할 건 없는 것 같아요.
‘장기하와 얼굴들’ 알린 노래들, 군대에서 만들었죠
고현정_오늘 인터뷰 약속이 잡힌 뒤 술자리에서 아무 이야기도 않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을 일부러 틀어놓은 다음 사람들 반응을 보기도 했어요. 제가 그 노래를 틀었다는 것만으로 “오!” 하는 (의외라는) 리액션도 있었고, 어떤 분은 장기하씨는 다른 인생계획이 있는데 지금은 음악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의사인 한 여자분은 장기하씨의 잠버릇이 궁금하대요.
장기하_오, 어떤 진료과목 의사신데요?
고현정_수의사요. (좌중 폭소)
장기하_(웃음) 깨알 같네요. 버릇이 한 가지 있는데 발을 비벼요. 비비다보면 뽀송뽀송해요. 정말 피곤한데 발이 끈끈하면 고민하죠. 씻고 올까, 그냥 잘까. 십중팔구는 씻습니다. 점점 신경이 쓰여서 잘 수가 없거든요.
고현정_여행은 자주 하는 편인가요?
장기하_사실 여행을 스스로 갈 만큼 돈을 벌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됐어요. 보통 가족여행이었는데 그건 사실 외식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지난해에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는데 정말 좋았어요. 미국 휴스턴과 피츠버그에 공연을 보러 갔어요. 한국의 지산록페스티벌에서 제일 보고 싶었던 코린 베일리 래를, 마지막 날 저녁 기분난다고 술 먹다가 못 봤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봤는데 기억을 거의 못하는 거죠. (웃음) 충동적으로 다음 공연이 어디서 하든 따라가서 봐야지 결심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미국 투어 중이더라고요. 그런데 공연 하나 달랑 보러 먼 길을 가긴 뭣해서 다른 공연을 찾다 폴 매카트니 공연을 발견해 티켓부터 예매했죠. 그때 본 공연과 마신 맥주가 진짜 좋았습니다. 특히 폴 매카트니는 좋다 못해 충격적이었어요.
고현정_구체적으로 말해줘요.
장기하_비틀스의 히트곡과 솔로 히트곡 30곡을 게스트도 없이 4인 밴드와 쉬지 않고 부르더라고요. 스타디움에 모인 청중도 세대를 초월했어요. 제 옆자리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있었어요. 할머니는 옛날에 비틀스 공연도 보셨대요. 노래가 지닌 세대를 초월한 보편성과 분위기, 거기에 더해 매카트니의 무대 매너가… 아! (미소) 이거야말로 비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공연에서 뭘 배웠는지, 그걸 저희 2집에 어떻게 써먹을지.
고현정_내가 비밀을 만들어준 셈이네요? 굉장히 궁금해지는데요?
장기하_공연은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거예요. 구체적인 퍼포먼스라기보다 태도죠.
고현정_드러머이기도 하죠. 처음에 드럼은 어떻게 치기 시작했어요?
장기하_고등학생 시절 교회를 다녔는데 드럼이 거기 있기에 쳐봤습니다. 기타는 중학생 때부터 쳤으니 리듬을 응용하면 되겠다 싶었죠. 새벽에 예배 시작 전 교회에서 연습을 하며 기본박자를 익혔어요. 그러다 나중에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을 때 기본박자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저뿐이라 드럼을 맡았고 대학 와서도 비슷했어요. 드럼을 치면서 노래에도 큰 도움이 됐고 밴드 전체를 보는 데에도 보탬이 되는 것 같아요.
고현정_초등학생 장기하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장기하_지금보다 훨씬 살찐 사람요. 우량아였고 약간 과체중이었고 군 입대까지는 평균 몸무게였던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군대 가니 저절로 빠지더라고요.
고현정_군대 생활은 어땠나요?
장기하_군대는 뭐, 즐겁지 않았죠. (웃음) 불행했는데 얻은 건 되게 많아요. 거기서 살도 빠졌고 노래도 많이 만들었어요. <달이 차오른다, 가자>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처럼 ‘장기하와 얼굴들’의 이름을 알린 노래는 거의 군대에서 만들었죠. 책도 많이 읽었어요. 원래 독서에 집중을 못하는데 워낙 놀 거리가 없기도 하고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음악도 군에서 들은 것들이 가슴 깊이 저장돼 있는 기분이에요. MP3 반입이 금지돼 있어서 카세트테이프나 CD만 들어야 하니 몇장의 앨범을 계속 듣게 됐거든요. 다들 잠든 뒤에 이어폰 꽂고.
고현정_불행했는데, 얻은 건 많다… (곰곰) 그거 괜찮네요.
장기하_경험적으로 불행감이 창작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기분이 좋을 때 음악을 만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 자체로 족하기에 음악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고현정_어떨 때 기분이 나빠지는데요? 지금처럼 먹는 도중에 말 시킬 때? (웃음)
장기하_음악이 직업이 된 뒤에는 제가 만든 음악이 마음에 들거나 잘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 기분이 좋고 반대 상황이 되면 기분이 안 좋죠. 잘 만들어지고 있을 때 좋고 그 반대 상황에서 안 좋죠. 그리고 외로울 때.
고현정_외로울 때, 기분이 나빠요?
장기하_보통 좋기는 어렵지 않나요? (좌중 웃음)
고현정_외로운 거예요? 고독한 거예요?
장기하_외로운 걸 있어 보이게 말하면 고독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고현정_전 달라요. 외로움은 타의적인 부분이 있어요. 선택사항일 수 있어요. 내가 외로워지는 순간은… 미안해요. 내 식으로 말해서. 아무튼 고독은 선택사항은 아니에요.
장기하_사람이 항상 불가피하게 가지고 있는 무엇이 있어요. 우리는 항상 고독한데 사람은 그걸 잊어버릴 때도 있잖아요? 친구도 많고 애인도 있으니까. 그러나 인식 못하는 동안에도 고독하긴 한 거죠. 제가 외로울 때라고 표현하는 것은 고독을 인식할 때예요. 만약 인간이 고독하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고현정_한 500년, 아니 700년 살 수 있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그래도 음악을 계속할까요?
장기하_다같이 수명이 700년으로 늘어나면 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을 것 같아요. 음악을 계속할까, 그건 모르죠. 전 기본적으로 음악이 전부고 죽을 때까지 할 거란 마인드는 아니에요. 다만 음악이 지금 가장 재미있고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이걸 하는 게 뭔가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죠. 미래에 대한 어떤 장담도 안 좋아합니다. 굳이 700살을 말하지 않아도, 50살까지 산다고 쳐도 그동안 음악을 계속할지는 알 수 없어요.
고현정_저는 연기를 오래한 사람도 아니고, 연기를 많이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번 생애에서 제가 할 수 있고 효과적인 일이 어쩌다가 연기로 풀려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기하는 동안 민망할 때가 참 많은데 그 민망함이 싫어서 시침 뚝 떼고 할 때도 있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요. 장기하씨 무대를 보고 있으면 저 사람이 스스로 즐기는 건지 민망한데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장기하_저는 즐기는 쪽인 것 같습니다.
고현정_무대 위에서 하는 동작들도 즐기고 있어요?
장기하_무대에서 제가 만든 곡을 공연할 경우는 거의 즐기죠.
고현정_무용 공연 관람도 좋아해요? 뜻대로 몸을 놀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훈련하지 않으면 힘든데 무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낀 적 있어요?
장기하_주위에 무용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볼 기회가 종종 있는데 재미있는 공연만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훈련으로 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원함을 느끼진 않는 것 같아요. 기술적 훈련의 스케일을, 전혀 훈련 안된 1부터 완전 고수 10까지로 잡는다면, 1에서 잘할 수 있는 것과 10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1의 수준에서건 10의 수준에서건 잘하는 건 재밌죠. 어떤 감흥을 말하는 거예요. 종종 현대무용을 보다보면 무용수니까 당연히 이 동작은 해야 해, 라는 클리셰가 보이는데 그건 재미없죠. 노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고현정_송창식씨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죠? 저도 굉장히 좋아해요. 어렸을 때 김민기 선생님 다음으로 잘생겼다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좌중 폭소) 김민기 선생님이 이상형이었거든요. 그분이 결혼하셨을 때 죽고 싶었어요. 혼자서 상처입고 그는 날 기다리지 못한 안된 남자야, 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웃음) 다음으로 죽고 싶었던 기억은… TV 명화극장에서 <나사렛 예수>에서 봤는데 종교는 없었지만 거기 나온 예수가 나의 이상형 남자였던 거예요. 로버트 파웰이란 배우였는데 내 상상 그대로라 실제로 그 남자가 예수였으면 하고 바랐을 정도예요. (좌중 웃음) “기다려 당신, 내가 꼭 가겠어” 하고 있었는데 몇년 지나서 <노틀담의 꼽추>라는 영화에서 어디서 많이 본 남자가 콰지모도로 분한 앤서니 퀸을 막 때리고 그의 여자를 강간하는 거예요. 그게 로버트 파웰이었어요. 이런, 젠장! 나의 예수님이 왜 저런 역할을 한 건지 원망스러웠죠. (폭소) 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네. 송창식씨 노래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곡이 뭐예요?
장기하_<가나다라>가 최고입니다. 진짜 충격적인 곡이었어요.
고현정_전 <피리 부는 사나이>!
어떤 일을 할 때 남들이 우려하면… 그건 해야 하는 일이죠
고현정_1집 음반을 들어보면 여자 만나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나를 받아주오> 같은 곡 정도를 제외하면요. 제가 눈치를 못 챈 것일 수도 있지만.
장기하_사실 1집 노래 대다수는 연애하다 상황이 어그러졌을 때 만들었어요. 직접적으로 실연을 표현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이들이 한 이야기를 제가 또 할 필요가 없다고 봐서죠. 헤어졌다, 슬프다, 보고 싶다, 그립다, 이런 말들… 이 2집에는 있구나. (좌중 폭소)
고현정_남이 한 말을 내가 다시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뭐죠?
장기하_흰 조약돌 밭에 흰 돌 하나 던진다고 그림이 변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검은 돌을 던지면 그림이 확 변하죠. 그 그림이 세상이라면, 음악 시장 혹은 내 생활이라면, 흰 돌보다 검은 돌을 던져야죠. 물론 던져서 그림이 더러워 보이는 결과가 나오면 안되겠지만.
고현정_그런데 연애를 하다가는 보통 왜 어그러져요?
장기하_이것도 고독에 관한 이야기와 비슷한데 애초에 사람과 사람이 다른데 그걸 인식 못하는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연애하는 기간 중에도 그 다름을 딱 인식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게 어그러지는 때 아닐까요? 너무 부정적인 시각인지 몰라도.
고현정_사랑에 관한 노래 중에 장기하씨에게 와닿았던 곡은 뭐예요?
장기하_많습니다. 당장은 비틀스의 <인 마이 라이프>가 생각나네요. 내게 추억도 많고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 친구들도 사귀고 그중엔 죽은 사람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있고 굉장히 사랑했던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지금 앞에 있는 당신을 좀더 좋아한다는 가사예요.
고현정_어떤 여자에게 관심이 있어요?
장기하_아름다운 여자에게?
고현정_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인 말인가요?
장기하_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대다수가 미인이라고 해도 제 눈에 별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고현정_내털리 포트먼과 샬롯 갱스부르 중에 누가 좋아요?
장기하_두 번째 말씀하신 분은 제가 잘 몰라서.
고현정_그럼 다시. 줄리아 로버츠가 나아요? 안젤리나 졸리가 나아요?
장기하_안젤리나 졸리.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대놓고 섹시함을 강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고현정_어떤 경우에 섹시함을 느껴요?
장기하_언뜻 드러날 때요. 약간 감춰진 듯하면서 한 줄기 빛이…. (좌중 웃음)
고현정_반대로 꼴불견인 여자는 어떤 여자예요?
장기하_(생각) 자신의 가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
고현정_(웃음) 본인에게 귀띔해주기도 해요?
장기하_그녀에게 애정이 있다면 하겠죠. 하지만 그 정도로 꼴불견인데 제가 애정을 갖긴 좀…. (좌중 폭소) 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주려면 골치 아픈 일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내 딸이 그러면 이야기를 해주겠죠.
고현정_지금 웃는 건 저도 마침 그런 모습을 싫어해서예요, 언젠가는 일정 기간 동안 볼 수밖에 없는 남자가 그러더라고요.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결국 이야기를 했는데 대참패(!)를 당했어요.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하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사랑에 관한 영화도 많잖아요. 재미있게 본 사랑 영화는요?
장기하_<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요. 특정 계층, 특정 집단의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 연애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인간이란 존재가 연애를 포함해 그렇게 예쁜 장면만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위악적으로 표현할 것까진 없겠지만 그 영화는 연애의 속성을 정확히 짚어내는 부분이 있었어요.
고현정_평소 영화는 자주 보세요?
장기하_자주는 못 보지만 취미가 정말 없어서 그나마 즐기는 것이 영화관람이에요. 최근에는 <블랙 스완>이 제일 좋았어요. 몇년간 본 영화 중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현정_공연하는 사람으로서 배우들을 볼 때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재미있다, 없다 생각하기도 하나요?
장기하_관객 입장에서 저런 상황에서 지을 법하지 않은 표정이 나올 때 재밌어요. 그리고 제가 언어에 좀 민감해서 문장을 잘못 띄어 말하면 어색해요. 의미에 따라 강조해야 하는 말이 있고 사이를 둬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못하면 배우가 상황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암기해서 하는 연기구나 싶어요.
고현정_“두각을 나타낸다”는 표현이 있잖아요. 그런 걸 원해요?
장기하_두각, 나타내고 싶습니다. 관심받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고요.
고현정_음악이 왜 그렇게 좋은가요?
장기하_저는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이유도 모르겠고… 그냥 재미있습니다. 요소들이 딱딱 떨어지게 음악을 만드는 과정도 즐겁고, 합주하는 느낌도 좋고, 무대에서 청중과 주거니받거니 하는 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도 좋아요. 듣는 입장에서는 들리는 둥 마는 둥 하는 많은 음악 가운데 확 튀어나오는 음악과 마주쳤을 때의 쾌감이 있어요. 판단이 아니라 쾌감에 가깝죠.
고현정_쾌감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유쾌, 상쾌, 통쾌 중에 뭐가 가장 좋아요?
장기하_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 같지만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통쾌가 아닐까요?
고현정_여름이 좋아요? 겨울이 좋아요?
장기하_여름요. 이렇게 열린 장소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요.
고현정_아… 좋은 대답이네요. 술이 좀 들어가면 부르는 노래는 뭐예요?
장기하_요즘은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 주제곡요.
고현정_<빅뱅이론>? 혹시 빅뱅, 빅 크런치(우주가 한점으로 축소되어 종말한다는 가설) 같은 현상에 관심있어요? 전쟁이나 지진 같은 대재앙이 닥치면 본인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난 내가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니 연기를 하며 살고 있는 거지 전쟁이 나면 정말 쓸모없는 존재일 것 같다는 상상을 가끔 하거든요.
장기하_제 경우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예비군으로 소집될 테고 (좌중 웃음) 특기가 방공포니까 방공포병부대에 들어가서 얼마 안 있어서 죽겠죠. 그와 별개로 역할이 있느냐. 없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는. 군대를 돌며 위문공연하는 건 여자 뮤지션의 몫일 거고요.
고현정_아! 그럼 저도 역할이 있네요. 군부대를 돌면 되겠네요. 그런데 노래를 못하니 어쩌죠.
장기하_(진지하게) 가만히 서 있어도 위문이 되지 않을까요?
고현정_고마워요. 항상 고민이었는데 풀렸네. 역시 만나길 잘했어요. (웃음) 지금부터 뭐 하러 가세요?
장기하_2집 뮤직비디오 준비하고 있어요(이 인터뷰는 5월15일에 이루어졌다. 2집 타이틀곡 <TV를 보았네>의 뮤직비디오는 6월2일 공개됐다-편집자).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제가 직접 연출하려고 해요. (웃음)
고현정_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남들이 우려하면 그건 해야 하는 일이고, 다들 격려하면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좌중 웃음) 싱어송라이터를 포함해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우려 같은 건 이길 수 있어야 해요. 반대로 다들 입 모아 좋은 일이라고 박수치면 내가 좋아서 날 위해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모두 좋아하는 걸까 재고해봐야 하는 거고요. 만약 진심으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려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내가 바라는 걸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될 조언을 주겠죠.
고현정의 선물
To. 장기하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오늘 내가 말을 잘한 걸까 허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허전함을 약간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현정이 앞으로 만날 인터뷰어들에게 작은 기념품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장기하를 위한 선물은 초콜릿이었다. 옛날 국어책에 나온 ‘위그든씨의 사탕가게’ 같은 과자점 진열장에나 어울릴 법한 예스러운 포장 디자인이 눈부터 사로잡았다. “처음 만난 사이니까 혹시 커피를 마시게 되면 함께 곁들여 먹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복고풍의 포장도 장기하씨 음악과 어울려 보였고요.” 그녀의 의도는 성공했다. 두 사람이 커피가 아니라 맥주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만 빼면.